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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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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자녀4. 대중매체

宋有仁(?~1179)

1. 개요[편집]

고려의 권신이었던 정중부사위이자 정균의 매부이다.[1] 성격이 교활했는데 무신정변 이전에는 문신들에게 아부하여 출세했고 무신정변 이후에는 정중부의 측근으로서 권세를 누렸다가 1179년 경대승의 정변으로 인해 정중부, 정균과 함께 처형된다.

2. 생애[편집]

송유인은 부친이 인종 때 나라를 지키다 순국하였다 하여 그 음덕으로 산원(散員) 벼슬을 받아 벼슬길에 나섰다. 얼마 후에 태자부지유(太子府指諭)로 위장군(衛將軍)이 되었는데 태자[2]가 그를 특히 총애해 많은 하사품을 주었다고 한다. 본래 송유인은 처자식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의 처는 송나라 장사꾼이었던 '서덕언'(徐德彦)의 현지처[3]신분은 미천했지만 재산이 엄청났기에 송유인은 백금 40근을 환관들에게 뇌물로 주어 종3품 벼슬을 얻었다.

의종 말기에 송유인은 대장군의 자리에 올랐는데 문관들과 친하게 지내어 무관들로부터 사실상 왕따를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송유인은 대장군 자리에까지 오르는데 크게 공헌했던 조강지처를 버리고[4] 정중부에게 빌붙어 사위로 삼게 해달라고 졸랐다. 정중부가 이를 받아들여 송유인을 사위로 삼았고 장인의 후원으로 승승장구하게 된다. 대장군까지 올랐으면서도 군사 운용 능력이나 무예는 굉장히 형편없는 자였는데 명종 초에 서북면 병마사로 부임한 그는 서북 지방 곳곳에서 여러 소요 사태가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효율적으로 제어하거나 진압하지 못하는 무능한 모습만 보였고 병을 핑계로 교대해줄 것을 요청하는 한심함까지 선보였다. 이런 무능하고 한심한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정중부의 사위라는 이유만으로 출세가도를 달려 뒤에 추밀원부사, 병부상서로 갑자기 추부(樞府)에 뛰어올라 상벌을 완전히 장악해 인사 행정을 마음대로 쥐락펴락했으며 정2품 참지정사(參知政事)까지 승진했다.

본래 관례상 재상이 사신으로 금나라에 갈 경우 수행원의 수가 정해져 있었는데 장사로 이익을 보려는 자들이 사신에게 은 몇 근을 뇌물로 준 후 따라가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내시낭중 최정(崔貞)이 생일회사사(生日回謝使)로 임명되자 송유인이 자기 집 노비 1명을 같이 데리고 가달라고 최정에게 부탁했지만 이미 그 사절단 일행에 뇌물을 바치고 군식구로 들어간 장사치들이 많아 넣어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노비가 주인의 권세를 믿고 그냥 따라갔다가 금나라의 검열에 걸려 송환되었고 그 일로 최정도 면직되고 말았다. 태학박사 노보여(盧寶璵)가 울주방어부사(蔚州防禦副使)가 되자 송유인은 외직 관리는 문관과 무관이 섞여 임명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울주방어부사도 문관이므로 문관인 노보여를 울주방어부사로 임명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임명장에 서명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부임하고 있던 명주부사(溟州副使)와 관성현령(管城縣令)도 모두 문관이었지만 이부(吏部)에서는 고을의 판관과 위(尉)를 모두 문관으로 임명했으며 대성(臺省)도 이미 서명을 마친 상태였다. 노보여가 이를 들어 송유인에게 항의했지만 전에 잘못 서명한 일이 있으므로 반대 건의를 올리지 못할 형편이었다. 이에 송유인은 중방을 꼬드겨 반대 의견을 내도록 하여 노보여 및 명주판관(溟州判官)과 관성위(管城尉)가 모두 부임하지 못하였다.

