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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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양충무왕(汾陽忠武王) 郭子儀 | 곽자의 | |
분양왕(汾陽王) | |
충무(忠武) | |
곽(郭) | |
자의(子儀) | |
부친 | 곽경지(郭敬之)[1] |
출생 | 화주(華州) 정현(鄭縣)[2] |
생몰 | 697년 ~ 781년 |
국적 | 당(唐) |
종교 | |
재임 | 당의 상서령 |
764년 | |
당의 태위 (1차) | |
764년 | |
당의 태위 (2차) | |
779년 ~ 781년 |
곽분양행락도[3] |
당 중기의 명장으로, 당대 손꼽히는 충신이자 권신. 분양(汾陽)[4] 군왕(郡王)으로 봉해져 곽분양이라고도 불린다.
수많은 전투의 승리로 인한 장군으로서의 드높은 공훈과 명성, 회흘과의 화친을 단독으로 성립시켰다는 외교적 공적, 문무 양면으로 중서령과 원수직에까지 오르는 데 성공한[5] 극에 달한 관운, 이성왕[6]이라는 작위, 수많은 숙장과 명장들과 쌓은 인맥[7]으로 이루어진 당대 최고의 명성과 위엄까지 모두 가졌던 인물. 그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곽자의가 출정했다는 소문이 돌자 저절로 무산된 반란도 있었을 정도였다.
거기다 여러 차례의 참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영달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한 처세술을 지녔고, 개인적으로도 16명에 달하는 자식[8]과 100여명에 달하는 손자들까지 두며 엄청난 부귀영화를 누렸으며, 다른 권신들처럼 토사구팽 당하지도 않고 천수를 누렸다. 그야말로 부와 명예, 장수까지 다 누린 인생승리자의 표본.
수많은 전투의 승리로 인한 장군으로서의 드높은 공훈과 명성, 회흘과의 화친을 단독으로 성립시켰다는 외교적 공적, 문무 양면으로 중서령과 원수직에까지 오르는 데 성공한[5] 극에 달한 관운, 이성왕[6]이라는 작위, 수많은 숙장과 명장들과 쌓은 인맥[7]으로 이루어진 당대 최고의 명성과 위엄까지 모두 가졌던 인물. 그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곽자의가 출정했다는 소문이 돌자 저절로 무산된 반란도 있었을 정도였다.
거기다 여러 차례의 참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영달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한 처세술을 지녔고, 개인적으로도 16명에 달하는 자식[8]과 100여명에 달하는 손자들까지 두며 엄청난 부귀영화를 누렸으며, 다른 권신들처럼 토사구팽 당하지도 않고 천수를 누렸다. 그야말로 부와 명예, 장수까지 다 누린 인생승리자의 표본.
자세한 내용은 곽자의/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
곽자의가 당대에 받은 평가는 구당서의 저런 표현에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 말 그대로 찬사 일색. 수많은 사람들이 사실상 그 홀로 나라를 지켜냈다고 평했으며, 당덕종은 그를 일컬어 힘써 하늘 기둥을 받쳤다고 평했다. 한마디로 말해 이미 생전부터 당나라판 이순신 정도로 찬양 받았다고 보면 된다. 실제로 사후에 받은 시호도 충무였고.[10]
곽자의는 또한 시성 이태백에게서 고평가를 받은 유일한 동시대 인물[11]로, 이태백은 그를 가리켜 '그는 전장에선 항상 노(勞)했고 평시에는 언제나 겸(謙) 하였다'며 '당의 시대에 등장한 모든 명성 높은 장군들을 가운데서도 곽자의는 홀로 돋보이는 인물'이란 평을 내렸다.[12] 가까운 시대 인물이라는 어드밴티지가 있긴 했으나 말 그대로 구국의 성웅 정도의 평을 받은 것.
게다가 보통 명장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다른 재주가 미비하여 빛이 바래는 경우가 많은데 곽자의는 정치외교력마저 뛰어난 만능형 장군이었는데다, 아무리 청렴결백한 명장도 군주와 간신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아 정치생명이 짧고 끝이 비참한 경우가 많은데 불구하고 곽자의는 전쟁 외적으로는 굽힐때 굽히고 숙일때 숙이며 엎드릴 때 납작 엎드려 화를 피할 줄아는 정치적 처세의 달인이었던 덕분에 그 많은 시기와 질투와 모함을 받고도 말년에까지 평온하고 부유하고 명예로운 삶을 살았고 죽은 후에도 명성을 유지하였다.
