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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암(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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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여담4. 참고 문서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李嵒
1297~1364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고성. 초명은 이군해(李君侅), 자는 고운(古雲)과 익지(翼之), 호는 행촌(杏村)이다.

2. 생애[편집]

1297년에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원종~충렬왕 대에 활동한 문신 이존비(李尊庇)이고, 아버지는 철원군 이우(鐵原君 李瑀)이다.

어릴 때부터 다른 아이들과 다른 면이 있었고, 1313년 17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충숙왕의 신임을 받아 비성교감(秘省校勘)을 거쳐 도관정랑(都官正郞)에 이르는 등 승진가도를 달렸고, 충혜왕이 즉위하자 밀직대언(密直代言) 겸 감찰집의(兼監察執義)로 발탁되었지만 충혜왕은 폭정을 펼치다가 1332년 원나라에 의해 실각하고 만다. 충숙왕은 복위하자 이암을 충혜왕의 폐행(嬖幸)[1]이라 하여 곤장을 때린 뒤 바닷섬으로 유배를 보냈고, 그의 아버지 이우는 파면한 뒤 전리(田里)로 귀향시켰다.

1339년 충혜왕이 복위하자 이암은 지신사(知申事)로 복직했으며,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승진했고 정당문학(政堂文學)·첨의평리(僉議評理)로 전임되었다. 충혜왕이 무인 한용규(韓用規)를 전교부령(典校副令)에 임명하자 이암은 부당한 인사라고 반대의견을 표했지만 충혜왕은 듣지 않았다.

충목왕이 즉위하자 이암은 찬성사(贊成事)로 임명되어 제학(提學) 정사도(鄭思度)와 함께 정방(政房)의 제조(提調)가 되었으나, 환관 고용보가 임명 과정이 공정하지 않다고 태클을 거는 바람에 밀성(密城)[2]로 귀양을 갔지만 머지않아 사면받았다. 충목왕이 죽자 이암은 충정왕을 호종하여 원나라로 갔는데, 충정왕은 왕위를 물려받자 이암에게 명하여 국사를 듣고 처리하도록 하였다. 귀국한 충정왕은 이암을 정방제조(政房提調)로 임명하고 추성수의동덕찬화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功臣)의 호를 하사했으며 또 찬성사로 삼았다가 좌승상(左丞相)으로 임명하였다. 그런디 이때 강에서 전함을 검열하고 돌아오는데 30기가 넘는 무장한 기병이 뒤따르고, 앞에서 기병 둘이 인도하니 사람들은 분수에 넘치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공민왕이 즉위한 뒤 이암을 철원군(鐵原君)에 봉하자, 이암은 사직을 청하여 청평산(淸平山)[3]에 들어갔지만 국왕의 부름을 받고 복직하여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랐다. 중국에서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고 그 일부가 고려를 침입하자 이암은 서북면도원수(西北面都元帥)의 지위로 병사 2천 명을 거느리고 전방으로 갔다. 이때 박거사(朴居士)라는 사람이 비술로 적을 쳐부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며 사람들을 홀리자 이암은 그를 체포하여 수도로 보냈다. 이암은 기력이 쇠하여 군무를 볼 수 없다는 이유로 평장사(平章事) 이승경(李承慶)를 대리로 내세웠고, 홍건적이 개경까지 진군하자 공민왕을 호종하여 남쪽으로 피난갔다. 난이 진압되자 호종 1등공신이자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으로 봉해졌으며 추성수의동덕찬화익조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翊祚功臣)의 호를 하사받았다.

이암은 1364년 6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공민왕은 해당 관청에 명하여 예를 갖춰 장사지내게 하고 시호를 문정(文貞)이라고 하였다. 이암은 죽기 전에 손수 태갑편을 저술하여 왕에게 바치고, 아들 이강(李岡)에게 “너는 명심해라. 나는 이미 늙어 관직이 없으니 간언을 올릴 책임이 없긴 해도 마땅히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잡는 것을 의무로 삼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1374년 우왕이 즉위하자 이암은 충정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의 아들로는 이인(李寅), 이숭(李崇), 이음(李蔭), 이강이 있었는데, 이인은 1384년에 죽었고, 이음은 홍건적을 평정한 공을 세웠지만 전사하였으며, 이숭은 조선이 건국되고 얼마 뒤인 1394년에 죽었다. 이강은 이원의 아버지이다.

3. 여담[편집]

  • 글씨, 특히 예서와 초서에 능했다고 전해진다. 송설체를 잘 쓴다.[4]
  • 원나라에서 편찬한 농서인 농상집요를 수입하는 업적을 세웠다. 덕분에 국사 교과서에서도 이름이 올랐다.
  • 이유립이 지은 환단고기에서는 환단고기의 편찬자 5인 중 한 명이자 단군세기의 저자로 등장한다. 그러나 환단고기 자체가 위서로 결론났기 때문에, 이암이 단군세기를 지은 것도 사실이 아니다. 고성 이씨였던 이유립이 자기 선조들의 이름을 가져다 붙였을 가능성이 크다. 자세한 것은 환단고기/서지적 비판 참고.
  • 더불어민주당 소속 이훈기 의원의 22대조이다.

4. 참고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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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금에게 아첨하여 사랑과 총애를 받는 신하나 후궁.[2]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3] 현재 강원도 춘천시에 있는 오봉산이다.[4] 그래서인지 고려의 한석봉으로도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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