SU-122
최근 수정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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Самоходная Установка 122мм |
SU-122 기동 및 운용 영상 |
СУ-122 | |
제원 | |
개발국가 | |
개발자 | F. F. 페트로프 |
개발기관 | 우랄중장비공장 (UZTM) |
개발연도 | 1942년 |
생산기관 | 우랄중장비공장 |
생산연도 | 1942년 11월 ~ 1943년 8월 |
생산 댓수 | 638문 |
운용 연도 | 1942년 ~ 1940년대 말[1] |
운용 국가 | |
전장 | 6.95m |
전폭 | 3.00m |
전고 | 2.32m |
무한궤도 폭 | 500mm |
전비 중량 | 30.9t |
탑승 인원 | 5명 (포반장, 조종수, 포수, 1번 탄약수, 2번 탄약수) |
엔진 | |
최고 출력 | 500hp |
출력비 | 16.18hp/t |
장애물 돌파력 | 최대 높이 0.75m 장애물 최대 너비 2.5m 참호 |
도하 가능 수심 | 최대 수심 1.3m |
현가 장치 | |
최고 속도 | 평지 주행 시: 55km/h, 8km/h 야지 주행 시: 25km/h, 8km/h |
연료 적재량 | 550L / 810L ~ 900L (내장 연료 탱크만 적제 시 / 외장 연료 탱크 추가 적재 시) |
항속 거리 | 300km |
통신 장치 | TPU-3F 인터콤 무전기 R-9 수신기 |
주무장 | 122mm M-30S 곡사포 1문 (30발) |
부무장 | 없음 |
SU-122 내부 구조 |
"SU-122"의 내부 구조는 상단의 이미지와 같다.
SU-122는 T-34-76을 유용하여 만들어졌기에 T-34-76이 지닌 장점을 그대로 가져올 수 있었으며, 이는 특히 구동계통의 부품 동류전환과 여러 소모품 또한 동시에 사용할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었다. 다만 단점도 그대로 가져와, 전황이 불리할 때에는 T-34-76과 마찬가지로 여러 잔고장으로 골머리를 앓은 기록을 자주 볼 수 있다.
주 무장인 122mm M-30 곡사포는 기존 야포로 유용되었기에 대전차화력은 좋지 못하였으나 대구경에서 오는 강력한 화력은 적 보병과 어지간한 토치카는 한 방에 무력화시킬 수 있었으며, 탄약도 그대로 유용할 수 있었기에 OF-462 고폭탄과, 관통력이 무려 200mm에 달하는 BP-460A 대전차고폭탄, 그리고 D-462A 연막탄까지 다양하게 운용 가능하였다. 이렇기에 SU-122는 당대 최강이라는 티거 전차를 정면에서 마주치고도 격파한 기록이 여럿 존재한다.
하지만 그 엄청난 화력을 감당하기 위해 여러 부분을 희생해야만 했는데, 대표적으로 분리형 장약을 채택하여 안 그대로 포미가 거대한데 좁은 공간에서 분리형 장약을 장전해야 했기에 방렬에 준비되는 시간이 길다는 단점과, 부무장을 장착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그 좁은 공간조차 만들어내기 위해 주퇴복좌기를 노출시켜 충격 및 외부 타격에 취약하다는 점이 있었다.
장갑의 두께는 전방위 45mm 장갑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자주포 내부 용적의 문제로 정면장갑의 경사 각도가 60도에서 52도로 수정되어 방호력이 살짝 낮아졌다.
SU-122는 T-34-76을 유용하여 만들어졌기에 T-34-76이 지닌 장점을 그대로 가져올 수 있었으며, 이는 특히 구동계통의 부품 동류전환과 여러 소모품 또한 동시에 사용할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었다. 다만 단점도 그대로 가져와, 전황이 불리할 때에는 T-34-76과 마찬가지로 여러 잔고장으로 골머리를 앓은 기록을 자주 볼 수 있다.
주 무장인 122mm M-30 곡사포는 기존 야포로 유용되었기에 대전차화력은 좋지 못하였으나 대구경에서 오는 강력한 화력은 적 보병과 어지간한 토치카는 한 방에 무력화시킬 수 있었으며, 탄약도 그대로 유용할 수 있었기에 OF-462 고폭탄과, 관통력이 무려 200mm에 달하는 BP-460A 대전차고폭탄, 그리고 D-462A 연막탄까지 다양하게 운용 가능하였다. 이렇기에 SU-122는 당대 최강이라는 티거 전차를 정면에서 마주치고도 격파한 기록이 여럿 존재한다.
