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크트판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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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gdpanzer V "Jagdpanther" |
야크트판터 기동 및 발포 영상 |
"당시 독일 기갑부대는 거의 대부분 방어전투를 하고 있었는데, 야크트판터는 이런 방어전투에 딱 어울리는 무기였다. 기다리고 있다가 발포만 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 영국 크롬웰 프로덕션, '2차 대전사' <독일 전차의 완성, 타이거> 편
제2차 세계 대전시기 독일 국방군이 운용한 구축전차. 5호 전차 판터의 차체에 8,8cm PaK 43 71구경장 대전차포를 얹은 구축전차로, 공수주의 균형이 어우러져 연합군에겐 매우 위협적인 존재로 등극했다. 장착한 주포[1] 자체가 2차대전 최강의 공격력(관통력)을 갖고 있고 소련의 SU-85, SU-100에서 영향을 받은 경사장갑을 채용했으며 여기에 판터와 맞먹는 방어력과 기동성을 갖췄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원판인 판터 전차의 고질적인 최종구동장치 문제가 야크트판터의 무게 불균형으로 심화되면서 30km주행시 마다 고장이 발생할 정도로 큰 골치를 썩였으나, 신형 최종구동장치가 문제를 말끔히 해결했다고 한다.[2]
방어력은 훨씬 강하나 느려터지고 신뢰성에 문제가 있는 페르디난트/엘레판트나 야크트티거, 기동성은 좋으나 방어력이 극히 낮은 나스호른과는 달랐다.
노벨상 수상자인 독일문학의 거장 귄터 그라스가 이 전차의 탄약수로 탑승해서 전투를 몇번 치른 적이 있다.
방어력은 훨씬 강하나 느려터지고 신뢰성에 문제가 있는 페르디난트/엘레판트나 야크트티거, 기동성은 좋으나 방어력이 극히 낮은 나스호른과는 달랐다.
노벨상 수상자인 독일문학의 거장 귄터 그라스가 이 전차의 탄약수로 탑승해서 전투를 몇번 치른 적이 있다.
야크트판터 제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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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토타입 - 차량 V 101 |
4호 기갑 자주포 C형과 D형 항목에 서술된것처럼, 8,8 cm 56구경장 대공포를 자주화한 Pz.sfl.IVc는 어디까지나 마지노선 포격용으로 만들어졌던 차량이라 프랑스가 함락되면서 구축전차로 용도변경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941년에 VK 45.01 설계안이 구체화되자 같은 8,8 cm 56구경장 포를 자주화했다는 의미는 색이 바래버렸다. 이후 차체를 밀폐하여 장갑화하고 8,8 cm PaK 43 71구경장 대전차포를 얹어서 화력을 증강하여 돌격포로 재설계하려는 계획(C2형)이 착수되었고, 세부조정을 거치면서 생산일정을 조율하는 정도(D형)까지 다다랐으나, 기존 차체를 포기하고 설계를 VK 30.02 설계안으로 옮겨태우라는 지시가 떨어진다. 따라서 차종도 돌격포에서 구축전차로 변경되어 야크트판터의 직계조상이 된다.
이후 판터 2 계획에 맞추어 차체도 다시 판터 2 기준으로 변경되었다가, 판터 2가 43년 5월 취소되면서 다시 판터 기준으로 회귀하는 등 우여곡절을 거쳤고 이 과정에서 차량의 본디 명칭인 Pz.sfl.IVd가 사라지고 구축전차판터(Panzerjäger Panther)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이름은 곧 구축판터 즉 야크트판터(Jagdpanther)로 줄었다. 이후 물렌바우-인더스트리 AG(Muhlenbau-Industrie AG, MIAG) 공장에서 43년 말부터 양산이 시작되어 44년부터 본격적으로 출고가 되었고, 이후 1944년 말 들어서는 MNH와 MBA 공장도 생산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생산과정에서 엔진덱 등 차체의 세부조정과 최종구동장치의 개량과 교체 등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원본인 판터에도 적용되어, 되려 M4 셔먼이나 50 km밖에 못 가고 뻗어버린 기록이 남아있는 T-34 전차보다 나은 성능을 보여주었다.
