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창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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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원종이 즉위한 1260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경창궁주는 원종이 원나라에 입조하고 돌아오는데도 기뻐하지 않았고, 권신의 외손[1]을 태자로 삼을 수는 없다며 태자로 책봉된 충렬왕을 참소하였다.[2] 원종은 경창궁주의 참언이 옳다고 여겼으나 김준의 간언으로 경창궁주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에도 경창궁주는 아들을 왕으로 만들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는지, 1277년 경창궁주가 아들 순안공 왕정과 함께 맹인 승려 종동으로 하여금 충렬왕을 저주하게 하였다는 고변이 들어왔다. 종동은 죄를 자복하지 않았으나, 두 달 뒤에 경창궁주는 폐서인되었고 왕정과 종동은 섬으로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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