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화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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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로 흥화군(興化君), 흥화낭군(興化郎君)이라고도 불리는 흥화궁군(興化宮君)이 있었는데, 본명이 아니라 "흥화궁(興化宮)을 하사받은 군(君)" 이라는 뜻이다. 이름은 전해지지 않으며, 유교적 관점에서 보면 적장자인 흥화궁군이 혜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것이 순리였지만 당시 혜종의 세력이 약했던데다 고려는 유교적 풍속이 그리 중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왕위에서 탈락하고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 역사 속에서 잊혀지고 말았다. 흥화궁군은 이후 정종의 아들인 경춘원군, 즉 사촌과 함께 광종 연간에 벌어진 대숙청에 휘말려 목숨을 잃는 비운을 맞게 된다.
장녀 경화궁부인(慶華宮夫人)은 고려사 왕규 열전에선 장공주(長公主)라는 작위로 등장하며, 작은 아버지가 되는 광종에게 시집을 갔다. 혜종으로서는 광종의 세력이 자신을 위협할 정도로 커지게 되자 딸을 시집보내 결혼 동맹을 시도한 셈. 다만 대목왕후와는 달리 정식 왕후가 되진 못했는데, 아마 혜종의 이른 붕어에 따른 세력 위축과 광종 연간에 남매인 흥화군이 처형된 것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차녀 정헌공주(貞憲公主)는 작호외에 다른 것은 사료에 전해지지 않고 있다.
장녀 경화궁부인(慶華宮夫人)은 고려사 왕규 열전에선 장공주(長公主)라는 작위로 등장하며, 작은 아버지가 되는 광종에게 시집을 갔다. 혜종으로서는 광종의 세력이 자신을 위협할 정도로 커지게 되자 딸을 시집보내 결혼 동맹을 시도한 셈. 다만 대목왕후와는 달리 정식 왕후가 되진 못했는데, 아마 혜종의 이른 붕어에 따른 세력 위축과 광종 연간에 남매인 흥화군이 처형된 것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차녀 정헌공주(貞憲公主)는 작호외에 다른 것은 사료에 전해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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