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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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사망 | |
천수현 개국남(天水縣開國男) | |
은열(殷烈) | |
고려사에 따르면 진주(晉州) 진강현(晉康縣) 출신이며 나이나 아버지의 이름은 나와있지 않고 목종 연간에 과거에 급제했다.
1010~1011년 제2차 여요전쟁 시기에는 애수진장(隘守鎭將)이었다. 애수진은 지금의 함경남도 문천시 또는 고원군 인근이다. 이는 동북면의 지명이므로 통주 전투에서 고려군이 대패하자 동북계의 군대가 서경으로 전환 배치될 때 같이 서경으로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경 전투 중 동북면 군대가 궤멸하자 통군녹사 조원, 낭장 홍협(洪叶)·방휴(方休) 등과 함께 서경에 남아 조원을 병마사로 추대하고, 신사에 점을 쳐보니 길한 점괘를 얻었다며 병사와 백성들을 독려하고 서경을 끝까지 지켜내는 공로를 세웠다.#
1012년 문연(文演), 이인택, 조자기 등과 함께 해안 방어 부서인 도부서(都部署)의 일원으로서 동여진(東女眞)의 동남 지방(청하현, 영일현, 장기현) 침략을 막아내기도 했다.# 1016년 낭사, 즉 대간직인 내사사인이 되어 내사문하성에 들어갔다.#
1018~1019년 제3차 여요전쟁 시점에는 대장군이었다. 상원수 평장사 강감찬을 보좌하는 원수로서 삼교천 전투, 귀주 대첩에서 거란군을 무찔렀다.#
1019년 응양상장군 주국(柱國, 훈위)이 되고# 1020년(음력 1019년) 우산기상시가 되어 내사문하성 낭사의 최고위직에 오르고# 추성치리익대공신(推誠致理翊戴功臣)이 되었다.# 이어 (음력 1020년) 병부상서·지중추원사가 되었다.병부상서·지중추사
1021년 죽고# 태자태부가 추증되었다.# 1025년 강민첨의 아들 강단(姜旦)과 하공진의 아들에게 관직이 더해졌다.# 1046년 벽상공신이 되었다.#
1026년 세워진 천안봉선홍경사갈기비에 따르면 고려 현종이 아버지 안종을 기리기 위해 지은 홍경사(弘慶寺) 건설(1016~1021년)의 관료 측 감독관으로 김맹(金猛)과 함께 참여하였다. 여기에 나타나는 추증을 포함한 강민첨의 최종 관작은 추성치리익대공신(推誠致理翊戴功臣, 공신호) 금자흥록대부(金紫興祿大夫, 품계) 병부상서(兵部尙書, 관직)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관직) 겸태자태부(兼太子太傅, 명예직) 상주국(上柱國, 훈위) 천수현개국남(天水縣開國男, 작위) 식읍삼백호(食邑三百戶)이다.[4] 고려사(절요) 기록에는 금자흥록대부 품계, 상주국 훈위, 천수현 개국남 작위, 식읍이 누락되어 있다. 이것들이 생전에 주어진 것인지 사후 추증에 포함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또 최종적으로는 장군직을 모두 내려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010~1011년 제2차 여요전쟁 시기에는 애수진장(隘守鎭將)이었다. 애수진은 지금의 함경남도 문천시 또는 고원군 인근이다. 이는 동북면의 지명이므로 통주 전투에서 고려군이 대패하자 동북계의 군대가 서경으로 전환 배치될 때 같이 서경으로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경 전투 중 동북면 군대가 궤멸하자 통군녹사 조원, 낭장 홍협(洪叶)·방휴(方休) 등과 함께 서경에 남아 조원을 병마사로 추대하고, 신사에 점을 쳐보니 길한 점괘를 얻었다며 병사와 백성들을 독려하고 서경을 끝까지 지켜내는 공로를 세웠다.#
1012년 문연(文演), 이인택, 조자기 등과 함께 해안 방어 부서인 도부서(都部署)의 일원으로서 동여진(東女眞)의 동남 지방(청하현, 영일현, 장기현) 침략을 막아내기도 했다.# 1016년 낭사, 즉 대간직인 내사사인이 되어 내사문하성에 들어갔다.#
