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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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왕은 태자 시절이던 1260년에 정화궁주와 결혼했다. 그러나 고려가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면서 고려의 국왕은 원나라의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여야 했다. 이미 태자비가 있었던 충렬왕조차도 그러했다. 충렬왕과 정화궁주가 결혼한 지 14년이나 지난 1274년, 쿠빌라이 칸의 막내딸 제국대장공주가 충렬왕의 제1비가 되었고, 정화궁주는 제2비로 밀려났다.
제국대장공주는 기가 세고 자존심이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데다 남편 충렬왕에게 그다지 사랑 받지 못했고, 충렬왕의 잦은 엽색 행각으로 인한 불만 때문에 질투심이 굉장히 심해서 충렬왕에게 여자 문제를 자주 따졌다. 그럼에도 충렬왕이 바뀌지 않자, 제국대장공주는 화풀이로 충렬왕의 다른 여자들과 그 자제들에게 직간접적인 위해를 가했다. 특히 자신이 시집오기 이전에 정실이었던 정화궁주에게 열등감과 질투심을 가지고 엄청나게 괴롭혔다.
1275년, 제국대장공주는 충렬왕의 아들 충선왕을 낳았다. 이미 정화궁주가 낳은 아들 강양공(江陽公) 왕자(王滋)가 있었지만, 왕위는 원나라 황실의 외손자인 충선왕에게 돌아갔다. 제국대장공주의 득남을 축하하는 연회가 성대하게 치러졌는데, 처음에는 제국대장공주와 정화궁주의 자리가 동등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제국대장공주는 이를 몹시 불쾌하게 여겼고, 결국 제국대장공주가 정화궁주의 상석에 앉게 되었다.
연회 도중 정화궁주가 제국대장공주에게 무릎을 꿇고 술잔을 올렸는데, 이때 충렬왕은 신경이 쓰였는지 두 여인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제국대장공주는 "왜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제가 정화궁주에게 막 대한다고 그러십니까?"라면서 따지고는 "더 이상 이 자리에 못 있겠다"며 화를 냈다. 연회는 파토났고, 제국대장공주는 아들에게 가 버렸다. 다만 제국대장공주의 입장에서는, 다른 자리도 아니고 기껏 왕자를 낳고 자신을 위해 열린 연회에서 자신보다 지위도 낮은 전 여자와 같은 위치에 앉게 한다면 화가 날 만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에도 제국대장공주는 충렬왕에게 "정화궁주에게 가느냐"고 따지거나, 자신과 정화궁주의 시종 수를 비교하면서 질투하기도 했다.
1276년에는 누군가 "정화궁주가 무녀(巫女)를 시켜 제국대장공주를 저주하고 있다"는 헛소문을 퍼트려 정화궁주를 모함하기도 했다. 분노한 제국대장공주는 정화궁주를 감금했고, 정화궁주는 류경(柳璥)[2]의 도움으로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1284년에는 정화궁주가 소송에 휘말리는 사건이 있었다. 정화궁주는 일반 백성을 천민으로 잘못 알고 종으로 삼았는데, 이 백성은 불복하여 소송을 제기했다. 충렬왕의 지시로 정화궁주에게 유리한 판결이 났는데, 이 판결을 내린 관리가 판결 다음날 갑자기 의문사했다. 정화궁주를 공격했던 이행검(李行儉)만이 홀로 목숨을 건졌다. 참고로 이행검의 사위 기자오는 기황후의 친정 아버지였다.
이런 일들로 인해 정화궁주는 약 40여년 간 따로 떨어진 별궁에 거처했다. 이렇듯 정화궁주가 겪은 수모는, 당대 원나라 공주 출신 고려 왕비들의 횡포를 잘 보여준다.
제국대장공주는 기가 세고 자존심이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데다 남편 충렬왕에게 그다지 사랑 받지 못했고, 충렬왕의 잦은 엽색 행각으로 인한 불만 때문에 질투심이 굉장히 심해서 충렬왕에게 여자 문제를 자주 따졌다. 그럼에도 충렬왕이 바뀌지 않자, 제국대장공주는 화풀이로 충렬왕의 다른 여자들과 그 자제들에게 직간접적인 위해를 가했다. 특히 자신이 시집오기 이전에 정실이었던 정화궁주에게 열등감과 질투심을 가지고 엄청나게 괴롭혔다.