이후 판터 2 계획에 맞추어 차체도 다시 판터 2 기준으로 변경되었다가, 판터 2가 43년 5월 취소되면서 다시 판터 기준으로 회귀하는 등 우여곡절을 거쳤고 이 과정에서 차량의 본디 명칭인 Pz.sfl.IVd가 사라지고 구축전차판터(Panzerjäger Panther)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이름은 곧 구축판터 즉 야크트판터(Jagdpanther)로 줄었다. 이후 물렌바우-인더스트리 AG(Muhlenbau-Industrie AG, MIAG) 공장에서 43년 말부터 양산이 시작되어 44년부터 본격적으로 출고가 되었고, 이후 1944년 말 들어서는 MNH와 MBA 공장도 생산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생산과정에서 엔진덱 등 차체의 세부조정과 최종구동장치의 개량과 교체 등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원본인 판터에도 적용되어, 되려 M4 셔먼이나 50 km밖에 못 가고 뻗어버린 기록이 남아있는 T-34 전차보다 나은 성능을 보여주었다.
Ausf.G1 |
Ausf.G2 |
과거에는 단순히 생산월별로 초기~최후기형으로 구분하였으나 현재는 판터 A형 차체를 활용한 야크트판터 G1형과 판터 G형 차체를 이용한 야크트판터 G2형으로 크게 두 종류로 구분한다. G1형은 생산 초기부터 생산되었고, G2형은 보다 나중인 1944년 12월~1945년 1월부터 생산되기 시작했다.
초기 G1모델은 소형 포방패와 판터 A형의 기반 엔진덱이 적용되었고, 조종수 관측창이 두 개로 구분되는 등의 특징이 있다. 주포는 모노블럭 포신의 PaK 43/3 사양이 적용되었다. 치메리트 코팅은 1944년 9월까지 생산된 G1형에 적용되었다.
G2모델은 판터 G형 엔진덱과 배기구, 더 커진 포방패와 외부로 볼트가 드러난 볼트고정식 포방패 고정부, 한개로 이루어진 조종수 관측창 등의 특징이 있다. 1944년 5월부터는 주포가 포신 부품이 2단으로 구분된 PaK 43/4 사양으로 변경되었다. 또한 판터 G형은 A형보다 엔진룸이 길기 때문에 판터 G형 기반의 야크트판터들은 전투실 후면부 장갑 형상을 더 가파르게 변경하여 전투실 뒤쪽으로 튀어나온 부분을 조금 줄여서 엔진룸 공간을 확보했다.
다만 디자인 변화가 점진적으로 실행되고 예비부품 부족으로 인해 여러부품이 혼합되어 생산되었기 때문에 비교적 나중에 생산된 일부 G1모델은 G2모델의 포방패나 유동륜을 장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같은 G1, G2 형식을 받은 차량들이라도 전투실상면과 포신, 머플러, 포방패 등 월별생산차이가 많아서 딱 잘라서 G1, G2로 구분하기는 곤란하다.
초기 G1모델은 소형 포방패와 판터 A형의 기반 엔진덱이 적용되었고, 조종수 관측창이 두 개로 구분되는 등의 특징이 있다. 주포는 모노블럭 포신의 PaK 43/3 사양이 적용되었다. 치메리트 코팅은 1944년 9월까지 생산된 G1형에 적용되었다.
G2모델은 판터 G형 엔진덱과 배기구, 더 커진 포방패와 외부로 볼트가 드러난 볼트고정식 포방패 고정부, 한개로 이루어진 조종수 관측창 등의 특징이 있다. 1944년 5월부터는 주포가 포신 부품이 2단으로 구분된 PaK 43/4 사양으로 변경되었다. 또한 판터 G형은 A형보다 엔진룸이 길기 때문에 판터 G형 기반의 야크트판터들은 전투실 후면부 장갑 형상을 더 가파르게 변경하여 전투실 뒤쪽으로 튀어나온 부분을 조금 줄여서 엔진룸 공간을 확보했다.
다만 디자인 변화가 점진적으로 실행되고 예비부품 부족으로 인해 여러부품이 혼합되어 생산되었기 때문에 비교적 나중에 생산된 일부 G1모델은 G2모델의 포방패나 유동륜을 장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같은 G1, G2 형식을 받은 차량들이라도 전투실상면과 포신, 머플러, 포방패 등 월별생산차이가 많아서 딱 잘라서 G1, G2로 구분하기는 곤란하다.