하지만 그 엄청난 화력을 감당하기 위해 여러 부분을 희생해야만 했는데, 대표적으로 분리형 장약을 채택하여 안 그대로 포미가 거대한데 좁은 공간에서 분리형 장약을 장전해야 했기에 방렬에 준비되는 시간이 길다는 단점과, 부무장을 장착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그 좁은 공간조차 만들어내기 위해 주퇴복좌기를 노출시켜 충격 및 외부 타격에 취약하다는 점이 있었다.
장갑의 두께는 전방위 45mm 장갑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자주포 내부 용적의 문제로 정면장갑의 경사 각도가 60도에서 52도로 수정되어 방호력이 살짝 낮아졌다.
시제 자주포 U-35 |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소련은 많은 수의 견인포를 상실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전차 외에 3호 돌격포 같은 고정식 전투실을 가진 자주포가 의외로 효과적임을 전장에서 상대해 보고 깨닫게 되는데, 이는 KV-2처럼 무리하게 선회포탑에 대구경포를 장착하는 바람에 강력한 위력에도 불구하고 실제 전장에서의 활약이 돋보이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해서 소련군에도 3호 돌격포 같은 차량이 있어야 함을 소련군의 높으신 분들도 절감하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122mm와 152mm 구경 야포를 고정식 전투실에 탑재한 기갑차량이 1942년 4월부터 개발이 시작되었으며, 그 결과물이 SU-122과 SU-152였고, 두 차량 모두 가급적 탑재하는 화포와 사용하는 전차의 차체를 추가로 개조하지 않고 제작이 가능할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으며, 직사사격으로 직접지원을 하는 것 외에도 제한적인 곡사사격도 가능하도록 만들어졌다.[3] 이런 이유로 인해 SU-122는 T-34 전차의 차체를 이용해서 만들어지게 되며, SU-152는 차체의 특성상 더 강력하고 무거운 포를 장착할 여유가 있는 KV-1의 차체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42년 4월, T-34-76의 차체를 이용하여 우랄중장비공장에서 만들어진 시제 자주포, "U-35"가 시연을 보이게 되었다.
테스트 직후, 기존의 차체에서 수정해야 할 점들을 소련 군부에서는 설계자인 F. F. 페트로프에게 전달하였으며, 환기장치 증설, 잠망경의 증설 및 위치변경, 승무원 배치 변경, 전투실 레이아웃 수정등 굵직한 수정사항이 적용된 최종 설계안으로 생산하기로 결정되며, "SU-35"가 발표, 이후 제식명을 "SU-122"로 결정지으면서 양산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122mm와 152mm 구경 야포를 고정식 전투실에 탑재한 기갑차량이 1942년 4월부터 개발이 시작되었으며, 그 결과물이 SU-122과 SU-152였고, 두 차량 모두 가급적 탑재하는 화포와 사용하는 전차의 차체를 추가로 개조하지 않고 제작이 가능할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으며, 직사사격으로 직접지원을 하는 것 외에도 제한적인 곡사사격도 가능하도록 만들어졌다.[3] 이런 이유로 인해 SU-122는 T-34 전차의 차체를 이용해서 만들어지게 되며, SU-152는 차체의 특성상 더 강력하고 무거운 포를 장착할 여유가 있는 KV-1의 차체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42년 4월, T-34-76의 차체를 이용하여 우랄중장비공장에서 만들어진 시제 자주포, "U-35"가 시연을 보이게 되었다.
테스트 직후, 기존의 차체에서 수정해야 할 점들을 소련 군부에서는 설계자인 F. F. 페트로프에게 전달하였으며, 환기장치 증설, 잠망경의 증설 및 위치변경, 승무원 배치 변경, 전투실 레이아웃 수정등 굵직한 수정사항이 적용된 최종 설계안으로 생산하기로 결정되며, "SU-35"가 발표, 이후 제식명을 "SU-122"로 결정지으면서 양산에 돌입하게 되었다.
