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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충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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蔡忠順
(? ~ 1036년 5월 15일)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

1. 개요[편집]

고려 제7대 목종 ~ 제10대 정종 시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음성이며 사망 후에 받은 시호는 정간이다. 제8대 현종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활약함과 동시에 제2차 여요전쟁 중 현종이 남쪽으로 피난했을 때는 그를 따라 함께 움직였던 몇 안 되는 신료 중 한 명이기도 했다.[1]

2. 생애[편집]

고려사》에 수록된 본인의 열전에 의하면 그의 족보를 알 수 없다고 적혀 있지만, 제4대 광종때 귀화하여 목종 원년에 사망할 때까지 고려의 관료로서 살아온 채인범(934년 ~ 998년)의 묘지명#에 따르면 그의 첫 번째 부인인 청하군대부인 최씨 사이의 유일한 소생이자 장남이 내사시랑 동 내사문하평장사 감수국사를 지냈으며, 목종 재위 초에 사망한 채인범이 현종이 즉위한 해에 상서우복야로 추증되었다는 기록이 있는지라, 활동 시기가 겹치며 "현종의 공신들 중 한 명이자 해당 관직에 임명된 바 있는 채충순이 그 장남이 아니냐?"는 얘기가 있다.

어쨌든 목종의 치세때 여러 차례 승진하여 중추원부사, 급사중에 이르렀는데, 목종 재위 말기인 목종 12년(1009년)에 목종이 궁궐에서 벌어진 화재로 충격을 받은 뒤 병석에 눕자 최항, 유진과 더불어 은대에서 숙직하던 중, 목종이 그만을 따로 불렀고, 이후 김치양에 대해 고발한 유충정의 편지와 독살 위협을 받고 있는 중이라는 대량원군(제8대 현종)의 편지를 보여주며, 최항과 더불어 자신의 뒤를 이을 대량원군을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리자, 채충순은 최항 등과 의논한 뒤 그들과 함께 당시 선휘판관이었던 황보유의를 천거하여 그로 하여금 대량원군을 은밀히 데려올 것을 건의했고, 그 뒤 왕명에 따라 대량원군에게 내릴 글의 초안을 작성했다.[2]

그렇게 현종이 즉위하는 과정에서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 때문인지 현종 즉위 직후 직중대에 임명된 것에 이어 얼마 지나지 않아 이부시랑 좌간의대부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제2차 여요전쟁이 발발하여 현종이 강감찬의 말을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는 길에 오르자 왕을 호종했는데, 다른 관료들이 도망치는 와중에도 전방에서 활동하다가 현종을 찾아온 지채문을 포함하여 장연우, 주저[3] 등 몇몇 관료들과 함께 현종을 끝까지 보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모습 때문인지 그 해 비서감, 중추사에 임명된 것에 이어 다음해인 현종 3년에는 예부상서에 임명되었고, 현종 4년에는 중추원사로서 거란에 갔다 오기도 했다.

이후에는 예부상서(현종 7년), 좌산기상시 중추사(현종 8년), 이부상서 참지정사(현종 9년)로 연이어 임명되었고, 추충진절위사공신의 칭호를 받았으며, 현종 9년에 발발한 제3차 여요전쟁에서 강감찬귀주 대첩에서 거란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해인 현종 10년에는 제양현개국남에 책봉됨과 동시에 식읍 300호를 받는데, 이 때 군사들 가운데 부모의 나이가 80세 이상인 이가 있다면 군역을 면제해 부모를 봉양하게 하고, 문•무 신료들 가운데 부모의 나이가 70세 이상으로 다른 형제가 없는 이가 있다면 외직에 임명되지 않게 하며, 그의 부모가 병이 나면 200일의 휴가를 주어 돌보게 해달라는 건의를 했고, 이를 현종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 뒤인 현종 12년에는 왕명에 따라 주저와 더불어 《현화사 비문》을 지었는데, 그 중 후면의 비문을 채충순이 맡아 작성했고, 검교태위 제양현 개국자에 책봉됨과 동시에 식읍 500호를 받은 것에 이어 보국공신으로 칭호가 올려졌고, 내사시랑평장사 겸 서경유수(현종 13년), 태자소사(현종 14년), 판상서예부사(현종 16년), 문하시랑평장사(현종 18년)에 연이어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현종 21년에 판서경유수사로 임명되자 사직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가 이듬해인 현종 22년이자 덕종 즉위년인 1031년이 되어서야 사직하고, 정종 2년인 1036년에 사망했다.

3. 대중매체[편집]


[1]고려사》<제신 열전> - 지채문 전 -에 의하면 현종의 행렬은 50여 명이었는데, 여기에 채충순의 이름이 있었고, 창화현의 향리가 "하공진이 채충순과 김응인 등을 잡으러 온다."고 하자 김응인은 달아났는데, 채충순은 달아나지 않았으며, 현종이 지채문의 도움으로 도망치자 뒤따라갔고, 하공진이 거란군의 포로가 되자 다들 놀라 자빠져 도망쳤는데, 여기서도 채충순은 도망치지 않은 신하들의 명단에 올랐다. 이때 현종에게 합류했다가도 도망친 신하들도 많았는데, 채충순은 계속해서 도망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2] 이때 목종이 명령을 내리며 울자, 같이 울었고 더 나아가 초안을 작성할 때 그의 옆에서 목종이 먹을 갈아주자 왕의 건강을 걱정하며 이를 사양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런 기록들과 더불어 상술했듯이 목종이 그만을 따로 불러 먼저 밀명을 내린 것으로 봐선 둘의 관계가 상당히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3] 본인 문서에도 서술되어 있듯 목종 시기 고려로 왔을 때 채충순이 그 능력을 알아보고 천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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