팔관회가 열리자 왕이 내시대부소경(內侍大府少卿) 정국검(鄭國儉)을 시켜 관례에 따라 각 성(省)의 재상들에게 화주(花酒)를 하사했는데 시간이 조금 늦었다고 송유인이 화를 내며 받지 않았다. 왕이 승선(承宣)을 보내어 간곡하게 달래자 그제야 받았으며 정국검은 탄핵을 당하여 내시(內侍) 관적(官籍)에서 삭제되었다가 뒤에 송유인에 아부하여 관적이 회복되었다. 당초 정중부가 총재(冢宰)로 중서성(中書省)에 있게 되자 송유인은 그의 사위였기 때문에 재상 지위에 오르지 못하고 여러 해 동안 추밀원(樞密院)에 있었다. 그러다가 몰래 내인(內人)에게 청탁해 수사공(守司空)·상서복야(尙書僕射)가 되었으며 정중부가 은퇴한 뒤에는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벼슬을 받았다. 당시 민영모(閔令謨)가 먼저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있었으나 무인이자 정중부의 사위인 송유인의 기세에 눌린 왕이 어쩔 수 없이 그를 민영모보다 상위 관직에 임명했는데 송유인이 굳이 사양하자 다시 민영모를 문하시랑평장사로 삼아 송유인의 위에 두었다. 송유인이 수덕궁(壽德宮)을 달라고 요구해 자기 처소로 삼았는데 부귀와 사치가 왕실 못지 않았다고 한다.

잘 나가던 송유인이 몰락하는건 한순간이었는데 그의 후원자이자 장인인 정중부가 74세라는 고령을 이유로 은퇴한 것이 몰락의 시초였다. 비록 간신이었지만 노회하게 강온양면으로 문신들을 구워 삶았던[5] 정중부와는 달리 송유인은 그릇도 작고 능력도 별로였는데 그런 자가 정중부의 뒤를 이어 조정의 실세가 된 것이 문제였다. 동중서문하평장사 겸 판병부사 겸 추밀원사였던 문극겸과 부사 한문준은 모두 당대의 이름난 선비들이었고 강직한 사람들이라 정중부도 이 둘을 함부로 건드리지 않고[6] 존중한 사람들이었는데 송유인은 멋대로 둘을 탄핵하려 한 것이었다. 문극겸과 한문준은 명종이 신뢰하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라 평소 송유인은 둘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한 번은 한문준이 어떤 군졸을 위해서 송유인에게 글을 보내어 관직을 구하고 또 직접 찾아가서 청탁한 일이 있었다. 건수를 잡았다고 생각한 송유인은 청렴한 코스프레를 시전하며 한문준에게 "추밀원의 대신임에도 불구하고 감히 사사로운 일로 관리의 집을 기웃거리니 대신으로서의 체통을 잃었다."고 꾸짖으며 탄핵하였다. 문극겸의 경우는 집안에 초상이 나서 명종의 행차를 호종하지 못했는데 송유인은 이걸 트집잡아 측근 신하로서의 예법을 어겼다 하여 함께 탄핵을 올렸다. 두 사안은 당연히 탄핵까지 갈만한 사안이 아니었지만[7] 송유인이 정중부의 사위였고 비록 정중부가 은퇴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건재한 시기였기에 명종은 결정을 미루었다. 송유인이 더욱 강경하게 논죄하자 왕은 우승선 문장필(文章弼)을 그의 집으로 보내 한문준은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하지만 상을 당해 호종하지 않는 것은 나라의 전례이니 그것 때문에 문극겸을 벌한다면 예법에도 어긋나는 것이라고 은밀히 달래었다. 그러나 송유인이 그래도 왕명에 따르지 않고 여러 날 동안 두문불출하자 문극겸 등이 몰래 명종에게 찾아가 그의 말을 들어줄 것을 청하고 결국 명종이 문극겸과 한문준을 좌천시켰다. 하지만 이는 조정 내에서 을 만드는 꼴만 되었고 몰락의 단초가 되었다.