СУ-122М |
"SU-122M"은 개선한 SU-122 차체에 M-30보다 주퇴복좌기가 소형화 된 122mm U-11 곡사포를 장착한 파생형이다.
주포 안쪽 반동 메커니즘의 크기가 줄어든 덕분에 주포 장착 마운트의 설계도 개선되면서 차체 전면이 SU-85같은 형상으로 재설계되었으며, 차체 전면에는 온전한 조종수용 출입 해치도 생겼고 실내 공간도 SU-122보다 더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SU-122의 현대화는 이미 무리라고 판단된 소련 군부의 평가 하에, SU-122M은 1문만이 생산되었다. 그러나 SU-85를 설계할 당시, 기존의 SU-122 차체에서는 D-5S 주포를 탑재하기 무리가 있다고 판단되어 SU-122M의 차체를 이용하여 생산하기로 결정하며 사장되지 않고 SU-85로 계보가 이어지게 되었다.
주포 안쪽 반동 메커니즘의 크기가 줄어든 덕분에 주포 장착 마운트의 설계도 개선되면서 차체 전면이 SU-85같은 형상으로 재설계되었으며, 차체 전면에는 온전한 조종수용 출입 해치도 생겼고 실내 공간도 SU-122보다 더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SU-122의 현대화는 이미 무리라고 판단된 소련 군부의 평가 하에, SU-122M은 1문만이 생산되었다. 그러나 SU-85를 설계할 당시, 기존의 SU-122 차체에서는 D-5S 주포를 탑재하기 무리가 있다고 판단되어 SU-122M의 차체를 이용하여 생산하기로 결정하며 사장되지 않고 SU-85로 계보가 이어지게 되었다.
СУ-122-III |
SU-85 |
자세한 내용은 SU-85 문서 참고하십시오.
СУ-122Т |
"SU-122T"는 소련이 전후 남겨진 SU-122를 개수하여 무장을 탈거하고 이를 철판으로 용접한 뒤에, 각종 구난장비를 장착 가능하도록 개조한 파생형으로서, 전후 냉전시기에 헝가리 인민군에서도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보여이 야노시 기술 박물관에 단 1량만이 잔존하고 있는 상태이다.
- T-34 전차의 장점
T-34의 차체를 그대로 가져와 사용한 만큼, T-34의 장점들을 그대로 유용할 수 있었다. 높은 생산성과 전면 경사장갑 구조와, 대다수의 소모품의 동류교환 가능, 그리고 T-34를 수리 할 수 있다면 SU-122를 수리 가능할 정도로 양 차량간의 장점의 시너지는 뛰어난 편에 속했다. 이에 추가로, 광폭형 궤도를 탑재하여 험지 주행 중에도 무게배분을 적절히 분산 가능한 장점도 그대로 가져와 하술할 무게중심이 쏠린다는 단점을 광폭궤도를 통해 어느 정도 줄일 수 있었다.
- 강렬한 화력
122mm M-30 곡사포의 화력은 그 구경만큼 굉장했다. 단 1발로 자신보다 몇배는 큰 판터나, 티거도 쉽게 무력화 할 수 있었으며, 토치카와 적 보병들을 마주쳤을 때에도 그 강대한 화력으로 침묵시킬 수 있었다. 이는 쿠르스크 전투 와중 6호 전차 티거를 지휘하던 독일군의 10중대 사령관이었던 "폰 빌부아(von Villerbois)" 대위가 SU-122 여러 문의 기습을 받고 중상을 입어 후방 야전병원으로 이송되었다는 독일 측의 기록으로 입증이 가능하다. 특히 1943년에 들어서면서 122mm M-30 전용의 대전차고폭탄인 BP-460A가 보급되었는데, 해당 고폭탄의 관통력은 소련군 측의 기록으로는 무려 200mm 수직 장갑을 관통 가능한 어마무시한 화력을 보여주었다. 이 덕에 고폭탄으로도 충분히 독일의 기갑전력을 상대 가능하였지만 대전차화력까지도 증대해져 화력 하나만큼은 후계자인 ISU-122과도 꿀리지 않았다.[5]
- 다양한 범용성
상술한 강렬한 화력에 힘입어, 여러 탄약을 사용할 수 있었기에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시시각각 대전차자주포로도, 돌격포로도, 자주곡사포로도 매우 다양한 임무에 투입 가능하였다.
