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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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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역사

고려 숙종의 왕자
원명국사 | 圓明國師
출생
사망
1141년(인종 19년) 6월 4일(음력 4월 21일) (향년 51세)
본관
징길(澄佶) → 징엄(澄儼)[1]
부모
부왕 숙종
모후 명의왕후
형제자매
법명
복세(福世)
소속
홍원사(洪圓寺), 개태사, 흥왕사
시호
원명국사(圓明國師)

1. 개요2. 생애


1. 개요[편집]

고려 제15대 국왕 숙종명의왕후의 3남이자 승려.

2. 생애[편집]

선종 7년인 1090년, 당시 국왕의 아우였던 계림공부인 유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8살이 되던 해인 숙종 2년 1097년흥왕사에 있는 숙부 의천에게 가서 의탁하였고, 불일사(佛日寺)에서 계를 받았다. 다음해인 숙종 3년인 1098년 명경전(明慶殿)[2] 앞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숙종 7년인 1120년에 중광사(重光寺)의 주지가 되었고, 숙종 10년인 1105년에 승통(僧統)[3]이 되어 복세(福世)라는 법호(法號)를 받았다.

홍원사(洪圓寺), 개태사(開泰寺) 등의 주지를 역임했으며, 인종 즉위년인 1122년 왕명에 의하여 오교도 승통(五敎都 僧統)이 되었으나, 이자겸(李資謙)의 횡포를 보고 귀신사(歸信寺)에 은퇴하였다.

1131년부터 왕명으로 흥왕사에서 10여 년 동안 머물면서 종풍을 크게 떨치다가 인종 19년인 1141년 4월 21일 나이 52세, 법랍 44년으로 입적하였다. 죽은 후 국사[4]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원명(圓明)이다.

제자로는 현오국사 종린[5]이 있다.
[1] 첫 이름인 징길(澄佶)의 ‘길()’자가 송나라 휘종의 휘와 같아서 이를 피하기 위해 징엄(澄儼)으로 바꾸었다.[2] 개성 연경궁에 있던 건물[3] 승려의 관직 및 지위의 하나로 고려시대에는 승통이 교종(敎宗)의 최고법계로 사용되었다. 승통이 되어야지 왕사(王師)나 국사(國師)가 될 자격이 부여된다.[4] 승려의 최고 법계로 지덕(智德)이 높아 나라의 스승이 될 만한 승려에게 조정(朝廷)에서 내리던 칭호로 왕의 자문 역할을 했다.[5] 동생인 대방공 왕보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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