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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화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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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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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혜종의 왕후
의화왕후 | 義和王后
혜종왕릉
순릉 전경
출생
910년대 추정
사망
연대 미상
능묘
순릉(順陵)
재위기간
고려 정윤비
고려 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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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진천 임씨(鎭川 林氏)[1]
부친
배우자
자녀
1남 2녀 [ 펼치기 · 접기 ]
장남 - 흥화궁군(興化宮君)
장녀 - 경화궁부인
차녀 - 정헌공주(貞憲公主)
종교
작호
정윤비(正胤妃)
시호
정순회선경신성의의화왕후
(靖順懷宣景信成懿義和王后)
1. 개요2. 가족관계3. 대중매체

1. 개요[편집]

고려 혜종왕후. 혜종의 시호인 의공대왕(義恭大王)과 義 자가 같다.

충청도 진천군 출신 호족인 아버지 임희병부령,[2] 즉 고려의 첫 국방부장관을 지냈으며 왕후의 친척들도 군부에 속해 있었다.

시아버지인 태조는 921년 혜종이 정윤으로 임명됐을 때[3] 의화왕후를 같이 정윤비로 봉했다. 태조가 병부령의 딸을 혜종과 결혼시킨 건 권력이 약한 혜종이 군부와 결혼으로 연합하기 바랐기 때문인 듯 하다.

2. 가족관계[편집]

아들로 흥화군(興化君), 흥화낭군(興化郎君)이라고도 불리는 흥화궁군(興化宮君)이 있었는데, 본명이 아니라 "흥화궁(興化宮)을 하사받은 군(君)" 이라는 뜻이다. 이름은 전해지지 않으며, 유교적 관점에서 보면 적장자인 흥화궁군이 혜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것이 순리였지만 당시 혜종의 세력이 약했던데다 고려는 유교적 풍속이 그리 중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왕위에서 탈락하고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 역사 속에서 잊혀지고 말았다. 흥화궁군은 이후 정종의 아들인 경춘원군, 즉 사촌과 함께 광종 연간에 벌어진 대숙청에 휘말려 목숨을 잃는 비운을 맞게 된다.

장녀 경화궁부인(慶華宮夫人)은 고려사 왕규 열전에선 장공주(長公主)라는 작위로 등장하며, 작은 아버지가 되는 광종에게 시집을 갔다. 혜종으로서는 광종의 세력이 자신을 위협할 정도로 커지게 되자 딸을 시집보내 결혼 동맹을 시도한 셈. 다만 대목왕후와는 달리 정식 왕후가 되진 못했는데, 아마 혜종의 이른 붕어에 따른 세력 위축과 광종 연간에 남매인 흥화군이 처형된 것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차녀 정헌공주(貞憲公主)는 작호외에 다른 것은 사료에 전해지지 않고 있다.

3. 대중매체[편집]

[1] 현재 상산 임씨(常山 林氏)[2] 태조가 즉위 후 대대적인 인사개혁을 단행할 때 임명됐다.[3] 이때 혜종의 나이가 10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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