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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공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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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여요전쟁 공신
하공진
河拱辰
8268D75B-42AB-4E...상상화
출생
미상
사망
1012년 1월[1]
(음력 1011년 12월)

1. 개요2. 생애
2.1. 전반부2.2. 제2차 여요전쟁에서 구국의 대활약2.3. 비장한 최후
3. 평가4. 기타5. 대중매체

1. 개요[편집]

고려 전기의 무신, 관료, 여요전쟁 당시의 공신이다. 진주 하씨 시랑공파(侍郞公派)의 시조이다.

2. 생애[편집]


2.1. 전반부[편집]

994년(성종 13) 압강도구당사(鴨江渡勾當使)가 되었다.

목종 때 중랑장(中郎將)으로서, 목종이 병들어 자리에 눕자 친종장군(親從將軍) 유방, 중랑장 탁사정(卓思政) 등과 함께 목종이 거처하는 궁궐 주변을 숙위하며 상서좌사낭중(尙書左司郎中)이 되었다. 강조의 정변 때는 강조 편에 섰다.

1010년(현종 1) 일찍이 동서계(東西界)에 있을 때 임의로 군대를 동원하여 동여진(東女眞)의 촌락을 치다가 패배한 일이 드러난 것도 모자라 그 일로 여진에게 분노하던 동료 유종이 현종의 치세 때 화주방어낭중으로 있던 중 고려에 입조하려 가다가 화주에 방문한 여진족을 죽인 사건이 발생하여 유종과 더불어 유배당했다. 단, 하공진의 패전이 현종 재위기에 벌어진 일인지 과거에 벌어진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2.2. 제2차 여요전쟁에서 구국의 대활약[편집]

같은 해 요나라성종이 목종을 시해한 강조의 죄를 묻겠다는 명분으로 제2차 여요전쟁을 일으키자 유배에서 풀려났다.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郎) 고영기(高英起)와 함께 군사 20여 명을 거느린채, 남쪽으로 파천하여 피난하고 있었던 현종을 뒤따라가 양주에서 요군의 철수교섭을 자청, 국왕의 사절로 요성종을 만나 '현종은 이미 남쪽 수천 리[3] 밖으로 피했으니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오' 라고 요성종을 속여 현종 일행의 추적을 단념케함으로써 거란 군대를 철수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4] 이 때가 여요전쟁에서 아주 중요한 시기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는데, 하공진이 거란군 선봉과 마주쳐 담판했을 때 거란군과 현종 일행의 거리는 불과 10여 리(약 4km...)였기 때문에, 하공진이 요성종을 속여 철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면 계속 추격을 진행한 거란의 기병이 현종 일행을 포착하여 국왕이 적군에게 생포되어 외국에 끌려가거나 심지어 끔살당하기까지 하는, 후세의 병자호란보다 더한 최악의 참사가 펼쳐질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2.3. 비장한 최후[편집]

이후 고영기와 함께 요나라에 볼모로 끌려가서 요성종에게 신임을 받았지만 고려로의 탈출을 꾀하다가 실패하여 연경(燕京)[5]으로 옮겨졌으며, 양가(良家)의 딸을 아내로 맞아 살면서 철저한 감시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저자에서 준마(駿馬)를 많이 사 고려로 가는 길에 배치하여 귀국을 꾀했는데, 이윽고 탄로나 요성종의 국문을 받게 되었다. 요성종은 온갖 악형과 회유책으로 하공진에게 자신의 신하가 되라 권유하였으나 하공진은 이를 완강히 거절하였을 뿐만 아니라[6] 나중에는 심한 모욕적인 말로 응대하여 요성종을 크게 격분시켰고, 결국 처형당해 간마저 꺼내져 씹히기까지 하였다.[7]

1025년, 현종은 하공진과 강민첨의 공로를 높이 사 그들의 아들들에게 관직을 수여했다.#

후일 문종에 의해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郎)으로 추증되었다. 하공진의 자손들이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였다.
하공진유적비
진주성에 있는 하공진추모비

3. 평가[편집]

상술했듯 사실 하공진은 강조의 당여였으며 여러차례 사고도 쳐서 군신들의 의심까지 받았던[8] 어찌보면 제2의 이현운으로 타락할 위험이 있었던 영 좋지 않은 신하였지만 거란의 침공에서 남천한 현종을 무사히 피신시키는 구국영웅으로써의 대공을 세웠으며, 마침내는 조국을 잊지 않고 탈출하려다 장렬한 최후를 맞아 생애 막판 진정한 고려의 충신임을 입증했다.[9]

한번 고려로 도망치려 했다가 실패했는데도 강제 결혼으로 감시하는 데 그치고 두 번째에도 거란의 신하가 되라고 회유하려 한 것으로 보아 요성종이 신임할 정도로 능력이나 매력을 제법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4. 기타[편집]