- 원활한 수준의 무전기
자주포 내부의 특성상, 내외부의 소통이 힘들었기에 무전기를 추가적으로 배치하여 승무원들이 소음 속에서도 각 자주포간의 협동 및, 내부 소통에 문제가 없도록 하였다.
- 낮은 시인성
시인성의 은닉을 위해 개발 당시에도 전투실을 낮게 만들어 시인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편에 속했다. 이 덕에 은닉 시에는 시인성이 매우 낮아져 언덕 뒤나, 숲속에서 방어전을 펼칠때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 T-34의 단점
T-34의 장점을 그대로 유용한 만큼, 등가교환으로 인해 T-34의 단점을 그대로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문제점으로는 부실한 변속기와, 무장이 전면에 돌출되어 있는 특성 상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리던 T-34의 단점이 SU-122에서 더 부각되는 등이 있다.
- 돌출된 주퇴복좌기
내부 용적을 확보하기 위해 주퇴복좌기가 그대로 돌출하는 문제가 발생해서 포방패가 포에 비해서 매우 길쭉하게 돌출하는 특유의 형태가 만들어졌다. 물론 그대로 주퇴복좌기를 노출한다면 외부 오염물과 파편에 의한 피해가 있을 것이기에 차체 장갑보다 두꺼운 약 52mm 두께의 장갑을 주퇴복좌기를 감싸는 형태로 제작하였으나 장갑의 각도 및 위치의 문제로 실제 방호력은 낮은데다, 혹시라도 도비탄이 이런 곳에 피격당하면 최악의 경우 주포 자체를 사용 불가능하게 되는 상황도 충분히 상정 가능하였다.
- 낮은 부앙각
SU-122는 곡사사격을 위해 -3도에서 +26도까지 포의 상하각도를 조절이 가능했지만, 이정도 부앙각으로는 곡사사격에는 각도가 부족해서 후방에서 화력을 지원해주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이 때문에 소련군은 후방 화력지원은 SU-76M이, 근접 화력지원은 SU-122가 도맡아서 하는 것으로 분리편제하여 이 문제점을 해결하였다.
- 좁은 내부 용적
주퇴복좌기를 희생해내면서까지 어떻게든 전투가 가능한 공간은 뽑아냈지만, 그래도 좁은 공간에서 분리장약방식을 사용하는 대구경의 야포를 다루므로 장전속도가 느린데다가, 환기장치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서 전투 중 포연에 의해 시야확보 및 화기관제도 용이하지 않았다. 이 탓에 소련 군부에서는 T-34 차체로 대구경 자주포를 제작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 상대적으로 대전차화력에 집중된 자주포는 T-34 차체로, 대구경 화력지원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KV-1 및 IS 전차 차체로 개발하는 것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 저품질의 광학장비
소련 기갑장비의 고질적인 문제점인 저품질의 광학장비 문제로 외부 관측이 힘들다는 점과, 직사사격이 부실하다는 문제점이 실전에서 다수 보고되었다.
- 부무장 미존재
부무장이 존재하지 않아 단독 기동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소련군은 SU-122를 단독편제하지 않고 다른 전차들과 같이 편제하였기에 이러한 점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략)...강력한 적군에 둘러싸인 우리의 전투는 우리 전차병들의 뛰어난 기술과 영웅주의가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텔만 주립 농장을 방어하던 우리 전차 소대는 KV-85 3량과, SU-122 2문 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당시 지휘관이었던 포두스트 중위는 독일군이 타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을 포착하여 계속해서 위치를 바꾸면서 독일 전차에 포격하였으며, 우리 소대의 SU-122는 개활지에 진입하고, 수송장갑차에 탄 보병들을 포착하여 사격하며 일린츠키로 가는 도로를 따라 계속해서 추격하면서 독일군의 발을 묶어두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특히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우리 전차 소대가 아군인 제17소총군단이 독일군의 포위망에서 벗어나는 데 기여했다는 점입니다. 오후 7시 반까지 우리 소대의 전차들은 포위된 상태에서 계속 전투를 벌였지만 텔만 농장에는 더 이상 적 보병들이 안보였습니다. 우리 측에서는 엄폐물의 사용과 높은 화력, 그리고 적절한 기동으로 거의 손실이 발생하지 않았으며, (부상자 2명 제외) 독일군에게는 큰 피해를 입혔는데, 1944년 1월 28일 하룻동안 우리는 티그르 전차 5대, T-4 전차 5대 , T-3 전차 2대, 장갑차 7대, 대전차포 6대를 격파했으며, 추가로 기관총 진지 4개, 말이 끄는 마차 28개, 보병 최대 3개 소대를 격퇴하는 데에 성공하였습니다.소련 육군 제38군 산하 제7독립근위중전차연대 기갑 및 기계화 부대의 전투 작전 보고서 발췌.