후대에는 아무래도 비슷한 인생('큰 공을 세우고' '그 공적으로 인해 국가의 최고위직에 오르며' '그 위치에서도 다른 마음을 품지 않고 진충보국했다')을 살았다는 것 때문인지 제갈량과 같이 묶여서 불리기도 했다. 이는 조선에서도 마찬가지로, 후술된 이순신의 시조 중엔 "恢復思諸葛(중원을 회복하던 제갈양이 생각나고), 長驅郭子儀(위기를 막아내던 곽자의가 그립구나)" 하는 대목이 있다. 그외에도 조선왕조실록에 찾아보면 간간히 곽자의의 이름이 거명되는 경우가 나오곤 한다.
다만 (지배층이 아닌) 민중들 사이에선 그런거 다 필요없고 오복[13]을 다 누린 인생의 승리자 정도로 여겨져 왔다. 같이 묶이던 제갈량과 비교해보면 지혜의 제갈량, 복락의 곽자의 정도로 대비된다.
또한, 곽자의는 민중들 사이에서 행복의 신인 복성(福星)으로 추양받으며, 쓰촨성에서는 재물의 신인 재신(財神)으로 추양받는다. 견우와 직녀의 바로 그 직녀를 만났다는 전설도 있는데, 젊은 시절 축제날에 내려온 직녀를 알아본 곽자의가 행복과 재물을 달라고 빌자 직녀가 그를 '행복과 재물의 신'으로 부르고 명예와 부귀를 얻게 될 것이라 약속했다는 이야기다. 또한 곽자의다손이라는 고사성어에서도 알 수 있듯 자식복을 내려주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또한 워낙에 다복을 누리고 살던 사람이다보니 '저 사람 참 복 받았네' 하는 걸 일컬어 곽분양팔자라는 말도 생겨났다. 뜻은 당연히 곽자의의 팔자라는 것.
곽자의의 관록을 현대로 비교하면 50대에 변방에서 준장했던 장성이 외적의 침략과 내란을 슬기롭게 진압하여 10년내 대장에서 육참총장 합참의장 국방부 장관 국가안보실장 국정원장 감사원장 국무총리까지 역임하고 80대에 최고 명예직인 원수계급에 오른 것과 다름 없었다.[14]
한편, 그는 통칭 삭방군 인맥의 알파이자 오메가이기도 하다. 삭방군 인맥이란 이 시기에 나라를 지켜내는데 큰 공을 세운 삭방진 출신 인물들이 군권에 형성한 인맥 집단을 일컫는데, 실제로 이때에 삭방진(안사의 난 이후 삭방진을 여럿 갈라서 빈녕, 경원, 부원진을 설치하고 절도사를 두었으니 이쪽까지 포함) 출신으로 나라에 큰 군공을 세우고 재상직까지 오른 인물들이 대단히 많았으며 그들 대다수가 곽자의의 휘하에서 성장했다. 이때문에 자치통감에는 그가 거느렸고 그를 보좌하였던 사람들 가운데 대관에 이르고 유명한 대신이 된 사람이 아주 많았다.는 말로 이를 정리하고 있다. 또한 중국 종교사에도 영향을 미친 인물. 곽자의 본인은 경교(중국에서 현지화된 네스토리우스교)를 믿지 않았으나 경교를 후원했고, 여기에 힘입어 부장 중의 한 명이었던 이사(伊斯, 'Issac'의 음차라는 설이 있다.)를 비롯한 인사들이 당 덕종의 후원을 얻을 수 있었다. 가장 잘 알려진 결과물이 바로 781년 세워진 대진경교유행중국비. 이로 인해 경교는 측천무후 시기 불교의 성장으로 인한 상대적인 위축과 당 무종의 외래 종교 탄압 조치에 따른 퇴출 사이에서 가장 많은 후원을 받는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워낙에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다보니 그에 따른 전설도 다수 존재한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젊은 시절 직녀를 만나 부귀와 복락과 장수를 약속 받았다는 이야기.
