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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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중추원 장관 고려의 중서문하성 장관 고려 현종의 장인 서눌 | 徐訥 | |
시호 | 간경공(簡敬公) → 원숙공(元肅公) |
삼사 | 태사(太師) |
직위 | 내사령(內司令) |
본관 | 이천 서씨(利川 徐氏) |
이름 | 눌(訥) |
아버지 | |
배우자 | 이천군대부인(利川郡大夫人) 최씨 이천군대군(利川郡大君) 정씨 |
딸 | |
생몰연도 | ? ~ 1042년 6월 |
성종 문의대왕 시대 국제적으로 이름을 떨친 명재상 서희의 아들이다. 최초의 기록은 상서성 소속인 이부[2]의 차관으로 등장한다. 이후 자신의 딸이 현종 원문대왕과 결혼해 원목왕후[3]가 되자 권력이 더욱 올라가 중추원의 장관 중추원사(中樞院使)가 되었다.
이후 중추원과 더불어 최고 정부기관인 중서문하성의 차관[4]이 되었다가 장관[5]까지 직위가 승진하니, 그야말로 이천 서씨의 권세가 가장 강했을 때였다.
향직 품계 또한 정점을 찍어 1품 2등위인 중대광(重大匡)에서 1품 1등위인 삼중대광(三重大匡)까지 올라갔다. 후에 병을 얻어 퇴직하고 절에서 요양했다. 이후 정종 용혜대왕은 내사령[6] 직을 내리고 궤장[7]을 하사하여 늙은 신하를 대우해 주었고, 1042년 4월, 내사령이 죽자 '천자의 스승'이란 칭호인 태사(太師)를 추증하고, 간경공(簡敬公) 시호를 주었다. 하지만 정종 문명왕의 추가 시호를 올릴 때 간경(簡敬) 시호가 선택되자 원숙(元肅)으로 시호가 바뀌었다.
이후 중추원과 더불어 최고 정부기관인 중서문하성의 차관[4]이 되었다가 장관[5]까지 직위가 승진하니, 그야말로 이천 서씨의 권세가 가장 강했을 때였다.
향직 품계 또한 정점을 찍어 1품 2등위인 중대광(重大匡)에서 1품 1등위인 삼중대광(三重大匡)까지 올라갔다. 후에 병을 얻어 퇴직하고 절에서 요양했다. 이후 정종 용혜대왕은 내사령[6] 직을 내리고 궤장[7]을 하사하여 늙은 신하를 대우해 주었고, 1042년 4월, 내사령이 죽자 '천자의 스승'이란 칭호인 태사(太師)를 추증하고, 간경공(簡敬公) 시호를 주었다. 하지만 정종 문명왕의 추가 시호를 올릴 때 간경(簡敬) 시호가 선택되자 원숙(元肅)으로 시호가 바뀌었다.
[1] 이천군대부인(利川郡大夫人) 최씨 소생. 현종의 제6비[2] 정부 인사를 담당한 부서[3] 원목왕후는 서눌의 첫번째 부인인 이천군대부인(利川郡大夫人) 최씨 소생이다. 두번째 부인은 이천군대군(利川郡大君) 정씨[4]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 중서문하성의 차관인 평장사엔 네 등급이 있다. 1위는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 2위는 중서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 3위는 문하시랑평장사, 4위는 중서시랑평장사이다.차관이라고 하나 오늘날의 위상으론 부총리급이다.[5] 문하시중(門下侍中)[6] 중서문하성 소속의 명목상 최고위직. 고위왕족이나 공신에게만 봉해주던 명예직이며 실질적인 최고위직은 문하시중이다.[7] 임금이 70살 넘는 노신을 위해 하사하는 지팡이와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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