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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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숙종의 왕자 원명국사 | 圓明國師 | |
출생 | |
사망 | |
본관 | |
휘 | 징길(澄佶) → 징엄(澄儼)[1] |
부모 | |
형제자매 | |
법명 | 복세(福世) |
소속 | |
시호 | 원명국사(圓明國師) |
선종 7년인 1090년, 당시 국왕의 아우였던 계림공과 부인 유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8살이 되던 해인 숙종 2년 1097년에 흥왕사에 있는 숙부 의천에게 가서 의탁하였고, 불일사(佛日寺)에서 계를 받았다. 다음해인 숙종 3년인 1098년 명경전(明慶殿)[2] 앞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숙종 7년인 1120년에 중광사(重光寺)의 주지가 되었고, 숙종 10년인 1105년에 승통(僧統)[3]이 되어 복세(福世)라는 법호(法號)를 받았다.
홍원사(洪圓寺), 개태사(開泰寺) 등의 주지를 역임했으며, 인종 즉위년인 1122년 왕명에 의하여 오교도 승통(五敎都 僧統)이 되었으나, 이자겸(李資謙)의 횡포를 보고 귀신사(歸信寺)에 은퇴하였다.
1131년부터 왕명으로 흥왕사에서 10여 년 동안 머물면서 종풍을 크게 떨치다가 인종 19년인 1141년 4월 21일 나이 52세, 법랍 44년으로 입적하였다. 죽은 후 국사[4]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원명(圓明)이다.
제자로는 현오국사 종린[5]이 있다.
이후 8살이 되던 해인 숙종 2년 1097년에 흥왕사에 있는 숙부 의천에게 가서 의탁하였고, 불일사(佛日寺)에서 계를 받았다. 다음해인 숙종 3년인 1098년 명경전(明慶殿)[2] 앞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숙종 7년인 1120년에 중광사(重光寺)의 주지가 되었고, 숙종 10년인 1105년에 승통(僧統)[3]이 되어 복세(福世)라는 법호(法號)를 받았다.
홍원사(洪圓寺), 개태사(開泰寺) 등의 주지를 역임했으며, 인종 즉위년인 1122년 왕명에 의하여 오교도 승통(五敎都 僧統)이 되었으나, 이자겸(李資謙)의 횡포를 보고 귀신사(歸信寺)에 은퇴하였다.
1131년부터 왕명으로 흥왕사에서 10여 년 동안 머물면서 종풍을 크게 떨치다가 인종 19년인 1141년 4월 21일 나이 52세, 법랍 44년으로 입적하였다. 죽은 후 국사[4]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원명(圓明)이다.
제자로는 현오국사 종린[5]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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