Starr 란 "고정된"이란 뜻으로 야크트판터에 주퇴복좌기가 없는 주포를 탑재했다. 독일이 항복하기전에 프로토타입 1대만 완성되었다.
참조1 참조2
1944년 말에 등장한 설계안으로 야크트티거의 12.8cm PaK 44 주포를 야크트판터에도 장착할 계획으로 나왔다.
커다란 12,8cm 대전차포를 판터 플랫폼에 안정적으로 장착하기 위해 차체 레이아웃을 상당히 뜯어고쳐서 엔진룸이 앞으로 이동하고 전투실이 원래 엔진룸이 있던 후방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이미 야크트판터도 충분히 괜찮다고 평가받았고, 무리하게 더 큰 주포를 얹을 필요는 없다고 판단되어 해당 계획은 설계도에서 멈췄다. 또한 분리장약식 포탄 사용 때문에 연사력이 떨어지는 12.8cm 주포 자체의 단점도 해당 계획이 최소된 이유였다.
월드 오브 탱크에 등장하는 야크트판터2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다. 정확히는 판터의 차대를 사용하는 야크트판터를 기반으로 만든 이 설계안과 판터 2를 기반으로 고려되었던 또 다른 구축전차 설계안을 합쳐낸 창작전차다. 참조
1944년 말에 등장한 설계안으로 야크트티거의 12.8cm PaK 44 주포를 야크트판터에도 장착할 계획으로 나왔다.
커다란 12,8cm 대전차포를 판터 플랫폼에 안정적으로 장착하기 위해 차체 레이아웃을 상당히 뜯어고쳐서 엔진룸이 앞으로 이동하고 전투실이 원래 엔진룸이 있던 후방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이미 야크트판터도 충분히 괜찮다고 평가받았고, 무리하게 더 큰 주포를 얹을 필요는 없다고 판단되어 해당 계획은 설계도에서 멈췄다. 또한 분리장약식 포탄 사용 때문에 연사력이 떨어지는 12.8cm 주포 자체의 단점도 해당 계획이 최소된 이유였다.
월드 오브 탱크에 등장하는 야크트판터2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다. 정확히는 판터의 차대를 사용하는 야크트판터를 기반으로 만든 이 설계안과 판터 2를 기반으로 고려되었던 또 다른 구축전차 설계안을 합쳐낸 창작전차다. 참조
전선에서의 야크트판터 |
노르망디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루더는 1944년 8월 654중구축전차대대[3] 2중대 소속으로 3량의 야크트판터를 지휘해 2분 동안의 전투로 영국군 제 15 스코틀랜드 사단 소속의 처칠 전차 11량을 격파하고 덤으로 후속하던 2개 보병중대까지 고폭탄으로 교전해 패퇴시킨 공적을 세웠다.[4] 루더는 1944년 9월 3일에도 또다시 제 15스코틀랜드 사단 소속 장갑차량 6대를 격파하고 후속하던 영국 제 6근위여단 장갑차량 4대를 격파해 영국군의 공격 의지를 꺾어 영국군을 공세에서 수세로 전환하게 만들었으며 이런 전공으로 인해 1944년 10월 21일 기사철십자장을 수상했다. 노르망디 지방에서 루더의 전법은 전형적인 야크트판터의 전술로 영국 측은 계속 위치를 변경하며 사격하는 루더의 야크트판터 전투단을 과대평가해 소극적으로 대처했다.
야크트판터 8대가 IS-2 15대를 격파했다.
1945년 3월 라인란트에서 야크트판터 1대가 M36 잭슨 2대를 격파하고 서진하여 미군 1개 소대를 위치에서 쫓아버리고 M18 구축전차 6대를 격파한 후 후퇴했다.
