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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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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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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의 제3왕후
신명순성왕후 | 神明順成王后

고려 정종,광종,문원대왕의 모후
신명순성왕태후 | 神明順成王太后
출생
900년대 초반 추정
사망
951년 이전 추정
능묘
미상
재위기간
고려 제3왕후
고려 왕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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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부친
배우자
자녀
5남 2녀 [ 펼치기 · 접기 ]
장남 - 왕태
차남 - 정종
3남 - 광종
4남 - 문원대왕
5남 - 증통국사(證通國師)
장녀 - 낙랑공주
차녀 - 흥방궁주
종교
시호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
1. 개요2. 두 군주의 어머니3. 대중매체

1. 개요[편집]

고려 태조의 제3비.

유(劉)씨, 본관충주. 후삼국시대충주 호족 유긍달(劉兢達)의 딸이며, 왕건의 호족 혼인동맹 정책에 의해 정략결혼했다. 만약 신명순성왕후가 900년생이라면 왕건과의 혼인 시기는 왕건의 태조 즉위 이후가 가장 유력하며, 물론 즉위 이전에 혼인했을 가능성도 있다.

'신명왕후(神明王后)'로도 알려져 있으며, 광종 때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로 추존되었다. 왕후로서의 시호는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시호의 '왕태후'에서 '왕후'로 바꿔 불렀을 가능성이 크다. 고려사에서는 간혹 '신명왕태후'로 기록된 경우[2]도 있다. 시호가 추가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에 대한 기록은 없고, 대부분의 역사서에서 신명순성왕태후라 기록되어 있기에 처음 받은 시호가 신명왕태후였는지는 확인할 사료가 부족하다. 이 때문인지 2000년 이후로는 '신명왕후'보다 '신명순성왕후'로 표기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고려사 세가 '정종(제3대)'편과 고려사 열전 '신명순성왕태후'편에 순성(順成)과 발음이 같은 순성(順聖)으로 표기된 기록도 있다.[3]

2. 두 군주의 어머니[편집]

슬하에 왕자 5명과 공주 2명을 두었는데 왕건의 29명의 부인 중 가장 많은 자식을 본 왕후이다. 왕건에게 가장 많은 총애를 받는 부인이었던 듯하며, 혜종(고려)의 외가인 나주의 오씨에 비해 가세가 훨씬 강했다. 충주 유씨 가문은 왕실 말고도 패서의 호족 가문과 혼인해 적극적으로 세력을 키워나갔다.

왕건의 2남이자, 유씨의 장남인 태자 왕태(919~944 이전 추정)는 별 기록이 없어 요절한 것으로 보인다. 혼인은 했으나[4] 후사는 없었다.

왕건의 3남이자, 유씨의 차남 왕요는 고려 제3대 왕 정종이며, 왕건의 4남이자 유씨의 3남 왕소는 고려 제4대 왕 광종으로 고려를 반석 위에 올린 왕이다.

태조 왕건의 오랜 정복 활동과 제2대왕 혜종의 재위 기간이 채 3년도 안된 탓에, 국가를 정비할 역할이 그녀의 소생들에게 넘어갔고, 실제로 정종은 요절해 뜻을 다 이루지 못했지만 광종은 초기 고려의 체제를 확립한 명군으로 평가받는다. 과거제노비안검법 등 심지어 조선 시대까지 이어 실행될 정책을 한반도에 정착시켰다.

왕건의 5남이자 유씨의 4남 왕정은 경종의 장인이 되어 사후 문원대왕으로 추존되었다. 태조 왕건의 제6비 정덕왕후의 장녀 문혜왕후와 혼인했다. 고려 전기의 황실은 '용왕의 현손'을 강조하며 순혈주의적인 혼인 관습을 가지고 있었다.

유씨의 막내는 출가해 증통국사(證通國師)로 불렸다. 왕건의 6남이 되나 기록이 실전(失傳)돼 생몰년과 휘 조차 전하지 않는다. 국사의 지위에 오르는 것으로 이름에서 알 수 있다.

장녀 낙랑공주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에게 시집갔다. 낙랑공주가 경순왕에게 시집갔던 시기가 935~936년으로 낙랑공주가 왕요나 왕소보다 손위로 보인다. 다만 요절한 장남 왕태보다 나이가 많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차녀 흥방궁주는 태조 왕건의 제6비 정덕왕후 류씨의 삼남이자 이복오빠인 원장태자(元莊太子)와 혼인했다.

3. 대중매체[편집]