1018~1019년 제3차 여요전쟁 시점에는 대장군이었다. 상원수 평장사 강감찬을 보좌하는 원수로서 삼교천 전투, 귀주 대첩에서 거란군을 무찔렀다.#
1019년 응양상장군 주국(柱國, 훈위)이 되고# 1020년(음력 1019년) 우산기상시가 되어 내사문하성 낭사의 최고위직에 오르고# 추성치리익대공신(推誠致理翊戴功臣)이 되었다.# 이어 (음력 1020년) 병부상서·지중추원사가 되었다.병부상서·지중추사
1021년 죽고# 태자태부가 추증되었다.# 1025년 강민첨의 아들 강단(姜旦)과 하공진의 아들에게 관직이 더해졌다.# 1046년 벽상공신이 되었다.#
1026년 세워진 천안봉선홍경사갈기비에 따르면 고려 현종이 아버지 안종을 기리기 위해 지은 홍경사(弘慶寺) 건설(1016~1021년)의 관료 측 감독관으로 김맹(金猛)과 함께 참여하였다. 여기에 나타나는 추증을 포함한 강민첨의 최종 관작은 추성치리익대공신(推誠致理翊戴功臣, 공신호) 금자흥록대부(金紫興祿大夫, 품계) 병부상서(兵部尙書, 관직)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관직) 겸태자태부(兼太子太傅, 명예직) 상주국(上柱國, 훈위) 천수현개국남(天水縣開國男, 작위) 식읍삼백호(食邑三百戶)이다.[4] 고려사(절요) 기록에는 금자흥록대부 품계, 상주국 훈위, 천수현 개국남 작위, 식읍이 누락되어 있다. 이것들이 생전에 주어진 것인지 사후 추증에 포함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또 최종적으로는 장군직을 모두 내려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은열공 강선생 실기에 따르면 고려사(절요)나 금석문에 나타나지 않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음력 963년 11월 29일[5] 강주(康州, 진주의 옛 이름) 개경향(開慶鄕)에서 아버지 원윤[6] 강보능(姜甫能)과 어머니 거창 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는나이 15세(978년)까지는 향교를 다녔다.
음력 1005년 4월 고려 목종 문과에 급제했다.[7] 장사랑, 문림랑, 도교령 동정을 거쳐, 동북면의 안변도호부[8] 장서기(掌書記)로 일했다.
제2차 여요전쟁이 끝나고 음력 1011년 3월 이후 도관((都官)의 시원외랑(試員外郎)[9]에 제수되고 음력 8월 이후 안찰사(按察使)에 제수되었다.[10] 1017년 태복경에 제수되었다.[11]
은열사의 묘비에 따르면 1019년 응양상장군이 된 시점에 은청흥록대부(銀靑興祿大夫) 품계에 오르고 천수현 개국남(天水縣開國男)에 봉해져 식읍 300호를 받았다.# 음력 1020년 12월 17일 품계가 금자흥록대부(金紫興祿大夫)에 올랐다.
1021년 죽고 은열(殷烈)이라는 시호를 받아 진주 강씨 은열공파의 시조가 되었다.
오늘날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이티숲실길 42-18(구 감천동)에 묘소가 지어졌다. 글공부하던 경상남도 하동군의 우방산 아래 두방영당(斗芳影堂)이 세워졌다. 오늘날 경상남도 진주시의 옥봉산 아래 개경향(開慶鄕) 생가 터에 은열사(殷烈祠)가 세워졌다. 1968년 후손들이 청주 충현사를 세워 강감찬과 함께 위패를 두었다.
여기에 고려 현종이 강민첨을 문하시랑 평장사 수상(門下侍郎 平章事 首相)에 추증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천안봉선홍경사갈기비의 최종 관작과 교차검증되지 않는다.
음력 963년 11월 29일[5] 강주(康州, 진주의 옛 이름) 개경향(開慶鄕)에서 아버지 원윤[6] 강보능(姜甫能)과 어머니 거창 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는나이 15세(978년)까지는 향교를 다녔다.