또한 그의 부귀함은 너무나도 유명하여 신당서에서는 "친인리(親仁里, 장안의 방리 가운데 하나)의 1/4을 차지하고 부지 안에도 긴 골목이 지나갔으며, 항시 3,000여 명의 가인(家人)이 드나들었음에도 너무도 넓었기에 곽자의가 어느 건물에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하사받은 전답과 아름다운 기물, 이름난 정원과 저택의 수는 셀 수도 없었다. 대종이 그의 이름(휘)를 입에 담지 않고 늘 「대신(大臣)」으로 불렀으며, 몸으로 천하의 안위를 다하기를 20년이었고 그 사이에 《중서령고(中書令考)》 24편을 지었다. 8명의 자식과 7명의 사위가 모두 조정에서 귀하고 현달하였는데, 내손(內孫, 친손자)과 외손 합쳐 수십 인에 이르러, 모두의 얼굴과 이름조차 다 기억하지 못해 문안드리러 왔을 때조차 그저 『오냐오냐』하고 끄덕일 뿐이었다."고 적고 있으며, 구당서에서도 "권세가 천하를 기울일 만 하였음에도 조정은 그를 꺼리지 않았고, 공적은 한 시대를 덮었음에도 주군은 의심하지 않았으며, 그의 사치함이 사람의 욕망을 다하였음에도 군자들은 이를 죄라 하지 않았다." 라고 적고 있다.[15]
야사에 따르면 키가 2m에 달했다고 하는데 이에 당 조정에서는 키가 3m에 달하는 명마를 줬다고도 한다. 다만 이 시기 대부분의 말들은 지금처럼 개량에 개량을 거듭한 종마들이 아니라 대부분이 그냥 조랑말이었다. 애초에 일반 향리들은 노새나 당나귀 정도 타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물론 이 시기에도 중앙아시아산 한혈마나 만주산 일부 품종은 덩치가 크긴 했으니, 그런 말을 구해서 준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다 떠나서 곽자의 키가 2m였다고 구라치는 야사다
한편, 한국에선 곽자의의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매우 떨어지는 편이다. 삼국지, 초한지 등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인지 이 시대 인물들에 비하면 과장 좀 섞어 거의 듣보잡 신세. 기실 중국의 초한 생성시대나 위촉오시대가 초한지, 삼국지 등의 문학을 통해 잘 알려진 반면에 당나라 쪽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다보니 일어난 일인듯 하다.
안사지란 평정 이후, 가서한의 무고로 죽은 안사순의 누명을 벗길 것을 청하였고 안사순은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16][17]
후손들은 곽자의를 당대의 또다른 명장 곽원진, 북송의 명장 곽규와 함께 삼곽이라고 하였다. 한편 그의 먼 후손 곽간 (郭侃)은 금나라를 거쳐 몽골 제국의 장수가 되어 바그다드를 함락, 압바스 왕조를 멸하고 몽골령 바그다드의 첫 총독이 되었다.
한국의 청주시(상당) 곽씨는 곽자의의 후손을 자처한다. 그 외 중국에서 곽자의의 후손으로 유명한 인물은 곽보옥과 그의 아들 곽덕해, 손자 곽간이 있는데 곽보옥은 칭기즈 칸의 휘하 장군이 되어 칭기즈 칸을 보좌해 중국 정벌의 계책을 올렸고 금나라, 서요, 호라즘 정복에 참가했고, 곽간은 쿠빌라이 칸을 도와 양양을 공격해 남송 정벌에 공을 세운다.
뜬금없이 주성치 주연의 영화 도학위룡에 곽자의의 이름이 언급된다. 학생으로 위장한 주성치가 시험문제를 풀다가 안사의 난을 진압한 자가 누구인가라는 문제에 바깥에 수위로 위장한 오맹달에게 답을 묻는다. 그러자 외부에 주성치의 동료 경찰들과 상관들도 답을 몰라 각자 곽자의, 이광필에서 심지어 황소의 난때 인물인 주전충까지 튀어나온다.