SU-122는 급하게 제작된 자주포였기에 여러 단점이 혼재한 자주포였으나 최초로 개발된 T-34 기반 자주포이며, 본래 값싸고 빠르게 만들어서 뿌리려고 한 것이 목적이었다는 것과는 별개로 각지에서 대활약을 한 차량이다.
당시 소련 공군이 지원하기 힘든 시가지와 같은 곳에서 SU-122들은 돌격포와 유사한 임무를 수행하면서 보병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으며, 투입된 전선 각지에서 러브콜이 끊이질 않았다. 이는 상단의 제7독립근위중전차연대 산하 제38군의 전투 보고서에서 여실히 드러나는데, 단 하룻동안 기갑차량만 무려 6호 전차 티거 5량, 4호 전차 5량, 3호 전차 2량에 장갑차 7량을 협동 작전에서 격파했다는 점에서 SU-122는 확실하게 강력한 자주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탓에, 쿠르스크 전투 전후로 SU-122의 생산 중단을 지시한 소련 군부가 해당 명령이 시기상조였다고 보는 호사가들도 다수 존재한다. 비록 여러 단점이 있었지만 강력한 화력과 투입된 전선에서 대활약을 했다는 보고가 다수 올라왔다는 것이 그 이유.
총평으로는 여러 문제점과 소련의 긴박한 상황속에서도 제 몫을 다하면서 각지에서 큰 활약을 했던 것과 달리, 소련 군부의 이른 판단과 더불어 생산이 중단되어 그 빛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SU-122를 운용하면서 얻은 각종 실전 데이터와 개선안, 그리고 고정형 차체의 자주포가 전장에서 화력지원에 매우 유리하다는 점 등등, 이러한 점을 바탕으로 후임인 SU-76M, SU-85, SU-85M, SU-100 및 ISU-152, ISU-122 등의 자주포에게 큰 영향을 끼쳤기에 소련이 기갑전력을 확충하는데 큰 도움을 준 자주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선으로 옮겨지는 화차 위의 SU-122 |
실전에 투입된 SU-122는 SU-76과 같이 혼성편제된 부대로 투입되었으나, 본질적으로 경장갑에 오픈탑이며, 곡사사격에 적합한 SU-76과의 궁합이 맞지 않았으므로 곧 따로 부대를 만들어서 편성하였다.
일단 122mm 야포의 화력 자체는 상당해서 적의 참호나 벙커를 공격할 때 적당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급한대로 독일군의 전차가 돌격하면 대응사격해서 격파가 가능하다는 점도 높게 평가를 받았다. 일단 이 차량이 급조품의 성격이 짙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럭저럭 쓸만하다는 것이다.
다만, 앞서 언급했듯이 직사사격용 조준기가 부실하고, 느린 장전속도까지 겹치는 바람에 보통은 독일군 전차에게 선제사격을 얻어맞고 박살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므로, 적 전차를 직사사격해서 잡는 것을 우선적으로 생각한 기갑차량이 필요하다는 점을 증명하게 된다. 이는 후에 대전차전에 중점을 둔 SU-85, SU-100으로 현실화된다.
일단 122mm 야포의 화력 자체는 상당해서 적의 참호나 벙커를 공격할 때 적당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급한대로 독일군의 전차가 돌격하면 대응사격해서 격파가 가능하다는 점도 높게 평가를 받았다. 일단 이 차량이 급조품의 성격이 짙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럭저럭 쓸만하다는 것이다.
