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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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과 후궁 원신궁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외조부는 이자연의 장남 이정이다. 부친 선종이 죽고 이복형 헌종이 11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문종의 아들 진한후 왕유, 정간왕의 아들 낙랑백 왕영과 더불어 수사도(守司徒)에 임명된다.
문벌귀족으로 권신이었던 외숙부 이자의는 병약한 헌종이 죽은 다음에 자기 조카인 한산후가 왕위를 잇기를 희망했다. 고려는 대체로 부자 아니면 형제간에 왕위를 상속했기 때문에 한산후가 왕위를 잇는 것이 일반적이었을 것이다.[2] 그러나 헌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선종의 동생인 종친 계림공의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이자의는 외부에서 왕위를 노리는 자들을 견제하고, 한산후에게 왕위가 넘어갈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해 받들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하지만 이자의가 우려하던대로 계림공은 헌종 원년인 1095년 7월 먼저 선수를 쳐 이자의 파벌을 반란 모의 혐의로 숙청해 버리고는 이듬해 병사한 조카의 뒤를 이어 숙종으로 즉위해 버린다.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한산후는 숙종 즉위년인 1095년 10월 모친인 원신궁주와 동생과 함께 경원군(慶源郡)[3]으로 유배 보내졌고, 그 뒤의 일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문벌귀족으로 권신이었던 외숙부 이자의는 병약한 헌종이 죽은 다음에 자기 조카인 한산후가 왕위를 잇기를 희망했다. 고려는 대체로 부자 아니면 형제간에 왕위를 상속했기 때문에 한산후가 왕위를 잇는 것이 일반적이었을 것이다.[2] 그러나 헌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선종의 동생인 종친 계림공의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이자의는 외부에서 왕위를 노리는 자들을 견제하고, 한산후에게 왕위가 넘어갈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해 받들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하지만 이자의가 우려하던대로 계림공은 헌종 원년인 1095년 7월 먼저 선수를 쳐 이자의 파벌을 반란 모의 혐의로 숙청해 버리고는 이듬해 병사한 조카의 뒤를 이어 숙종으로 즉위해 버린다.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한산후는 숙종 즉위년인 1095년 10월 모친인 원신궁주와 동생과 함께 경원군(慶源郡)[3]으로 유배 보내졌고, 그 뒤의 일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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