음력 1005년 4월 고려 목종 문과에 급제했다.[7] 장사랑, 문림랑, 도교령 동정을 거쳐, 동북면의 안변도호부[8] 장서기(掌書記)로 일했다.
제2차 여요전쟁이 끝나고 음력 1011년 3월 이후 도관((都官)의 시원외랑(試員外郎)[9]에 제수되고 음력 8월 이후 안찰사(按察使)에 제수되었다.[10] 1017년 태복경에 제수되었다.[11]
은열사의 묘비에 따르면 1019년 응양상장군이 된 시점에 은청흥록대부(銀靑興祿大夫) 품계에 오르고 천수현 개국남(天水縣開國男)에 봉해져 식읍 300호를 받았다.# 음력 1020년 12월 17일 품계가 금자흥록대부(金紫興祿大夫)에 올랐다.
1021년 죽고 은열(殷烈)이라는 시호를 받아 진주 강씨 은열공파의 시조가 되었다.
오늘날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이티숲실길 42-18(구 감천동)에 묘소가 지어졌다. 글공부하던 경상남도 하동군의 우방산 아래 두방영당(斗芳影堂)이 세워졌다. 오늘날 경상남도 진주시의 옥봉산 아래 개경향(開慶鄕) 생가 터에 은열사(殷烈祠)가 세워졌다. 1968년 후손들이 청주 충현사를 세워 강감찬과 함께 위패를 두었다.
여기에 고려 현종이 강민첨을 문하시랑 평장사 수상(門下侍郎 平章事 首相)에 추증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천안봉선홍경사갈기비의 최종 관작과 교차검증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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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초상화 | 진주 은열사 초상화 |
강민첨 초상화는 보존을 위해 수 차례 옮겨 그려지거나 복사되었다. 그 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은 보물 제588호에 지정되었다.
[1] 율리우스력 12월 17일[2] 율리우스력 12월 18일[3] 강민첨과 강감찬은 같은 강(姜)씨지만, 강감찬의 본관은 금주(衿州)로 다르다. 강감찬의 집안은 "금천 강씨"로, 그의 5세조 강여청(餘淸)을 시조로 본다.[4] 이 중 태자태부는 사후 추증이 확실하기 때문에 이것이 홍경사 건설 당시의 관작이 아니라 사후 추증을 포함하여 최종적으로 정리된 관작임을 알 수 있다.[5] 프로필 표의 생년월일은 여기에 기반한 내용이다.[6] 元尹. 고려 향직 총 16관계 중 10위인 6품.[7] 이순신이 세는나이 32세에 급제한 것도 늦다고 하는데, 강민첨은 42세에 급제한 것이다.[8] 지금의 강원도 안변군[9] 도관은 노비 호적 및 소송을 담당하는 부서로 형부(刑部)의 하위 부서이다. 원외랑은 정6품인데 앞에 시(試)가 붙은 것은 정식 관직이 아니라 시범 임용이라는 뜻으로 오늘날 군대에서의 진급예정을 떠올리게 한다. 정식 관직의 업무를 보지만 실제 대우는 한 등급 낮다.[10] 고려 현종이 기존 절도사 제도를 폐지하며 새로 도입한 5도 양계의 직책이다. 조선 관찰사의 전신이다. 문종 연간에 잠깐 도부서(都部署)라는 이름으로 바뀐 적이 있었는데 원래 도부서는 해안 방어 부서를 가리키던 말이었다. 만약 이 가전 기록이 오류라면 동여진의 해안 침략을 막기 위해 도부서의 일원이 되었던 것이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1] 왕명 출납 및 의복, 수레와 말 등을 담당하는 직책. 이듬해 제3차 여요전쟁에서 활약한 중갑기병대를 꾸리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12] 2008년 초상화를 보수하다 기록을 발견했다.[13] 2005년 10월 영정을 모시는 감실의 뒤편에서 말려진 족자 형태로 발견되었다.[A] 14.1 14.2 생전의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는다.[16] <무인시대>에서 몽골 장수 카치운 역으로 나왔고,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서한수 역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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