다만, 앞서 언급했듯이 직사사격용 조준기가 부실하고, 느린 장전속도까지 겹치는 바람에 보통은 독일군 전차에게 선제사격을 얻어맞고 박살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므로, 적 전차를 직사사격해서 잡는 것을 우선적으로 생각한 기갑차량이 필요하다는 점을 증명하게 된다. 이는 후에 대전차전에 중점을 둔 SU-85, SU-100으로 현실화된다.
볼호프 전선의 소련 육군 소속 SU-122 "919번차" |
SU-122의 데뷔전은 레닌그라드 전선과 동시에 발발하였던 볼호프 전선이었다.
당시 막 생산된 SU-122들은 제1433자주포연대 및 제1434자주포연대 산하로 배속되어 1943년 2월 2일부터 동월 13일까지 약 10일간의 전투를 거쳤다.
이 10일간의 전투 속에서 좋은 실전 데이터 여러 개를 획득하였으며, 익일인 1943년 2월 13일부터 최전선에 참전한 제1433자주포연대 및 제1434자주포연대는 레닌그라드 포위를 해제하기 위한 준비로 스메르딘 근교에서 전투에 참전하였고, 5~6일간 지속된 전투에서 양 자주포연대에서는 토치카 47개, 박격포대 5개, 대전차포 14문과 적 전차 19대에서 28대를 격파, 독일군의 탄약고 4개를 전소시키는 활약을 달성하였다.
당시 막 생산된 SU-122들은 제1433자주포연대 및 제1434자주포연대 산하로 배속되어 1943년 2월 2일부터 동월 13일까지 약 10일간의 전투를 거쳤다.
이 10일간의 전투 속에서 좋은 실전 데이터 여러 개를 획득하였으며, 익일인 1943년 2월 13일부터 최전선에 참전한 제1433자주포연대 및 제1434자주포연대는 레닌그라드 포위를 해제하기 위한 준비로 스메르딘 근교에서 전투에 참전하였고, 5~6일간 지속된 전투에서 양 자주포연대에서는 토치카 47개, 박격포대 5개, 대전차포 14문과 적 전차 19대에서 28대를 격파, 독일군의 탄약고 4개를 전소시키는 활약을 달성하였다.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 나르바 개선문 근교의 소련 육군 소속 SU-122 소대 |
레닌그라드 공방전 및 전선에도 다수의 SU-122가 참전해 독일군을 막아내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특히, 레닌그라드의 위치 특성 상 신형 장비의 수령이 어려웠는데, 강력한 화력을 지닌 SU-122는 여러 단점 탓에 전투에서 부적절하다고 판단되었지만, 독일군을 상대로 나름 활약하였고, 1944년 레닌그라드 포위가 해제되면서 가용차량들 또한 타 부대로 배속 및 이관되었다.
쿠르스크 전투 당시의 소련 육군 소속 SU-122 |
사상 최대의 전차전, 쿠르스크 전투 당시에도 다수의 SU-122가 종심돌파용 및 근접화력지원 역할로 약 300여문이 전선에 투입되었다. 전선에 투입된 SU-122들은 자신보다 몇배는 더 큰 6호 전차 티거 및, 5호 전차 판터, 페르디난트 구축전차를 상대로 밀리지 않는 화력을 보여주면서 대활약하였으며, 그 반대급부로 최전선의 저항이 완강한 곳 위주로 배치되어 대다수의 개체가 파괴되거나, 혹은 노획되는 운명을 맞았다.
브레슬라우 공방전 당시 격파된 소련 육군 소속 SU-122 |
기록 상으로 마지막으로 SU-122가 투입된 전장은 브레슬라우 공방전으로 추정된다.[6] 당시 브레슬라우는 패색이 짙어져가는 나치 독일 최후의 방어선 중 하나로 히틀러에 의해 천명되어 수많은 독일군이 소련군을 막아내기 위해 1945년 1월부터 4월까지 브레슬라우 시내에서 격전을 벌였으며, 이 당시 소수의 SU-122가 돌격포로 이용되어 독일군을 무찌르는 활약을 하였다.
시내에 투입된 SU-122는 고정형 전투실이라는 단점 탓에 판처파우스트나 적 기갑차량들의 우회 등에 피해를 입었지만 종전과 마찬가지로 높은 화력을 집중할 수 있었기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시내에 투입된 SU-122는 고정형 전투실이라는 단점 탓에 판처파우스트나 적 기갑차량들의 우회 등에 피해를 입었지만 종전과 마찬가지로 높은 화력을 집중할 수 있었기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애국 공원 소장 소련 육군 제15전차군단 제1418자주포대대 소속 SU-122[7] |
원조 개발국이자, 사용국으로서,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자주포로 활발히 사용하였다.
