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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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8세인 충렬왕 5년(1279) 염전시(簾前試)에 급제한다. 고려사 권부 열전에서는 충렬왕 5년에 급제한 뒤 그 다음해에 전시(殿試)에 합격했다고 한다. 첨사부녹사, 국학학유, 박사, 우정언 등을 지냈다가 첨의사인에 오른다. 충렬왕의 양위로 충선왕이 잠시 즉위(1298)하고 사림원(詞林院)을 두니 사림학사 비서감으로 임명되며 곧 우부승지 판예빈시사로 임명된다. 권부(당시 권영)는 박전지 등과 함께 충선왕의 총애를 받았기에 홍정(紅鞓, 붉은 띠)을 하사받기도 한다. 충렬왕 복위(1299) 후에는 좌부승지로서 우사의 조간, 총랑 김태현, 전사간 김호와 함께 정방에서 인사를 담당한다. 곧 밀직학사로 승진하며 판밀직사사, 지도첨의사사를 역임한다. 충렬왕 27년(1301)에는 지공거로서 좌부승지 조간과 함께 진사를 선발한다.
충선왕 원년(1309) 김이용과 함께 평리에 오른다. 충선왕 2년(1310) 찬성사 판총부사에 올라 정방에서 7품 이하 무신의 인사를 맡으며, 충선왕 5년 영가군(永嘉君) 작위를 받는다. 충숙왕 원년(1314) 정승으로 은퇴했던 민지와 함께 고려실록을 더 간략하게 편찬한다. 충숙왕 7년(1320) 마침내 첨의정승 판총부사에 임명되고 수문전대제학 영도첨의사사가 더해진다. 품계는 삼중대광, 관직은 대우문(大右文) 감춘추(監春秋), 작위는 영가부원군으로 올랐으며 추성익조동덕보리공신호를 받는다. 한편 정동행성의 원외낭중, 왕부단사관을 지내기도 하며 한번도 외직에 나가거나 탄핵되지 않는다.
충혜왕이 즉위했다 쫓겨나고 충숙왕이 복위한 뒤 8년(1339) 3월, 충숙왕이 죽으니 충혜왕이 다시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원에서 바얀이 충혜왕의 계승을 인정하지 않았으니, 고려에서는 노신들과 재추가 모여 회의한다. 6월에 권부 등이 정동행성에 가서 충혜왕의 복위를 상소했고, 이것이 원 중서성에 전달되기를 기다린다. 심왕의 농간으로 가짜 사절이 와서 복위를 인정하는 것처럼 꾸민 사건이 있기도 했지만 결국 11월 충혜왕이 복위에 성공한다.
권부는 늙은 뒤에도 독서를 계속했는데, 『은대집』 20권에 주석을 달 정도로 배움에 깊이가 있었다. 주자의 성리학에 주목해 그가 주석을 단 『사서집주』를 간행할 것을 건의했고, 아들 권준, 사위 이제현과 함께 『효행록(孝行錄)』을 짓는 등 초기 성리학자의 한 명으로서 성리학의 길을 닦는다. 고려사 권부 열전에서는 '동방의 성리학이 권부로부터 나왔다.'[2]라고 밝히고 있다.
충목왕 2년(1346) 10월 25일(음력) 병사한다.
충선왕 원년(1309) 김이용과 함께 평리에 오른다. 충선왕 2년(1310) 찬성사 판총부사에 올라 정방에서 7품 이하 무신의 인사를 맡으며, 충선왕 5년 영가군(永嘉君) 작위를 받는다. 충숙왕 원년(1314) 정승으로 은퇴했던 민지와 함께 고려실록을 더 간략하게 편찬한다. 충숙왕 7년(1320) 마침내 첨의정승 판총부사에 임명되고 수문전대제학 영도첨의사사가 더해진다. 품계는 삼중대광, 관직은 대우문(大右文) 감춘추(監春秋), 작위는 영가부원군으로 올랐으며 추성익조동덕보리공신호를 받는다. 한편 정동행성의 원외낭중, 왕부단사관을 지내기도 하며 한번도 외직에 나가거나 탄핵되지 않는다.
충혜왕이 즉위했다 쫓겨나고 충숙왕이 복위한 뒤 8년(1339) 3월, 충숙왕이 죽으니 충혜왕이 다시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원에서 바얀이 충혜왕의 계승을 인정하지 않았으니, 고려에서는 노신들과 재추가 모여 회의한다. 6월에 권부 등이 정동행성에 가서 충혜왕의 복위를 상소했고, 이것이 원 중서성에 전달되기를 기다린다. 심왕의 농간으로 가짜 사절이 와서 복위를 인정하는 것처럼 꾸민 사건이 있기도 했지만 결국 11월 충혜왕이 복위에 성공한다.
권부는 늙은 뒤에도 독서를 계속했는데, 『은대집』 20권에 주석을 달 정도로 배움에 깊이가 있었다. 주자의 성리학에 주목해 그가 주석을 단 『사서집주』를 간행할 것을 건의했고, 아들 권준, 사위 이제현과 함께 『효행록(孝行錄)』을 짓는 등 초기 성리학자의 한 명으로서 성리학의 길을 닦는다. 고려사 권부 열전에서는 '동방의 성리학이 권부로부터 나왔다.'[2]라고 밝히고 있다.
충목왕 2년(1346) 10월 25일(음력) 병사한다.
정방에서 13년을 임했고 재상으로 22년 있었으나 이에 스스로 만족하지 않았다. 대개 후하고 삼가는 것이 만석군과 같았고 공정하고 청렴함이 노회신[3]과 같았으니, 오복을 마주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4]「권부묘지명」.
『고려사』 권107, 권부 열전.
권부의 증조부는 추밀원부사를 지낸 권수평이고, 조부는 한림학사를 지낸 권위, 부친은 찬성사 판전리로 은퇴하고 문청공(文淸公)의 시호를 받은 권단이다. 외조부는 좌간의대부 노연이다.
[1] 권부 또는 권보로 알려져 있다. 이름의 溥는 넓을 부, 펼 보, 물 이름 박 등 3가지로 발음된다.[2] 東方性理之學, 自溥倡.[3] 당나라의 재상.[4] 任政房十有三年, 位宰相二十有二年, 而不以是自滿. 盖惇謹若萬石君, 公廉若盧懷愼, 嚮用五福, 不亦宜哉.[5] 爲人無圭角, 久典銓衡, 鬻爵營産, 時人以爲, “視其父㫜之淸, 懸遠也.” [6] 문화 류씨[7] 본명은 권재(權載)이다. 충선왕의 양자로 입양되어 왕씨(王氏) 성을 하사받았다. 권부의 사위 이제현과 함께 공민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8] 부친은 첨의중찬 류경(柳璥, 1211-1289)이다.[9] '한 집안에서 아홉 군(君)이 봉해졌다'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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