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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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백료손(伯遼遜)으로 본래 원나라 색목인 관료였다. 1359년 아버지를 따라 고려로 이주했다.[1] 이후 원나라 볼모 시절 아버지와 친구였던 공민왕의 후원으로[2] 1362년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시작으로 지문하부사 등 밀직사와 문하부의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경력을 쌓았다. 이후 창왕 폐위와 공양왕 옹립 과정에서 재추인 정당문학으로서 이성계와 함께 흥국사 9공신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1392년 조선 건국 후에는 정도전 일파와 대립하고 유배되면서 정치 주류에서 이탈하게 된다. 하지만 태조가 반드시 구제해야 하는 인물로 이색, 우현보와 함께 지명하면서 그 외 30여 명과 함께 유배에서 해제되고 명예직인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을 받아 경력을 이어갈 수 있었다. 복귀 후에 실제로는 역관 담당 부서인 사역원제조(司譯院提調)로 근무하다 1396년 판삼사사가 되어 다시 재신이 되었다.
설씨의 글자 '설'은 가문이 대대로 설련하(偰輦河)[3]에 살았기 때문이고 관향은 조선 태조가 계림으로 정해줬다. 따라서 설장수의 부친 설손이 사성(賜姓) 경주 설(偰)씨의 시조가 된다.
1392년 조선 건국 후에는 정도전 일파와 대립하고 유배되면서 정치 주류에서 이탈하게 된다. 하지만 태조가 반드시 구제해야 하는 인물로 이색, 우현보와 함께 지명하면서 그 외 30여 명과 함께 유배에서 해제되고 명예직인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을 받아 경력을 이어갈 수 있었다. 복귀 후에 실제로는 역관 담당 부서인 사역원제조(司譯院提調)로 근무하다 1396년 판삼사사가 되어 다시 재신이 되었다.
설씨의 글자 '설'은 가문이 대대로 설련하(偰輦河)[3]에 살았기 때문이고 관향은 조선 태조가 계림으로 정해줬다. 따라서 설장수의 부친 설손이 사성(賜姓) 경주 설(偰)씨의 시조가 된다.
- 저서로는 《직해소학》이 있다. 외교 수준에서 사용되는 문어체 중국어를 다룬 고급 역관 교육서이며 그동안 사용되어 온 평민의 일상 언어를 기반으로 한 중국어 교재의 대체재로 당대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 정도전에서는 직접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명나라에서 황제의 칙서를 받고 돌아오는 것으로 여러 차례 사신으로 다녀왔음이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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