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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화궁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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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역사


고려 광종의 후궁
경화궁부인 | 慶和宮夫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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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혜종의 왕녀
왕녀 임씨 | 王女 林氏
생몰년
미상
본관
부계 - 개성 왕씨
모계 - 진천 임씨(鎭川 林氏)[1]
부모
부왕 - 혜종
모후 - 의화왕후
형제자매
배우자
거처
경화궁(慶和宮)
봉호
경화궁부인(慶和宮夫人)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
3.1. 드라마3.2. e-소설
4. 링크

1. 개요[편집]

고려의 제2대 혜종의 적장녀이자 제4대 왕 광종후궁. 어머니 의화왕후의 성씨를 따라 임씨를 칭했다.

광종과는 근친혼으로 숙질간이며, 광종의 왕비 대목왕후 황보씨는 이복 고모이다. 성씨는 원래 개성 왕씨였으나, 어머니 의화왕후를 따라 진천 임씨가 되었다. 남매 흥화궁군(興和宮君), 여동생 정헌공주(貞憲公主)가 있다.

2. 생애[편집]

태조 왕건의 장손녀로, 《고려사》반역 열전 왕규 편에서는 장공주(長公主)라는 호칭으로 등장한다.

945년(혜종 2년) 사천공봉 최지몽이 혜종에게 "유성이 자미원(紫微垣)[2]을 침범하였으니 나라에 반드시 역적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고변하자 혜종은 왕규가 왕요, 왕소 형제를 해하려는 것으로 판단하고, 왕요와 왕소 형제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이미 혼인하여 가정을 꾸린 이복동생 왕소에게 자신의 맏딸을 황자의 측실으로서 시집보냈다. 의 적장녀이자 일국의 공주가 황자의 한낱 측실이 된 것이다.

그러나 왕규가 모반을 일으켜 왕요와 왕소 형제를 죽이려 했다는 왕규의 난 기록은 왕요 측의 왜곡으로 강하게 의심받고 있는 만큼, 경화궁부인이 이복 숙부 왕소의 측실이 된 것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다. 경화궁부인을 왕소에게 보낸 것은 앞서 서술한 것처럼 혜종이 왕요와 왕소 형제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사실은 이미 힘이 커질대로 커진 왕요와 왕소 형제와 유대관계를 돈독히 하여 혜종 자신의 신변 안전을 도모하고, 나아가 정치적 생명을 연장하고자 한 정략결혼이었다는 것이다. 즉 혜종이 왕요와 왕소에게 자신의 힘을 준 것이 아니라, 거꾸로 혜종이 왕요와 왕소에게 힘을 받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경화궁부인은 왕의 적장녀이자 태조 왕건의 장손녀라는 막강한 혈통에도 불구하고 부왕의 빈약했던 입지 탓에 왕후가 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3]. 광종과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다.

경종 연간 태조의 아들 진주낭군(鎭州郞君)과 천안낭군(天安郞君)이 왕선(王詵)에게 복수법을 명분으로 살해당한 점을 들어 학계에서는 진주낭군과 천안낭군이 광종의 호족 대숙청에 적극적으로 협조했으리라 추정되는데, 진주낭군의 외조부 명필(名必)[4]은 진천 임씨(鎭川林氏) 임명필(林明弼)과 동일시되기에 경화궁부인의 어머니 의화왕후와 같은 가문이며 천안낭군의 외조부 임언(林彦)[5]은 경주 혹은 천안 출신이지만 진천 임씨와 성이 같다는 점과 천안과 진천이 바로 옆 동네라는 점, 진주낭군과 천안낭군이 동시에 살해당했다는 점에서 두 임씨는 가계를 공유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 때문에 숙부이자 외척인 진주낭군, 천안낭군을 끌어들여 광종의 대숙청에 협조했으리라 추정된다. 호족들의 입장을 대변한 대목왕후와는 반대인 셈. 태조의 장손녀로 태어났음에도 호족들에 의해 몰락한 경화궁부인의 입장에서 광종의 대숙청에 적극 협조한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3. 대중매체[편집]

3.1. 드라마[편집]

제국의아침 경화궁부인
2002년에 방영된 KBS 대하드라마제국의 아침》에 등장하였다. 연기한 배우는 장수혜, 김민경. 혼인 전에는 경화공주라는 호칭으로 등장하는데, 경화궁부인의 혼인 전 공주 호칭에 대해서는 왕의 장녀인 장공주라는 것 말고는 남은 기록이 없어 작가가 임의로 지은 것이다[6]. 혼인 후에는 역사대로 경화궁부인의 호칭으로 등장.