시호가 충무공이었다. 헌데 우연의 일치인지 훗날 같은 시호를 받게 되는 이순신도 난중일기에서 곽자의를 언급한 바 있다. 1594년(갑오일기) 11월 28일의 끝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의 부귀함은 너무나도 유명하여 신당서에서는 "친인리(親仁里, 장안의 방리 가운데 하나)의 1/4을 차지하고 부지 안에도 긴 골목이 지나갔으며, 항시 3,000여 명의 가인(家人)이 드나들었음에도 너무도 넓었기에 곽자의가 어느 건물에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하사받은 전답과 아름다운 기물, 이름난 정원과 저택의 수는 셀 수도 없었다. 대종이 그의 이름(휘)를 입에 담지 않고 늘 「대신(大臣)」으로 불렀으며, 몸으로 천하의 안위를 다하기를 20년이었고 그 사이에 《중서령고(中書令考)》 24편을 지었다. 8명의 자식과 7명의 사위가 모두 조정에서 귀하고 현달하였는데, 내손(內孫, 친손자)과 외손 합쳐 수십 인에 이르러, 모두의 얼굴과 이름조차 다 기억하지 못해 문안드리러 왔을 때조차 그저 『오냐오냐』하고 끄덕일 뿐이었다."고 적고 있으며, 구당서에서도 "권세가 천하를 기울일 만 하였음에도 조정은 그를 꺼리지 않았고, 공적은 한 시대를 덮었음에도 주군은 의심하지 않았으며, 그의 사치함이 사람의 욕망을 다하였음에도 군자들은 이를 죄라 하지 않았다." 라고 적고 있다.[15]
야사에 따르면 키가 2m에 달했다고 하는데 이에 당 조정에서는 키가 3m에 달하는 명마를 줬다고도 한다. 다만 이 시기 대부분의 말들은 지금처럼 개량에 개량을 거듭한 종마들이 아니라 대부분이 그냥 조랑말이었다. 애초에 일반 향리들은 노새나 당나귀 정도 타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물론 이 시기에도 중앙아시아산 한혈마나 만주산 일부 품종은 덩치가 크긴 했으니, 그런 말을 구해서 준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한편, 한국에선 곽자의의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매우 떨어지는 편이다. 삼국지, 초한지 등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인지 이 시대 인물들에 비하면 과장 좀 섞어 거의 듣보잡 신세. 기실 중국의 초한 생성시대나 위촉오시대가 초한지, 삼국지 등의 문학을 통해 잘 알려진 반면에 당나라 쪽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다보니 일어난 일인듯 하다.
안사지란 평정 이후, 가서한의 무고로 죽은 안사순의 누명을 벗길 것을 청하였고 안사순은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16][17]
후손들은 곽자의를 당대의 또다른 명장 곽원진, 북송의 명장 곽규와 함께 삼곽이라고 하였다. 한편 그의 먼 후손 곽간 (郭侃)은 금나라를 거쳐 몽골 제국의 장수가 되어 바그다드를 함락, 압바스 왕조를 멸하고 몽골령 바그다드의 첫 총독이 되었다.
한국의 청주시(상당) 곽씨는 곽자의의 후손을 자처한다. 그 외 중국에서 곽자의의 후손으로 유명한 인물은 곽보옥과 그의 아들 곽덕해, 손자 곽간이 있는데 곽보옥은 칭기즈 칸의 휘하 장군이 되어 칭기즈 칸을 보좌해 중국 정벌의 계책을 올렸고 금나라, 서요, 호라즘 정복에 참가했고, 곽간은 쿠빌라이 칸을 도와 양양을 공격해 남송 정벌에 공을 세운다.
뜬금없이 주성치 주연의 영화 도학위룡에 곽자의의 이름이 언급된다. 학생으로 위장한 주성치가 시험문제를 풀다가 안사의 난을 진압한 자가 누구인가라는 문제에 바깥에 수위로 위장한 오맹달에게 답을 묻는다. 그러자 외부에 주성치의 동료 경찰들과 상관들도 답을 몰라 각자 곽자의, 이광필에서 심지어 황소의 난때 인물인 주전충까지 튀어나온다.
시호가 충무공이었다. 헌데 우연의 일치인지 훗날 같은 시호를 받게 되는 이순신도 난중일기에서 곽자의를 언급한 바 있다. 1594년(갑오일기) 11월 28일의 끝에 기록되어 있다.
蕭望쓸쓸히 바라보며蕭蕭風雨夜 부슬부슬 비바람 (흩내리는) 밤
耿耿不寐時 (마음이) 초조하여 잠 못 이룰 때
傷心如裂膽 아픈 가슴은 쓸개가 찢어진 듯하고
懷痛似割肌 회한과 쓰라림은 살을 에는 듯하구나
長嘆更長嘆 긴 한숨만 거듭 짓고
淚垂又淚垂 눈물만 자꾸 흐르네
懷痛如摧膽 쓸개가 잘린 쓰라린 가슴이여
傷心似割肌 살을 에는 듯 쓰린 마음이여
山河帶慘色 산하는 참혹한 빛을 띠고
魚鳥亦吟悲 물고기와 새들도 슬피 우누나
昇平二百載 평화가 이백 년에 걸치고
文物三千姿 문물은 삼천 종에 이르는데
國有蒼皇勢 나라가 갈팡질팡한 지경에 있으니
人無任轉危 위기를 되돌릴 만한 사람이 없구나