  • 현종 이후 하공진의 업적을 기리는 의미로 1110년(예종 5)에 '하공진 놀이'라는 이름의 잡희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하공진의 현손인 하준(河濬)을 합문지후(閤門祗候)로 삼고 시를 지어 하사하였다.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으나 이전 신라에 있던 가무백희(歌舞百戱)를 계승한 것으로 보이며, 훗날 조선 후기 '산대도감계통극'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5. 대중매체[편집]

  • <박시백의 고려사>에서도 등장하는데 20여명의 군사를 데리고 현종에게 합류하는 것으로 첫 등장한다. 그러다 하공진이 ”거란이 본디 역적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들어왔는데 이미 강조를 잡아갔으니 사람을 보내 화친을 청하면 군사를 돌이킬 것이옵니다.“라며 거란과의 화친을 청하는데 이때 점을 쳐서 길한 괘가 나오지 하공진을 사신으로 보내 표문을 전달하게 한다. 그러다 이 작전이 먹히면서 거란은 군서를 돌렸지만 하공진은 포로로 잡혀간다. 그러다 하공진이 마음에 든 야율융서는 하공진에게 결혼 시켜주고 연경에 살게하라 명했는데 하공진이 고려로 돌아갈 궁리를 하고있단 소리를 들은 야율융서는 하공진을 불러 문초하는데 하공진은 ”사실이옵니다. 제가 본국인 고려를 배반할 마음이 없으니 그 죄가 죽어 마땅하오나 살아서 폐하를 섬기고 싶은 생각은 없사옵니다.“라고 말하면서 사실대로 말한다. 그러자 야율융서는 속으로 ”하! 충신! 싸나이다! 강조도 이러더니…“라고 독백한다. 그러면서 하공진에게 ”다시한번 생각해보거라. 최고의 대우를 해주겠다.“라며 그를 계속 회유하자 하공진은 태도를 180도로 바꾸면서 ”거참 예의를 갖춰 말하니까 못 알아듣네. 너를 모실 생각이 없다고 전~혀!“라고 말하자 빡친 야율융서가 ”죽여라!“라고 말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장기가 털리면서 처형되면서 등장종료.



[1] 율리우스력 1011년 12월 ~ 1012년 1월 사이[2] (족보)[3] 물론 한반도가 그렇게 크지 않아서, 개경(개성시)에서 남쪽으로 수천 리가 나올 수는 없다. 현재 개성에서 목포울산 정도까지가 딱 1천 리이다.[4] 인공위성으로 지리 정보를 상세히 파악할 수 있게 된 현대와는 달리, 옛날에는 타국의 지리 정보가 국가 기밀 사항으로 지정될 만큼 극비로 다루어졌기에 외국의 지리를 알기는 매우 어려웠다. 여요전쟁 종전 후에 송나라(북송)의 소동파고려 사신들이 멋대로 자국의 지도를 입수해가는 것을 비난한 것도,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에서 에도 막부일본 측 사신에게 오늘날의 부산광역시 동래구 일대까지의 방문만 허용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하공진이 야율융서를 상대로 대범한 낚시질을 할 수 있었던 것.[5] 요의 남경, 현 베이징.[6] “저는 우리나라를 감히 배반할 수 없습니다. 죄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하나 살아서 대국을 섬기기를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7] 요사에는 이런 내용이 나오지 않고, 고려사에 등장한다.[8] 하공진이 특별사면을 받았을 때, 고려는 이미 개경(개성)을 포기하고 현종이 남진한 상태였다. 때문에 하공진 일행은 수소문하여 현종을 호종하려 했는데, 도착하기도 전에 이 일이 몽진 행렬 사이에 소문이 났다. 하공진은 본문에서 설명된 것처럼 강조의 파벌이었던데다가 명령 없이 동여진을 침범한 일로 유배되었기에 호종 중이던 뭇 신하들은 그가 현종을 원망하여 참극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보았는지 현종을 놔두고 혼비백산하여 흩어져 버렸다. 이는 현종의 파천시 숱한 핍박과 고생들을 볼 때 결코 과도한 피해망상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하공진의 충직한 행적을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화.[9] 묘하게도 그가 추종했던, 목종을 폐살시키고 현종을 즉위시켜 집권하여 거란의 침공에서 포로로 붙잡혔으나 요성종의 회유를 준엄히 거절하고 고려의 충신으로써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상관 권신 강조의 행적을 쫓아간 셈이 되었다.[10]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여러 단역과 마의태자 역을, <무인시대>에서 최충헌의 외조카인 박진재를 맡았으며 <대왕세종>에서는 김종서를, <정도전>에서 윤소종을 맡았다.[11] 유충정은 술을 마시려는 이현운, 안패를 안심시켜려고 스스로 독이 든 술을 마셔 이현운, 안패 사망 후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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