결국 장인 정중부가 사직한지 1년만인 1179년 경대승이 정중부 일가의 횡포를 벌한다는 명분으로 거병을 했고 현장에서 바로 사망한 정균과는 달리 송유인은 정중부 등과 더불어 살 길을 찾아 달아났으나 얼마 뒤 붙잡혀 처형당하고 장인 정중부, 매부 정균과 함께 머리가 저잣거리에 효수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3. 자녀[편집]

아버지가 비정상이다보니 자식도 정상은 아니었다. 송유인에게는 송군수(宋群秀)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 역시 성질이 억세고 고집스럽고 사나운데다 교활하기까지 한 작자였다. 그 역시 불법을 많이 저질렀으나 외할아버지[8]가 고려 최고의 권력자였던 정중부였고 아버지가 고려에서 손꼽히는 실력자인 송유인이었기에 어느 누구도 치죄하지 못했고 오히려 젊은 나이에 고위 관직에 올랐을 정도였다. 송유인이 1178년에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찰방사(察訪使)를 각 지방에 파견할 때 그도 장군으로서 전라도 찰방사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관리들의 고과를 매기면서 행정 업적은 도외시한채 자기가 좋고 싫음에 따라 마음대로 결정했으나 권신의 자식이므로 아무도 감히 비판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 그 역시도 1179년에 외할아버지 정중부, 외삼촌 정균, 아버지 송유인이 처형당할 때 함께 처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대승이 정중부를 처형할 당시 정중부는 역적이었고 역적은 최소 3족을 멸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송군수 역시 이 때 연루되어 함께 처형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4. 대중매체[편집]


[1] 2003년작 KBS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송유인이 매형으로 나왔지만 실제로는 송유인이 정균의 매형인지 매제인지는 불분명하다. <고려사>에도 송유인은 그저 정중부의 사위라고만 적혀 있을뿐 정균과의 관계는 자세히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매형이나 매제로 적지 않고 중립적 표현인 매부로 적는다.[2] 훗날의 의종이다.[3] 외국에 드나드는 일이 잦은 사람이 현지에 두는 섹스 파트너를 말한다. 현재도 중국에는 이런 형태가 있는데 대만 출신 사업가들이 중국에 출장을 가는 일이 잦아 중국 현지에 현지처를 두는 경우가 많다. 한국인들 중에도 이런 인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화가 박인권 화백의 작품 <여자전쟁>에도 박 씨 노인웨이하이 근교 시골 마을에 현지처를 두고 중국을 왕래하며 단돈 40만원으로 현지처와 함께 황제 생활을 하다가 엿되는 에피소드가 나와 있다.[4] 바다 한가운데 외딴 으로 내쫓아 버렸다고 한다. 자객을 몰래 보내 암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5] 당장 이의방이고 등 젊은 무인들이 문신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겠다고 날뛸 때 이들을 진정시키며 말리던 것이 온건파의 수장인 정중부였다. 이의방 동생의 장인인 문극겸이 이의방을 설득하여 피해를 줄이기도 했지만 중방의 수장이면서도 온건파의 수장이던 정중부에게 문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주로 붙게 되었는데 이것은 여러 무신들과 문신들의 혼인 동맹으로도 이어진다.[6] 정중부의 경우는 분노에 불타던 젊은 무관들과 달리 분노 외에도 권력을 잡으려는 계획을 처음부터 짜고 있었기에 문신들에게 호감을 사고 있는 둘을 존중했다.[7] 애초에 체통과 예법을 따졌을 때 저 둘이 겨우 저 정도로 탄핵감이면 송유인은 사형감이다.[8] 단 혈연적인 외할아버지는 아닐 가능성이 높다. 송유인이 정중부의 사위가 된 것은 1170년인 무신정변 이후의 일이기 때문에 나이를 생각하면 쫓아낸 전처의 자식일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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