1275년, 제국대장공주는 충렬왕의 아들 충선왕을 낳았다. 이미 정화궁주가 낳은 아들 강양공(江陽公) 왕자(王滋)가 있었지만, 왕위는 원나라 황실의 외손자인 충선왕에게 돌아갔다. 제국대장공주의 득남을 축하하는 연회가 성대하게 치러졌는데, 처음에는 제국대장공주와 정화궁주의 자리가 동등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제국대장공주는 이를 몹시 불쾌하게 여겼고, 결국 제국대장공주가 정화궁주의 상석에 앉게 되었다.
연회 도중 정화궁주가 제국대장공주에게 무릎을 꿇고 술잔을 올렸는데, 이때 충렬왕은 신경이 쓰였는지 두 여인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제국대장공주는 "왜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제가 정화궁주에게 막 대한다고 그러십니까?"라면서 따지고는 "더 이상 이 자리에 못 있겠다"며 화를 냈다. 연회는 파토났고, 제국대장공주는 아들에게 가 버렸다. 다만 제국대장공주의 입장에서는, 다른 자리도 아니고 기껏 왕자를 낳고 자신을 위해 열린 연회에서 자신보다 지위도 낮은 전 여자와 같은 위치에 앉게 한다면 화가 날 만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에도 제국대장공주는 충렬왕에게 "정화궁주에게 가느냐"고 따지거나, 자신과 정화궁주의 시종 수를 비교하면서 질투하기도 했다.
1276년에는 누군가 "정화궁주가 무녀(巫女)를 시켜 제국대장공주를 저주하고 있다"는 헛소문을 퍼트려 정화궁주를 모함하기도 했다. 분노한 제국대장공주는 정화궁주를 감금했고, 정화궁주는 류경(柳璥)[2]의 도움으로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1284년에는 정화궁주가 소송에 휘말리는 사건이 있었다. 정화궁주는 일반 백성을 천민으로 잘못 알고 종으로 삼았는데, 이 백성은 불복하여 소송을 제기했다. 충렬왕의 지시로 정화궁주에게 유리한 판결이 났는데, 이 판결을 내린 관리가 판결 다음날 갑자기 의문사했다. 정화궁주를 공격했던 이행검(李行儉)만이 홀로 목숨을 건졌다. 참고로 이행검의 사위 기자오는 기황후의 친정 아버지였다.
이런 일들로 인해 정화궁주는 약 40여년 간 따로 떨어진 별궁에 거처했다. 이렇듯 정화궁주가 겪은 수모는, 당대 원나라 공주 출신 고려 왕비들의 횡포를 잘 보여준다.
충렬왕과의 사이에서 1남 2녀를 낳았다.
- 장남 : 강양공(江陽公) 왕자(王滋)
- 손자 : 연안군(延安君) 왕고(王暠)
- 장녀 : 정녕원비(靖寧院妃). 제안공의 후처.
- 차녀 : 명순원비(明順院妃)
[1] 원비는 고려의 후궁 제도에서 궁주(宮主)보다 한 단계 아래인 원주(院主)가 비(妃)일 경우에 부르는 호칭이다. 즉 궁주에서 원주로 하락했다는 소리가 된다.[2] 김준, 박송비와 같이 1258년 최의를 피살하고 최씨 무신정권을 끝낸 무오정변의 주역. 특이하게도 무신 집권기임에도 불구하고 김준 정권에서 무신이 아닌 문신 지도자였다. 비록 얼마 못 가 무신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 내려오게 되지만, 무신 집권기에 문신인 류경이 지도자에 오를 수 있던 것은 그만큼 무신들의 권력 기반이 최충헌과 최우 때에 비하면 많이 약해진 것. 김준도 무신 단독 지도자가 아닌 집단지도체제의 얼굴마담과 같은 형태였다.[3] 창건주가 자신의 소원을 빌거나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특별히 건립하는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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