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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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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역사
[ 본기(本紀) ]
1·2권 「태조기(太祖紀)」
3·4권 「태종기(太宗紀)」
5권 「세종기(世宗紀)」
6·7권 「목종기(穆宗紀)」
8·9권 「경종기(景宗紀)」
10·11·12·13·14·15·16·17권 「성종기(成宗紀)」
18·19·20권 「흥종기(興宗紀)」
21·22·23·24·25·26권 「도종기(道宗紀)」
27·28·29·30권 「천조제기(天祚帝紀)」

※ 31권 ~ 62권은 志에 해당. 63권 ~ 70권은 表에 해당. 요사 문서 참고
[ 열전(列傳) ]
71권 「후비전(后妃傳)」
72권 「종실전(宗室傳)」
73권 「야율갈로등전(耶律曷魯等傳)」
74권 「야율적랄등전(耶律敵剌等傳)」
75권 「야율적렬등전(耶律覿烈等傳)」
76권 「야율해리등전(耶律解里等傳)」
77권 「야율옥질등전(耶律屋質等傳)」
78권 「야율이랍갈등전(耶律夷臘葛等傳)」
79권 「실방등전(室昉等傳)」
80권 「장검등전(張儉等傳)」
81권 「야율실로등전(耶律室魯等傳)」
82권 「야율융운등전(耶律隆運等傳)」
83권 「야율휴가등전(耶律休哥等傳)」
84권 「야율사등전(耶律沙等傳)」
85권 「소달름등전(蕭撻凜等傳)」
86권 「야율합주등전(耶律合住等傳)」
87권 「소효목등전(蕭孝穆等傳)」
88권 「소적렬등전(蕭敵烈等傳)」
89권 「야율서성등전(耶律庶成等傳)」
90권 「소아랄등전(蕭阿剌等傳)」
91권 「야율한팔등전(耶律韓八等傳)」
92권 「소탈랄등전(蕭奪剌等傳)」
93권 「소혜등전(蕭惠等傳)」
94권 「야율화가등전(耶律化哥等傳)」
95권 「야율홍고등전(耶律弘古等傳)」
96권 「야율인선등전(耶律仁先等傳)」
97권 「야율알특랄등전(耶律斡特剌等傳)」
98권 「소올납등전(蕭兀納等傳)」
99권 「소암수등전(蕭巖壽等傳)」
100권 「야율당고전(耶律棠古等傳)」
101권 「야율적랄등전(耶律敵剌等傳)」
102권 「소봉선등전(蕭奉先等傳)」
103·104권 「문학전(文學傳)」
105권 「능리전(能吏傳)」
106권 「탁행전(卓行傳)」
107권 「열녀전(列女傳)」
108권 「방기전(方技傳)」
109권 「영관·환관전(伶官宦官傳)」
110·111권 「간신전(奸臣傳)」
112·113·114권 「역신전(逆臣傳)」
115권 「이국외기(二國外記)」

※ 116권은 國語解에 해당. 요사 문서 참고

1. 개요2. 생애3. 여담

1. 개요[편집]

趙延壽
(? ~ 948)

요나라의 인물. 한인 출신으로 본래 성씨는 유씨이고 항산(恒山) 사람이며 아버지는 유항(劉邟)이다.

2. 생애[편집]

후량(後梁) 개평(開平) 초, 창주절도사(滄州節度使) 유수문(劉守文)이 공격해오자 그의 비장(稗將) 조덕균(趙德鈞)에게 사로잡혀 양자가 되었다.

후당(後唐)의 이사원(李嗣源)이 딸을 조연수에게 장가들게 하고 즉위하자 그의 딸을 흥평공주(興平公主)로 봉하고 조연수를 부마도위(駙馬都尉) 추밀사(樞密使)로 임명했다. 이사원의 아들 이종영(李從榮)이 황제가 되고자 반란을 일으켰으나 선무군절도사(宣武軍節度使)로 부임하여 화를 면하였다.

청태(清泰) 원년, 노국공(魯國公)으로 작위를 올리고 다시 추밀사로 임명하여 허주(許州)를 지키도록 하였다. 석경당(石敬瑭)이 태원(太原)에서 거병하자 장경달(張敬達)을 보내 토벌하도록 하였다. 장경달이 패하여 진안채(晋安寨)로 퇴각하자 양아버지 조덕균과 함께 구원하러 갔으나 진안채가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단백욕(團柏峪)으로 달아났다. 태종(太宗)이 추격해오자 조연수는 양아버지와 함께 항복하였다.

천현(天顕) 12년, 양아바지 조덕균이 죽자 조연수를 유주절도사(幽州節度使)로 임명하고 연왕(燕王)으로 봉하였다. 유주를 남경(南京)으로 고치자 유수(留守)가 되어 남경의 모든 일을 맡았다.

천현 13년, 조연수의 아내가 후진(後晉)에 남아 있었는데 그녀를 데리고 돌아왔다.

회동(會同) 초, 태종이 그의 집에 행차하여 정사령(政事令)으로 임명하였다.

회동 6년, 후진이 맹약을 어기자 태종이 친정하여 조연수를 선봉으로 삼아 패주(貝州)를 함락시키고 그를 위박등주절도사(魏博等州節度使)로 삼고 위왕(魏王)에 봉하였다. 후진군을 남악(南樂)에서 패퇴시키고 원성(元城)으로 진군하자 후진의 장수 이수정(李守貞)과 고행주(高行周)가 맞서왔기에 그들을 격파하였다. 돈구(頓丘)에 이르렀을 때 장마가 크게 와 태종이 회군하려 했다. 조연수가 강변에 틀어박혀 있는 후진군이 나오기 전에 전주(澶州)로 가서 다리를 빼았아야 한다고 말하자 태종이 그대로 따랐다. 후진군이 오기전에 먼저 전주로 돌아간 뒤 후진의 고행주가 석성(析城)으로 오자 조연수가 경병(輕兵)을 이끌고 역습하고 태종이 친히 기병을 거느리고 적진으로 돌진하자 적이 마침내 무너졌다. 태종이 본국으로 회군하자 조연수에게는 그곳에 머물며 패주(貝州), 기주(冀州), 심주(深州)를 지키게 하였다.

회동 8년, 후진을 다시 정벌하였는데 후진군이 성을 굳게 지키고 나오지 않자 조연수는 "나는 북쪽으로 떠난지 오래지만 어버이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소. 만약 군을 보내 맞아준다면 나는 귀순하겠소." 라고 하며 후진군을 꾀어냈다. 후진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두중위(杜重威)에게 군사를 이끌고 조연수를 맞이하게 하였다. 조연수가 호타하(滹沱河)에 이르자 중도교(中渡橋)를 굳게 지키고 후진군에 맞서 싸워 후진의 장수 왕청(王清)을 죽이고 양군이 대치하였다. 조연수가 야율삭고(耶律朔古)와 다리를 굳게 지키고 있었기에 후진군은 다리를 빼앗지 못하고 패전을 거듭했고 결국 두중위는 군사를 이끌고 항복하였다. 후에 태종이 변주(汴州)를 함락하자 중경유수(中京留守) 대승상(大丞相)을 지냈다.

천록(天祿) 원년, 세종(世宗)이 즉위하자 추밀사(枢密使)로 임명했고 다음 해에 사망하였다.

3. 여담[편집]

젊을 적 용모가 아름답고 서사(書史)를 좋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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