전후 살아남은 SU-122는 극히 드물었고, 1940년대 말까지 2선급 부대에서 운용, 혹은 기갑학교에서 자주포병 훈련용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전량 기갑 표적물로 소모되거나 퇴역하였으며, 우랄 전투 영광 박물관과 애국 공원 등에 총 3문 만이 잔존해 있는 상태이다.[8]
전후 살아남은 SU-122는 극히 드물었고, 1940년대 말까지 2선급 부대에서 운용, 혹은 기갑학교에서 자주포병 훈련용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전량 기갑 표적물로 소모되거나 퇴역하였으며, 우랄 전투 영광 박물관과 애국 공원 등에 총 3문 만이 잔존해 있는 상태이다.[8]
쿠머스도르프 전차 시험장의 독일 국방군 노획 슈투름게쉬츠 SU-122(r) |
1943년 이후로 최소 5문 이상을 노획하였으며, "슈투름게쉬츠 SU-122(r)"이라는 제식 명칭 및 식별 명칭을 부여해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 중 1문은 1944년 스코다의 필젠 공장에서 연구용으로 사용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또 다른 1문은 상단의 쿠머스도르프 전차 시험장에서 나치 독일 패망까지 기술 연구용으로 사용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중 1문은 1944년 스코다의 필젠 공장에서 연구용으로 사용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또 다른 1문은 상단의 쿠머스도르프 전차 시험장에서 나치 독일 패망까지 기술 연구용으로 사용되고 있었다고 한다.
보여이 야노시 기술 박물관 소장 헝가리 인민군 소속 SZU-122T |
헝가리 인민군 또한 냉전 시기 최소 1문 이상을 소련으로부터 공여받아 "SZU-122"라는 제식명을 부여해 운용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현재는 부다페스트 인근의 보여이 야노시 기술 박물관에 SU-122T 1문이 소장 중에 있다.
SU-122 |
워 썬더 소련 육군 2랭크 구축전차 라인에 배치되어 있으며, 차체는 T-34를 기초로 하기에 주행성과 기동성은 훌륭하다. 122mm 고폭탄과 대전차고폭탄을 사용하기에 2랭크 대비 화력은 우수하나 대전차고폭탄의 관통 후 파편 부족 문제로 중장갑차량을 대응하는 정도로만 몇 발 챙겨두고, 주력 탄은 그대로 스톡 고폭탄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다만 부무장이 없는데다, 곡사포 특성 상 중장거리 명중률이 낮으며 구경이 커서 장전 속도도 느리기에 우회와 장거리 저격을 조심해야 한다.
월드 오브 탱크에 등장한 SU-122 |
스틸 디비전 2에 등장한 소련 육군 소속 SU-122 |
소련군의 보병 지원 차량으로 등장한다. 122mm 주포로 2km 내의 보병과 중화기를 쉽게 처치할 수 있다.
하지만 잔뜩 등장하는 PaK 40급 주포 장착 유닛들에게 너무 쉽게 죽어서 써먹기는 힘들다. HEAT를 쏴서 명중시 판터나 타이거도 일격에 격파는 가능하지만 명중률이 매우 낮으면서 장전속도도 느려서 가성비는 낮다. 이미 정예 근위사단들은 IS-2나 ISU-122 같은 차량이 돌아다니는 1944년 시점이라 크게 가치는 없는 하급 유닛이다. 조금 낙후된 보병사단이나 예비사단들이 주로 갖고 있다.
여러 대가 동시에 발사해서 중전차 격파를 노려볼 수 있지만 가성비가 낮은 발악에 가깝다. 그나마 시가지나 숲 지역에서 초근접전시에는 명중률이 높으므로 어느정도 실전성이 있다. 또는 전차부대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멀리 있는 보병이나 대전차포 상대로 지원사격을 해준다. T-34-76이나 T-34-85에 비해 대전차포 죽이는 속도가 빨라서 유용하다. 아니면 보병들을 따라다니면서 대전차포나 전차가 없는 곳은 충분히 화력지원해줄 수 있다.
