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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저(승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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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


李之氐
(? ~ 1317)

1. 개요[편집]

고려 후기의 무관. 예안군 출신이다. 작위는 승안군(承安君).

2. 생애[편집]

이지저는 원종 시기, 세자였던 충렬왕원나라에 입조할 때 호종한 장군이다. 충렬왕의 총애를 받아 처음부터 측근 내료로서 벼슬을 시작한다.

충렬왕 3년(1277) 7월, 내시들이 선왕 원종의 제2비 경창궁주가 그 아들 순안공 왕종, 승려 종동(終同)과 함께 충렬왕을 저주했으며, 왕종을 공주(제국대장공주)와 결혼시켜 다음 왕으로 세우려고 했다고 보고한다. 충렬왕은 이습, 인공수, 이지저, 인후, 장순룡에게 승려 종동을 먼저 국문하게 한다. 결국 9월 경창궁주는 폐서인됐고 왕종과 종통은 섬으로 유배보내진다. 또 충렬왕은 사냥하기를 즐겼는데, 죄인들의 처우가 정해진 때에도 사냥 때문에 제국대장공주와 함께 마제산(馬堤山)에 나가 궁을 비운 상태였다. 이지저는 문창유와 함께, 사냥 때문에 말이 곡식을 밟고 많은 백성들이 원망하고 있으니 어서 돌아가자고 간언한다. 왕은 이지저의 말을 따라 환궁한다.

충렬왕 4년(1278), 이지저가 왕의 실책을 지적하고 뉘우치게 만든다. 당시 인사가 공정하지 못한 것에 분개한 첨의부의 낭사들은 고신(告身, 임명장)이 내려와도 서명을 거부하고 있었다. 왕의 측근 등 불공정한 방식으로 관직을 얻으려던 이들은 이 문제를 왕에게 일러바쳤고, 왕과 첨의부 낭사들 사이에 틈이 생긴다. 이 해 4월에 이르러 승지 이존비가 감찰사의 장계를 들고 왕에게 보고하려다, 왕이 그 장계를 직접 보지도 않고 첨의부 낭사들의 항명에 관한 장계라고 오해하며 양자간의 갈등이 폭발한다.

코르치(忽赤) 최숭 등에게 낭사들을 잡아오라는 명령이 하달됐고, 잡혀온 낭사들은 그 자리에서 파면된다. 왕은 오해를 풀기 위해 나서는 이존비 역시 낭사들을 두둔하는 것이라고 단단히 오인하고 있었는데, 이 때 이지저가 앞으로 나선다.
비(이존비)가 아뢴 것은 감찰사의 장계이지, 첨의부의 장계가 아닙니다. 주상께서는 그것을 살펴보지도 않으시고 낭사들에게 죄를 물으셨으며, 존비를 책망하며 내치셨습니다. 또한 첨의부는 백관의 장(長)인데, 일개 코르치로 하여금 밤에 여러 낭사들을 포박하게 하셨으니 여러 사람들이 어떻게 바라보겠습니까?[1]

『고려사절요』 권20, 충렬왕 4년 4월.
충렬왕은 그제서야 장계를 직접 열람하고 감찰사의 것임을 확인한 뒤 후회하며 낭사들을 풀어준다.

10월, 박항, 김주정, 염승익 등과 함께 기존의 재추를 대신하는 비직치(必闍赤), 또는 별청재추(別廳宰樞)의 일원으로 임명된다. 재추의 수가 많아져 정사를 논의하기 부적합하다며 기존 제도의 문제를 제기한 것은 박항이었다. 이지저와 염승익은 박항과 뜻을 같이 해, 왕에게 박항이 제안한 신법을 받아들이자고 간언한다. 결국 새 제도가 받아들여졌으나, 조종의 옛 제도에 어긋나 모두가 불평했다고 전한다.

충렬왕 5년(1279)에는 민가의 비둘기를 얻어와 수강궁에 보내려던 왕을 뜯어말려 다시 민가에 돌려준 일이 있다. 10월에는 개경 남쪽 근교에서 왕의 사냥에 참여한다. 이지저 본인은 사냥 경험이 적었는지, 취미로 사냥을 하는 충렬왕은, "사냥이란 무릇 달려서 찾아가며 짐승을 쫓는 것이니, 험한 것을 평평한 것과 같이 보아야 마땅하다."[2]라고 조언하며 사냥 많이 다니며 연습해야겠다고 한다.

고려 기준으로는 충렬왕 7년(1281) 원나라의 일본원정이 있었는데, 장군이었던 이지저는 참전을 피하고자 면직될 것을 간청한다. 충렬왕 8년(1282) 5월, 세자 시절 원에 갈 때 장군으로서 호종한 공으로 1등공신에 오른다.

같은 해 9월, 전장을 만들고 도망쳐나온 백성들을 모아 삼아 재산을 불리고 있다고 고발당한다. 고발한 인물은 인물추고별감 이영주이고, 고발당한 인물은 대표격인 염승익을 비롯해 이지저, 박경 등 모두 9명이었다. 당시 이지저 등은 백성들을 전호(佃戶)로 삼아 조세를 걷으면서 중앙 정부에는 한 홉의 곡물도 세금으로 바치지 않았다. 지방의 수령이 이들을 고발하려 해도 모두 충렬왕의 총애를 받던 이들이라 역으로 참소당해 쫓겨날 것을 걱정해야 했다. 이지저는 염승익 등이 역으로 이영주를 비난하고 참소하는 것에 가담했고, 왕은 결국 이영주를 싫어하게 돼 고발을 불문에 부치기에 이른다.

전장에서 나오는 조세로도 부족했는지, 이지저는 충렬왕 9년(1283) 왕의 측근들이 땅을 하사받을 때 특히 더 많이 받아놓고는 땅을 더 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세자(충선왕)는 "자네는 땅이 없어도 이미 가난하지 않은데."[3]라고 말했고, 이지저는 얼굴을 붉히며 물러난다.

충렬왕 10년(1284)의 인사에서 근신이라는 이유로 대장군 벼슬을 받고, 관노 출신 김의광도 이지저 덕에 장군직을 받는다. 충렬왕 18년(1292) 동지밀직사사에 임명되자 이듬해 원나라로부터 합포등처진변만호부 부만호에 임명되고 호부를 받는다. 이후 우상시(1295)를 거쳐 충렬왕 23년(1297) 삼사좌사에 임명된다. 이어서 검교사도 자정원사(1298), 도첨의찬성사(1304)를 역임하고 합포만호부에 나가 진수(鎭戍)한다.

충선왕이 즉위한 뒤 검교첨의정승에 임명되고 또 상의식목도감사에 임명됐으며, 충선왕 3년(1311) 예안군(禮安君)에 봉해졌다가 충숙왕 4년(1317) 승안군(承安君)으로 고쳐 봉해졌다. 같은 해 2월 12일에 죽었다.

3. 가족관계[편집]

  • 아들: 이수(李秀), 이실, 이신(李伸), 이희(李禧)

[1] 庇所白者, 監察司狀, 非僉議府狀也. 上不之察, 而罪郞舍, 責出尊庇. 且僉議府百官之長也, 使一忽赤夜縛諸郞舍, 如衆望何.[2] 夫獵馳聘從禽, 宜視險若夷.[3] 汝非田, 亦不爲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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