경화궁부인과 흥화군은 생몰년이 기록되지 않아 누가 연상인지 알 수 없으나 작중에서는 흥화군(서현석, 김규민 분)의 누나이며, 조용하고 의젓한 왕녀이자 하나뿐인 남동생 흥화군과 굉장히 돈독한 사이로 등장한다[7]. 황태후 오씨(반효정 분)의 결사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소와 혼인을 해야만 가족들 모두가 살 수 있다는 혜종(노영국 분)과 의화황후(김현주 분)의 결정에 따라 왕소(김상중 분)에게 시집가는 운명을 묵묵히 받아들인다. 하루는 충주부인(정영숙 분)이 "낭군을 모시는 도리는 아는가?"라고 묻자 자신이 알고 있는 부인의 도리를 대답하는데, 이를 두고 충주부인은 어린 것이 앵무새처럼 대답하는 모습이 처연하다며 동정 반 비웃음 반의 반응을 보인다. 이후 왕규(김무생 분)의 난에서는 문공부인(홍리나 분)과 대목부인(전혜진 분)에게 "어느 쪽이 역적이냐?"고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했다가 다시는 그런 말 입 밖에 내지 말라며 한 소리 듣는다.

이후 한동안 등장이 없다가 광종 즉위 후 궁에서 살게 되면서 다시 등장한다. 그러나 광종이 황족과 호족들을 대거 숙청할 때 억울하게 연루된 흥화군이 죽음의 위기에 내몰리자 흥화군을 살려달라며 무릎까지 꿇고 애원하지만 광종은 쿨하게 씹고 갈 길을 가 버린다. 결국 흥화군과 경춘원군[8](김민우, 성낙만 분) 등은 처형당하고, 이에 크게 낙심한 경화궁부인은 스스로 목을 매달아 생을 마감한다. 원래 이들 남매는 혜종 사후 외조부인 임희가 왕규의 당여로 처형당한 이후 모후인 의화황후까지 역적의 딸로 몰려 궁에서 쫓기듯이 출궁한 후 궁에서의 일들에 염증을 느끼고 궁을 나가 사촌인 경춘원군과만 가끔씩 교류하며 숨어살고 있었다. 그러나 황족들을 잘 보살피는 것 또한 황후의 중요한 책무 중 하나라는 신정황태후(안해숙 분)의 조언을 들은 대목황후가 이들을 겨우 찾아내 강권에 가까운 설득을 하여 궁으로 돌아온 것인데, 이것이 결국 이들 남매의 명줄만 재촉한 셈이 되어버렸다.

황제의 장녀임에도 나약한 국왕인 아버지의 잦은 병치레로 인해 마음고생만 하다가 원치 않는 사람에게 거의 팔려가듯 시집가고, 시집간 후에도 가족들 걱정만 하다가 결국은 역모죄로 처형당하는 남동생을 살리고자 고군분투하지만 끝내 아무 것도 이루지 못 한 채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비운의 여인이다.

3.2. e-소설[편집]

2019년 《경화궁의 꿈》이라는 e-소설이 발간되었다. 경신 작가의 작품으로 평범한 대학생인 온유라는 인물이 벼락을 맞고(...) 고려시대로 타임슬립하여 혜종의 장녀 "은설(銀雪)"이 되어 "소(昭)"와의 혼인을 앞두고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4. 링크[편집]

[1] 현재 상산 임씨(常山 林氏)[2] 동아시아에서 사용하는 별자리 체계의 일종. 군주를 뜻한다.[3] 원 간섭기 이전 종실 출신의 비 중 왕후가 못 된 경우는 경화궁부인과 대명궁부인뿐이다. 경창궁주(원종의 제2비)는 폐위되었으므로 제외.[4] 태조의 10비 숙목부인(肅穆夫人)의 아버지.[5] 태조 11비 천안부원부인(天安府院夫人) 임씨의 아버지.[6] 고려시대에서 경화공주라고 하면 십중팔구 충숙왕의 제3비 경화공주(숙공휘령공주)를 가리킨다.[7] 이들의 친누이인 정헌공주는 이름만 알려져 있고 기록이 아예 없어서 그런지 작중에서는 등장은 커녕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8] 정종의 장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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