經年防備策 여러 해 동안 막을 계책 세우노라니
恢復思諸葛 (중원을) 다시 돌이키(려 했)던 제갈(공명)이 떠오르고
長驅慕子儀 널리 (위기를) 몰아낸 (곽)자의가 그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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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758년 기국정의공(祁國貞懿公)으로 추봉.[2] 현 산시(섬서)성 웨이난시[3] 부귀와 영화를 누리라는 뜻으로 선물하던 그림이었다고 한다. 민간에서 곽자의가 어떤 이미지로 통용되었는지 추론할 수 있는 부분. 참고로 국립민속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등에 같은 내용의 그림이 존재한다.[4] 현 산시성(山西省).[5] 당나라는 관례적으로 상서령을 임명하지 않는다. 이는 당태종이 상서령을 맡았었기 때문. 따라서 당에서 중서령이면 다른 나라/시대에서의 상서령과 똑같이 비황족 일반 신하로서 오를수 있는 최고봉이다. 심지어 공이 엄청나다 보니 아예 황제인 당대종이 상서령 한번 해보는 게 어떻냐는 식으로 먼저 제안한 적도 있을 정도다. 이게 농담이든 진심이든 간에 그 당시 그가 보인 업적은 황제가 이 말을 하기 거리낌없을 정도로 엄청났다는 것이다.[6] (국성과) 성씨가 다른 자, 곧 황족이 아닌 자에게 봉해지는 왕작. 중앙집권이 확립된 이래 '황족이 아니면서' & '생전에' & 자칭이 아닌 '천자로부터 직접' 왕작에 봉해진 경우는 중국사 전체에서도 손에 꼽는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위무제 조조, 진문제 사마소, 송무제 유유, 제고제 소도성, 양무제 소연, 진무제 진패선도 한때 이성왕이기는 했으나 사실상 망하기 직전인 막장 왕조의 절대권력자로서 국공 작위를 셀프로 승급시킨 것에 지나지 않았고 결국 본인이나 그 아들이 제위를 찬탈해 왕작 자체가 의미없게 되었다.[7] 수많은 당말의 장수들(신당서에 따르면 곽자의 휘하의 장수들 중 60여 명이 높은 장수 또는 재상직에 올랐다고 한다.)이 곽자의 휘하에서 성장했다. 말 그대로 당대 군부의 큰형님. 곽자의의 위상이 너무나도 높다보니 이들이 왕후나 재상이 되었어도 곽자의 앞에서는 부곡이나 다름없었다고.[8] 아들 8명, 딸 8명.[9] 당 황실은 스스로 오행 중 토(土)의 기운을 이어받았다고 자평한다. 그래서 토덕.[10] 생전 작위가 분양왕(汾陽王)이라 최종적인 호칭은 '분양 충무왕(汾陽 忠武王)'이다.[11] 이태백은 황실의 어용시인 시절에 황가 인물들을 빨아준 것 빼곤 그 어떤 인물도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12] 물론 이 둘은 이태백이 곽자의를 변호해준 이후 친분을 가지기도 했고 그후 안사의 난땐 반대로 억울하게 죽을뻔한 이태백을 전력으로 변호해서 구해주기도 했던게 곽자의긴 했다. 즉 인간관계에 냉혹했던 이태백과 가까이 지낸 몇안되는 인물이었던 것.[13] 서경에는 수(장수), 부, 강령(몸과 마음의 건강), 유호덕(도덕적인 삶), 고종명(제 명을 다하고 편히 죽는 것)을 오복이라고 일컬으며, 서민들 사이에선 치아 건강, 자식 복, 부부의 백년해로, 손님을 대접할 재산, 그리고 명당자리에 묻히는 걸 오복이라고 보았다 한다. 어느 쪽의 오복이 됐던 대부분을 누리긴 한 사람이다.[14] 다만 이렇게 보면 출세는 꽤 늦었다. 당시 관점으로 50대면 보통 사망하는 나이대다. 현대와 비교하면야 정상적인 출세지만 그래도 지금은 60은 보장되는 시대고 전쟁이 잘 없는 시대라 그렇지 당시로선 50도 못사는 사람도 많은 시대에서 50대 준장급은 출세가 늦다고 할 수 있다.[15] 사실 저렇게 사치를 즐기는 것이 오히려 좋을 수도 있다. 곽자의 정도의 명성이면 당연히 온갖 모함 당하기 딱 좋은 상황인데 저렇게 사치를 즐기면 '나는 권력이고 뭐고 부귀영화면 충분한 사람' 이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 이미 전국시대 말기에 왕전이 진시황에게 그런 의도로 몇번이고 보상을 요구했고 소하나 난릉왕도 이를 따라한 바 있다. 단 두 사람은 어설펐던지라 역풍만 맞았다...[16] 삭방군은 안사지란 평정에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17] 『전당문』의 「대곽영공청설안사순표」에 곽자의가 안사순의 누명을 벗겨 줄 것을 청하는 내용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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