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유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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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인물.
인종 14년(1136) 2월, 묘청의 난이 진압되자 잠시 평양의 성내좌순검사를 맡았고, 인종 20년(1142)에는 금나라에 가서 왕의 생일을 축하해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의종 초에는 어사잡단, 직문하성, 상서우승, 서북면병마사(1155), 전중감(1156) 등을 거쳐 의종 11년(1157)에는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추밀원 우승선에 임명됐다. 이 해에 최유칭은 왕명을 받고, 왕의 동생 대령후의 집에 왕래하며 음모를 꾸미고 있다던 악공 최예(崔藝)를 국문했다. 실상은 최예의 아내가 남편을 무고한 것이었지만, 결국 정극영 등 대령후와 가깝게 지내던 인물들은 죄를 논핵당해 유배 등의 처벌을 받았다.
대령후 일파 제거에 공을 세운 최유칭은 의종 15년(1161) 12월 추밀원부사, 3개월 뒤인 의종 16년(1162) 3월에는 동지추밀원사, 그 해 12월에는 지추밀원사 판삼사사로 승진했다. 같은 해 8월에는 중서문하성에서 좌산기상시를 맡으며 오중정(吳中正)을 어사중승으로 천거하기도 했다.
의종 17년(1163) 8월 좌정언 문극겸이 올린 상소 때문에 곤혹을 겪었다. 문극겸이 환관, 궁인, 술인 등의 행실을 비판하는데 관료 중에는 최유칭이 탐욕스럽고 자기 편만 챙김을 언급했다. 은밀한 부분까지 지적한 것에 분노한 의종이 문극겸의 상소를 불태우긴 했지만, 최유칭은 찔리는 부분이 있는지 의종에게 변명할 기회를 요청했다. 최유칭과 문극겸이 서로 대변하는데 있어 문극겸의 말이 더 설득력 있었지만, 결국 처벌을 받는 쪽은 왕의 심기를 거스른 문극겸이었다.
이후 지문하성사(1163), 상서좌복야 참지정사(1164), 판병부사(1164),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1165), 수태보 판상서이부사(1165) 등을 역임했다. 의종 23년(1169)에 병 때문에 중서시랑평장사로 은퇴했던 최유칭은 바로 다음해인 의종 24년(1170)에 발생한 정중부의 난 때 정중부에게 발각되어 군졸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대령후 일파 제거에 공을 세운 최유칭은 의종 15년(1161) 12월 추밀원부사, 3개월 뒤인 의종 16년(1162) 3월에는 동지추밀원사, 그 해 12월에는 지추밀원사 판삼사사로 승진했다. 같은 해 8월에는 중서문하성에서 좌산기상시를 맡으며 오중정(吳中正)을 어사중승으로 천거하기도 했다.
의종 17년(1163) 8월 좌정언 문극겸이 올린 상소 때문에 곤혹을 겪었다. 문극겸이 환관, 궁인, 술인 등의 행실을 비판하는데 관료 중에는 최유칭이 탐욕스럽고 자기 편만 챙김을 언급했다. 은밀한 부분까지 지적한 것에 분노한 의종이 문극겸의 상소를 불태우긴 했지만, 최유칭은 찔리는 부분이 있는지 의종에게 변명할 기회를 요청했다. 최유칭과 문극겸이 서로 대변하는데 있어 문극겸의 말이 더 설득력 있었지만, 결국 처벌을 받는 쪽은 왕의 심기를 거스른 문극겸이었다.
이후 지문하성사(1163), 상서좌복야 참지정사(1164), 판병부사(1164),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1165), 수태보 판상서이부사(1165) 등을 역임했다. 의종 23년(1169)에 병 때문에 중서시랑평장사로 은퇴했던 최유칭은 바로 다음해인 의종 24년(1170)에 발생한 정중부의 난 때 정중부에게 발각되어 군졸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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