훌륭한 성능에 맞게 뛰어난 전과를 거두었지만, 야크트판터가 개발된 시점인 1943년 말의 독일군은 전세로 보나 총동원 역량으로 보나 슬슬 한계에 다다르고 있는 상황이었으며, 최중요 전략자산인 티거를 지원하기에도 힘에 부치던 당시 독일군의 상황에서 야크트판터는 전투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군수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궤도와 전륜이 파손된 야크트판터 한 대가 견인을 요청했는데 구난 차량이 도착한 게 13일 후였던 경우도 있었을 정도다. 이래서는 조금만 파손되어도 배겨날 도리가 없었고, 사소한 고장만 나도 전차를 포기하는 경우가 속출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대전 말기의 독일군의 붕괴는 야크트판터의 손실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기갑사단이 후퇴할 때 지휘관들이 야크트판터를 맨 뒤에 배치시켜 적의 추격을 막고 아군의 후퇴를 엄호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독일군은 야크트판터를 한 달에 150대씩 생산하려고 했으나 연합군의 공습 때문에 실제 생산량은 총 400여 대 정도에 머물렀고, 이 정도 생산량으로는 연합군의 압도적인 물량을 당해낼 수 없었다. 사실 이런 문제점들은 야크트판터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전쟁 말기 독일군의 모든 주요 차량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더 슬픈 건, 야크트판터는 판터와 같이 폭격으로 운송 사정이 엉망이 되어버려 다른 전차보다 엔진이나 바퀴 미장착 또는 궤도, 주포 미장착으로 미완성된 차체가 150대가 넘는다는 사실이다. 엔진만 장착하면 바로 실전 투입이 가능했을 차량이 엔진이 없어 미완성으로 남은 상태로 종전을 맞아 노획되거나 스크랩된 경우도 있다.
참고로 4호 전차, 3호 전차 등과 달리 헤처나 야크트판터 등은 독일이 찍은 사진이 별로 없는데, 이것은 생산량이 적기도 하거니와 이것들이 만들어진 때가 독일이 한창 패퇴하고 있을 때라 선전용으로는 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2차대전 중 찍힌 대다수의 야크트판터는 연합군이 격파 인증샷으로 불타는 것을 찍은 것이 많다.
독일군은 야크트판터를 한 달에 150대씩 생산하려고 했으나 연합군의 공습 때문에 실제 생산량은 총 400여 대 정도에 머물렀고, 이 정도 생산량으로는 연합군의 압도적인 물량을 당해낼 수 없었다. 사실 이런 문제점들은 야크트판터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전쟁 말기 독일군의 모든 주요 차량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더 슬픈 건, 야크트판터는 판터와 같이 폭격으로 운송 사정이 엉망이 되어버려 다른 전차보다 엔진이나 바퀴 미장착 또는 궤도, 주포 미장착으로 미완성된 차체가 150대가 넘는다는 사실이다. 엔진만 장착하면 바로 실전 투입이 가능했을 차량이 엔진이 없어 미완성으로 남은 상태로 종전을 맞아 노획되거나 스크랩된 경우도 있다.
참고로 4호 전차, 3호 전차 등과 달리 헤처나 야크트판터 등은 독일이 찍은 사진이 별로 없는데, 이것은 생산량이 적기도 하거니와 이것들이 만들어진 때가 독일이 한창 패퇴하고 있을 때라 선전용으로는 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2차대전 중 찍힌 대다수의 야크트판터는 연합군이 격파 인증샷으로 불타는 것을 찍은 것이 많다.
문스터 전차 박물관 소장 야크트판터 |
원조 사용국.
툰 전차박물관 소장 야크트판터 |
스위스에 도착한 프랑스의 야크트판터, 1945년 말 |
테스트 용도로 프랑스에서 1대를 구매해 운용후 박물관에 전시했다.
보빙턴 전차 박물관 소장 야크트판터 411호차[5] |
영국의 REME가 접수한 독일의 공장에서 야크트판터 6대를 생산해 테스트 용도로 사용했다. 사진의 411호차도 그 당시 생산된 차량이다.
소뮤아 기갑 박물관 소장 프랑스 육군 소속 야크트판터 |
2차 세계대전 말기에 노획한 차량들을 잠깐 사용해본 것으로 추정된다.1944년 12월에 찍힌 주행 영상
자세한 내용은 야크트판터/미디어 문서 참고하십시오.