  • 2000년 KBS1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배우 전미선이 연기했다. 충주 호족들의 대표격으로 나온 유긍달의 딸로 극 중 이름은 '수인'이다. 왕건이 조령과 죽령에서 후백제군과 전쟁을 치를 때 유긍달의 도움을 받으며 인연을 맺었고, 난세에 가문과 세력을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유긍달이 혼담을 넣어 결국 왕건의 셋째 부인이 되었다. 유긍달은 이를 위해 철원궁예와 왕건의 첫째 장인인 유천궁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지원을 구하기도 했다. 극 중에서는 왕건의 여러 부인들 중 가장 많은 자식을 두었다는 점을 통해 왕건의 총애를 많이 받은 것 같다는 설명을 하기도 했고 이 때문인지 왕건과 혼인할 때 왕건이 옛 정인인 강비를 염두에 두고 유수인이 그녀를 닮았다는 말을 하는데, 이는 이후 왕건의 부하들 사이에서도 종종 언급되었다. 혼인 뒤에는 철원으로 올라왔는데 유순한 캐릭터로 그려진 정주의 유씨 부인과 달리 나주의 오씨 부인과는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물론 처음에는 셋째 부인이라는 처지에서 함부로 하지 못했지만 궁에 들어가고 신혜왕후가 피접을 명분으로 하차한 이후에는 "서로 대등한 부인의 반열에 있고 모두 왕자를 생산했다"고 말하며 오씨 부인에게 눌릴 까닭이 없다는 자신감을 보이기도 한다.[5] 이에 자신이 낳은 아들 왕태와 오씨 부인의 아들 왕무를 놓고 장래의 왕위 계승권을 다퉈보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왕태가 요절하고 왕무가 정윤에 봉해지면서 오씨 부인이 왕후가 됨에 따라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제140화에서 왕태가 요절한 후 슬퍼하는 수인에게 측근인 상궁이 수인의 의심을 자극하는 장면이 나오며 이를 믿은 수인이 왕건에게 왕무가 정윤으로 책봉된 소식에 더해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 후 오씨 부인이 오해를 풀려고 먼저 사과하면서 관계가 봉합되는데, 둘이 화해하는 장면이 그려진 뒤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지극히 우애가 좋은 장면만 보여졌다.[6] 정쟁에서 물러난 후 새로 태어난 자식들을 몸소 돌보면서 "욕심을 버리니 이렇게 편하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에서 '그녀에게서 태어난 두 아들이 훗날 혜종의 뒤를 이어 고려 정종, 고려 광종으로 즉위하여 연속으로 왕위를 잇게 된다'는 내용의 나레이션을 내보내는데 《제국의 아침》과 비교해 본다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 2002년 KBS1 드라마 《제국의 아침》에서는 배우 정영숙[7]이 연기했다. 서열상 왕후이자 혜종 즉위 이후 태후가 되는 장화왕후에게 대놓고 맞서지는 않지만 전국 각지의 많은 호족들과 사돈 관계를 맺어 인맥을 구축하고 이를 동원해 세를 과시하며 나름대로 아들들의 차기 대권을 지원하는 모습이 그려지기도 한다. 딸인 낙랑공주가 경순왕의 후비가 되었기에 극 중에서는 경순왕(정승공)에게 '장모님'이라 불렸다. 정종이 즉위한 뒤에는 태후가 되었지만 조금씩 건강이 악화되며, 정종과 광종 형제의 갈등, 집정 왕식렴의 서경 천도에 대한 불만 등으로 아들을 꾸중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사망 전 병석에서도 정종에게 동생 광종을 잘 대해주라고 당부했다.
  • 2016년 SBS 드라마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에서는 배우 박지영이 연기했다. '충주원 황후'라는 칭호로 불리면서 정치적 야심이 큰 캐릭터로 그려졌는데 주인공 왕소의 인생을 불우하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자신의 첫째 아들 태가 요절했는데도 인명은 제천이라는 이유로 슬퍼하는 기색없이 또다른 정략결혼을 추진하는 왕건을 막아서려 아들인 어린 왕소에게 칼을 들이대며 왕건을 협박을 하다 왕소의 얼굴에 큰 상처를 내버린다. 본인의 명백한 잘못인데도 불구하고 이를 씻을 수 없는 자기 인생의 오점으로 여겨 왕소를 정신조차 온전치 못했던 신주원부인 강씨에게 마치 짐짝 치우듯이 볼모로 넘겨버렸고, 이 때문에 왕소는 신주에서도 험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둘째 아들이자 왕소의 형인 왕요를 극진히 챙기며 그가 왕건의 뒤를 잇게 만들려고 끊임없이 왕무의 목숨을 위협하고 왕소조차도 눈엣가시처럼 취급하다가 왕소가 주관을 맡은 기우제가 성공하면서 왕소의 입지가 커지자 이를 탐탁치 않아한다. 가족 식사에 왕소를 데리고 오며 처음으로 모성을 보여주려나 싶었지만 알고 보니 왕무 제거 계획에 동참시키고자 회유하려는 자리였다. 결국 왕요가 왕무를 제거하고 고려의 3번째 군주가 되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피를 보았던 왕요도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오래 살지 못한다. 죽어가는 왕요를 붙들고 막내 아들인 왕정에게 왕위를 넘긴다는 내용의 유언장을 쓰라 닦달하는 모습에 왕요는 크게 실망한 나머지 어머니를 비난하며 어머니의 뜻에 따르지 않은 채 숨을 거뒀고 그로 인해 왕소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 왕소의 재위 중 병으로 죽게 되는데 왕소는 죽어가는 어머니에게 "자신을 후대 사람들이 어머니에게서 극진한 사랑을 받은 아들이었던 것처럼 생각하도록 만들겠다"고 말한다.
[1] 광종은 즉위 2년(951)에 모후의 원당(願堂)으로 불일사(佛日寺)를 세웠고, 954년에는 숭선사(崇善寺)를 세워 명복을 빌었다.[2] 고려사 열전 '종실'편[3] 고려사는 조선시대에 쓰여졌으며 사료가 부족해 인명의 오류와 누락이 상당히 많다.[4] 왕건의 제12비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의 딸과 혼인했다.[5] 거기에 아버지 유긍달이 "비록 가장 서열은 낮지만 기회가 없는 건 아니다"며 권력욕을 그녀에게 계속 부추기기도 했다.[6] 소설판에서는 도영이 무를 위한 기도로 인해 자신의 아들인 태가 죽었다는 생각 때문에 화해하지 못하고 계속 갈등하게 된다.[7] 1989년 KBS 드라마 《무풍지대》에서는 이기붕의 부인 박마리아 역, 2002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김두한의 친할머니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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