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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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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묘지명


趙云仡
(1332 ~ 1404)

1. 개요[편집]

여말선초의 인물. 호는 석간(石磵). 공민왕부터 조선 태조까지를 섬겼다.

2. 생애[편집]

한양부 풍양현(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출신. 흥안부원군 이인복의 문하에서 수학한 뒤 1357년(공민왕 6) 과거에 급제해 안동서기가 된다. 1361년(공민왕 10) 형부원외랑을 지내다 홍건적의 난 때 공민왕의 남행에 호종한 공으로 2등 공신의 반열에 오른다. 이듬해인 1362년(공민왕 11) 국자직강을 지내는데 장인인 김득배정세운의 살해에 공모한 죄로 도망다니게 된다. 조운흘은 장모에게 사실대로 말해 고초를 겪지 말라고 조언했고, 장인은 결국 참수된 뒤 상주에서 효수된다. 이후 조운흘은 외직으로 나가 전라도, 서해도, 양광도 3도의 안렴사를 역임한다.

1374년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니 전법총랑을 지내다 돌연 사직하고는 상주 노음산(노악산)에 들어가 거짓으로 미친 척 하며 은둔한다. 스스로를 석간서하옹(石磵棲霞翁)이라 하고 소를 타고 다니며 기우찬(騎牛讚), 석간가(石磵歌) 등을 지어 불렀는데, 이 작품들에는 숨겨진 뜻이 담겨 있었다.

1377년(우왕 3) 좌간의대부로 복직하자 우왕 앞에 나아가 공부에 힘쓸 것을 권하는 상소를 올린다.
近來, 書筵講學, 或作或輟, 臣等竊爲殿下惜也. 願奉先考之遺訓, 復設書筵, 俾正直之士, 日近左右, 萬機之暇, 講習經史.

근래에 서연, 강학을 어떤 때는 하시고 어떤 때는 그만두시는데, 신 등은 전하를 위해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원컨대 선왕의 유훈을 받들어 다시 서연을 여시고 곧고 바른 선비들은 매일 가까이에 두시어 정무를 보시는 틈에 경, 사를 강습하십시기 바랍니다.
우왕은 조운흘을 판전교시사에 임명하는데, 태종실록에서는 조운흘이 이 관직을 받고 좋아하지는 않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왕이 상소를 한 귀로 흘려들었기 때문인지 1380년(우왕 6) 조운흘은 다시 퇴직을 청하고 이번에는 광주 고원강촌(서울특별시 송파구)으로 향한다. 조운흘은 자은사의 승려 종림(宗林)과 어울리며 판교원(板橋院)과 사평원(沙平院)을 짓고 스스로를 원주라고 칭한다. 허름한 차림을 하고 인부들과 함께하니 개경의 높은 관료였다는 것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1388년(우왕 14) 다시 전리판서로 복직하고 밀직제학에 임명된다. 당시에 안렴사들이 관등이 낮아 직무를 수행하기 어렵다고 판단됐는데, 위엄 있고 명망 높은 이들이 도관찰출척사로 파견돼 대신 보내게 된다. 조운흘은 서해도의 도관찰출척사로 임명돼 도의 기강을 세우고 돌아오니 1389년(창왕 1) 첨서밀직사사에 임명되고 동지밀직사사로 승진한다. 1390년(공양왕 2) 계림부윤으로 나갔는데 2년 뒤인 1392년 나라가 망한다.

1392년(태조 1) 태조는 조운흘에게 강릉대도호부사(강릉부사) 자리를 내린다. 강릉 사람들은 부사 조운흘을 기리며 생사당(生祠堂)도 세우는데, 조운흘은 부임한 바로 다음 해에 병으로 은퇴할 것을 청하고 검교정당문학에 제배된다. 벼슬에서 물러난 조운흘은 검교직에 따라 나오는 녹봉을 받지 않으며 광주의 별채에서 지낸다.

조준이 근처를 지나다가 재상들과 함께 큰 술자리를 준비해 찾아간 일화가 있다. 조운흘은 검은 승복을 입고 맞이했으며, 풍악과 함께 연회가 시작되는데도 못 들은 척 하며 정좌한 채로 나무아미타불을 읊는다. 조준 등은 조운흘이 싫어하는 것을 눈치채고 풍악을 그치게 하고는 차를 조용히 마시고 돌아간다.

3. 묘지명[편집]

1404년(태종 4) 73세의 나이로 병이 들자 죽음을 예견하고 자신의 묘지명을 직접 쓴 뒤 앉은 채로 조용히 죽음을 맞는다. 이 묘지명은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 사서를 통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다.
資憲政堂文學趙云仡, 豐壤縣人, 高麗 王太祖臣平章事趙孟三十[三十]代孫。 恭愍王代興安君 李仁復門下, 登科, 歷仕中外, 佩印五州, 觀風四道。 雖大無聲跡, 亦無塵陋。 年七十三, 病終廣州 古垣城。 無後。 以日月爲珠璣, 以淸風明月爲奠, 而葬于古楊州 峨嵯山南摩訶耶 孔子杏壇上、釋迦雙樹下。 古今聖賢, 豈有獨存者! 咄咄人生事畢。

자헌 대부(資憲大夫) 정당 문학(政堂文學) 조운흘(趙云仡)은 풍양현(豐壤縣) 사람이니, 고려왕 태조(太祖)의 신하 평장사(平章事) 조맹(趙孟)의 30[三十]대 손이다. 공민왕 대에 흥안군(興安君) 이인복(李仁復)의 문하로서 등과(登科)하여 두루 중외(中外)의 벼슬을 지냈으니, 다섯 주(州)의 수령이 되고, 네 도(道)의 관찰사가 되어, 비록 크게 드러난 자취도 없었으나 또한 더러운 이름도 없었다. 나이 73세에 병으로 광주(廣州) 옛 원성(垣城)에서 종명(終命)하니, 후손이 없다. 일월(日月)로써 상여(喪輿)의 구슬을 삼고, 청풍(淸風)과 명월(明月)로써 전(奠)을 삼아, 옛 양주(楊州) 아차산(峨嵯山) 남쪽 마하야(摩訶耶)에 장사지낸다. 공자(孔子)는 행단(杏壇) 위이요, 석가(釋迦)는 사라 쌍수(沙羅雙樹) 아래였으니, 고금의 성현(聖賢)이 어찌 독존(獨存)하는 자가 있으리오! 아아! 인생사(人生事)가 끝났도다.

[三十] 1.1 1.2 아무리 빨리 자식을 본다 해도 고려 초부터 고려 말까지 30대씩이나 될 수 없기 때문에, 단순히 먼 후손이라는 것을 강조한 표현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30(三十)을 13(十三)의 오기로 보기도 하나, 추측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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