일본의 프라모델 회사인 타미야에서 이 차량을 '롬멜전차'라는 이름으로 발매하면서[6] 일본 전역에 이 별명이 쫙 퍼졌다. 그리고 그것이 대한민국제 카피판에도 그대로 건너와, 실제로 이 차량 이름이 롬멜 전차인 줄로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타미야의 롬멜 전차 키트 |
아카데미과학에서 발매한 롬멜 습격포 전차 |
'습격포'란 번역체 단어와 '롬멜'이란 선동적 이름(?)에서 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괴한 작명 센스가 매력. 올드비 모델러들에겐 추억의 물건이다. 미쓰와 모형의 카세트 탱크 시리즈의 카피판.[7]
합동과학제 모델 |
사실 습격포전차란 표현을 대한민국에 퍼뜨린 것은 합동과학이 최초.[8] 습격포전차란 단어 자체는 당시 일본에서 구축전차의 의미로 사용했던 듯 하다. 그냥 거창하게 생각할 거 없이 습격포=돌격포 아닌가? 그건 그렇고, 롬멜이 T-34가 있는 하얀 눈밭에서 싸웠던가?(…)
더 웃긴 건 정작 롬멜은 프랑스 침공 - 북아프리카 전역- 노르망디 상륙작전 테크를 탔기 때문에 단 한 번도 동부전선에는 파견된 적이 없다. 그러니까 롬멜은 야크트판터를 타지도,하얀 눈밭에서 싸우지도,이걸 타고 누굴 습격하지도(...) 않았다는 것.
더 웃긴 건 정작 롬멜은 프랑스 침공 - 북아프리카 전역- 노르망디 상륙작전 테크를 탔기 때문에 단 한 번도 동부전선에는 파견된 적이 없다. 그러니까 롬멜은 야크트판터를 타지도,하얀 눈밭에서 싸우지도,이걸 타고 누굴 습격하지도(...) 않았다는 것.
군제산업제 야크트판터 프라모델 |
1989년 군제산업에서 발매한 하이테크 모델 시리즈. 당시엔 정밀도와 조립 난이도, 가격 모두가 매우 높은 것으로 주목을 크게 모았다. 이 제품의 금형은 훗날 드래곤이 인수했다. 다만 이 키트는 메탈부품이 중심이고 금형으로 사출한 건 차체 정도뿐이라, 메탈부품 부분을 따로 만들어 추가한 드래곤의 키트는 묘한 언밸런스가 되었다는 평을 받았다.
아카데미과학에서 2022년 9월에 1/35 야크트판터가 출시되었다.
아카데미과학에서 2022년 9월에 1/35 야크트판터가 출시되었다.
[1] 정확히 하자면 주포가 아닌 당시의 탄 기준이다. SU-100의 D-10은 냉전기 탄을 물리면 88/71 APCR의 두배에 가까운 관통력도 낼 수 있고 T-55의 것으로 보자면 4배도 가능하다. 하지만 2차대전 사용된 철갑탄은 8871 apcr에 비해 관통력이 낮았다.[2] 이 최종구동장치 개량은 판터 G형에도 함께 적용됐다. 이 최종구동장치 개량이 판터에는 적용되는 이유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의 포스팅을 참조할 것.[3] 쿠르스크 전투에서 페르디난트를 운용한 것으로 유명한 부대. 1944년 2월 경부터 야크트판터로 차종을 변경하여 야크트판터를 장비한 최초의 부대가 되었다. 노르망디 전투 당시에는 기갑교도사단에 배속되었다. 다른 중구축전차 대대들은 대부분 야크트판터 1개 중대와 4호 구축전차 2개 중대로 편성되었기 때문에 야크트판터만을 장비한 유일한 부대이기도 했다. [4] 독일군은 교전에서 대대본부 지휘 판터 1량과 야크트판터 2량이 손상되었으나 기계적 문제로 인해 유기했다.[5] 기동계 및 주포가 보존되어 기동 및 실사격이 가능한 단차다.[6] 초창기의 타미야는 제품에 별명을 제멋대로 붙여서 내놓는 경우가 많았다.[7] 정작 원판에는 제대로 야크트판터라고 씌어 있다.[8] 반다이의 1/24 키트 카피판인데, 반다이 역시 롬멜이란 이름은 안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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