캠페인에선 벙커 철거용으로도 쓰인다.
하지만 잔뜩 등장하는 PaK 40급 주포 장착 유닛들에게 너무 쉽게 죽어서 써먹기는 힘들다. HEAT를 쏴서 명중시 판터나 타이거도 일격에 격파는 가능하지만 명중률이 매우 낮으면서 장전속도도 느려서 가성비는 낮다. 이미 정예 근위사단들은 IS-2나 ISU-122 같은 차량이 돌아다니는 1944년 시점이라 크게 가치는 없는 하급 유닛이다. 조금 낙후된 보병사단이나 예비사단들이 주로 갖고 있다.
여러 대가 동시에 발사해서 중전차 격파를 노려볼 수 있지만 가성비가 낮은 발악에 가깝다. 그나마 시가지나 숲 지역에서 초근접전시에는 명중률이 높으므로 어느정도 실전성이 있다. 또는 전차부대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멀리 있는 보병이나 대전차포 상대로 지원사격을 해준다. T-34-76이나 T-34-85에 비해 대전차포 죽이는 속도가 빨라서 유용하다. 아니면 보병들을 따라다니면서 대전차포나 전차가 없는 곳은 충분히 화력지원해줄 수 있다.
캠페인에선 벙커 철거용으로도 쓰인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DLC에 등장한 소련 육군 소속 SU-122 |
IL-2 슈투르모빅의 후속작, IL-2 Sturmovik: Great Battles 스탈린그라드 전투 DLC에 소련군의 차량으로 등장한다.
SOVIET SELF-PROPELLED GUN SU-122 |
1/35 스케일로 1종을 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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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소전 이후 살아남은 단차가 드물었던데다, 이 즈음에는 122mm M-30 포 대신 동일 구경의 A-19 야포를 얹은 ISU-122나, A-19 야포를 개량하여 신형 포를 얹은 중전차인 IS-2, 152mm ML-20S 포를 사용하는 ISU-152 등의 중자주포 및 중전차들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레 2선급 부대에서 운용되다 1940년대 말 퇴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 이 수치에는 사라진 나라가 포함되어 있다.[3] SU-122와 SU-152뿐 아니라 대부분의 소련자주포는 이런 다목적성을 가지고 만들어졌다.[4] SU-85 역시 SU-122M의 차체를 활용하였기에 엄밀히 말하자면 SU-122M의 차체를 사용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5] 다만 장포신에 철갑유탄을 사용 가능한 ISU-122가 탑재한 A-19 야포와 비교할 시 곡사포인 M-30은 대전차화력이 좀 부족한 면이 있다. [6] 베를린 공방전 당시에도 참전했다는 일부 매체의 기록이 있으나 이는 사실 확인이 불가한데, 왜냐하면 당시 가동 가능한 SU-122의 수량은 1943년 쿠르스크 전투를 전후로 약 300여문이 격파 및 노획 등으로 망실되었기 때문에 극히 드물었으며, 살아남은 280여문은 최전선군에 배속되지 않고 레닌그라드의 봉쇄 해제 이후에 폴란드 근교의 자주포연대로 배속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보면 동일한 구경의 베를린 공방전에 실전 투입된 ISU-122와의 혼동이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7] 차량 일련번호 305320번차로, 원래 V. S. 포베로프 중위가 지휘하던 단차였으나 전투에서 피격당해 2명이 사망하는 중파를 겪고 후방으로 옮겨져 수리를 마쳤으며, 냉전 시기에는 훈련용으로 이용되었다가 1960년대 즈음 애국 공원의 전신인 쿠빙카 전차 박물관으로 옮겨졌고, 이후 "스탈린을 위해!"라는 문구를 추가로 측면에 새겨넣었다가 2010년대 즈음 애국 공원으로 재단장하며 해당 단차도 재도색 및 차량번호를 새롭게 부여받았다. [8] 이 중 우랄 전투 영광 박물관의 SU-122는 SU-122T로 개수되며 부품 다수를 망실한 상태였기에 주포 및 주퇴복좌기를 새로이 제작하고, T-34-85M의 부품을 유용하여 복원되었고, 이 외 1문의 경우 어디에 보존되어 있는지 알려진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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