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건적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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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건적의 난의 전개[1] |
원나라 말기 민란은 백련교가 주도했다.
1351년 4월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백련교 교주들 중 한명이었던 유복통은 농민 출신이자 백련교도였던 한산동을 북송 휘종의 8세손이라 칭하며 송나라(한송, 명송, 홍송)의 재건을 선언하고 민란을 도모했으나 곧 발각되어 한산동이 처형당했다. 결국 1351년 5월 유복통은 백마(白馬)와 흑우(黑牛)를[3] 죽여 하늘에 고하고, 군사를 모아 홍건(紅巾)의 깃발을 들었으니 드디어 홍건적 민란의 서막이 오르게 되었다. 1351년 9월 홍건적의 병력수는 100,000명에 이르렀고, 1352년에는 원나라의 토벌군 300,000명을 격파했다. 1355년 유복통은 처형당한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를 '소명제'(小明帝)로 옹립하고, 국호를 대송(大宋), 연호를 '용봉'(龍鳳)이라고 했다.
《고려사》에 1358년 당시 홍건군의 땅이
홍건군은 크게 군세를 둘로 나눠 원나라의 수도 대도를 향해 진격했는데, 서계홍건군은 서수휘가, 동계홍건군은 유복통과 한림아가 이끌었다.
1357년 유복통의 동계홍건군은 북벌을 단행하여 원나라의 여름 수도인 상도(제나두)를 함락시키고 황궁을 불태웠으나 이후 내분과 함께 원나라군의 반격을 받자 1359년 12월 모거경이 군대 40,000명을 이끌고 고려를 쳐들어 왔으나 패배했다. 이후 2년이 지난 1361년 다시 대군 200,000명으로 고려를 쳐들어 왔으나 전멸에 가까운 대패를 당했고, 동계홍건군은 세력이 크게 꺾여 재기가 어렵게 되었다. 결국 1363년 2월 유복통이 전사했다. 붉은 두건을 두르고 전쟁터를 누비며 피비린내보다 진한 분향(粉香) 냄새를 뿜어 '향군'(香軍)이라고도 불리던 유복통의 동계홍건군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후 동계홍건군의 '대송국'은 1366년에 멸망했다. 그렇지만 아직 '소명제'(小明帝) 한림아가 살아있었다. 이 한림아를 구출한 사람이 바로 주원장이었다. 한편 서계홍건군은 내분으로 서수휘가 살해당하면서 1360년에 '천완국'이 멸망했다.
이들이 멸망하자 대부분 홍건적에서 독립한 세력들끼리 새로운 시대의 패권을 두고 싸웠는데 동계홍건군에서는 곽자흥 휘하에 있다가 그가 죽자 세력을 흡수한 주원장이 있었고, 서계홍건군에서는 서수휘를 죽이고 한(진한)을 건국한 진우량, 하(명하)를 세운 명옥진이 있었으며 그 밖에 홍건적에 속하지 않은 방국진, 장사성, 진우정 등이 군웅할거했다.
그러나 결국 '소명제'(小明帝) 한림아를 내세운 주원장이 최후의 승리를 하게 되었으며, 주원장의 꼭두각시가 된 한림아를 주원장이 끝내 익사 사고를 가장하여 죽여버렸기 때문에 그가 마침내 중원을 통일하고 명나라를 건국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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