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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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장군 張守珪 | 장수규 | |
이름 | 장수규(張守珪) |
자 | 원보(元寶) |
부친 | 장의복(張義福) |
출생 | 684년 ~ 740년 |
출신 | 합주(陜州) 하북현(河北縣) |
국적 | 당(唐) |
당나라 중기의 장군으로 자는 원보(元寶)이다.
합주 하북현 출신으로, 우람한 체격에 강직한 성품과 절의를 지니고 있었고 말 타기와 활쏘기에 뛰어났다.
장수규는 처음에 전공을 세워 평락부(平樂府) 별가로 제수되었고, 뒤에 곽건관을 따라 북정도호부에 진수하였다. 돌궐이 북정도호부를 침공하자, 장수규는 천여 명의 수급을 베고 지휘관 1명을 사로잡는 성과를 올렸다. 개원 연간에 돌궐이 다시 북정도호부를 침공하자, 장수규는 군대를 이끌어 돌궐을 물리쳤고, 유격장군이 되었으며, 유주 양사부(良社府) 과의(果毅)로 전임되었다. 장수규는 유주에서 당시 자사였던 노제경(盧齊卿)으로부터 예우를 받았고 그의 자손들을 부탁받았다. 장수규는 뒤에 거듭 좌금오원외장군(左金吾員外將軍)으로 전임되었고, 하서 절도사 산하의 건강군사(建康軍使)가 되었다.
727년, 토번 제국이 하서 지역의 과주(瓜州)를 함락시키고 왕군착이 전사하여, 하서 일대가 티베트를 두려워하자, 장수규는 소숭에 의해 과주 자사, 묵리군사(墨離軍使)로 등용되어 티베트를 방비하였다. 장수규는 공성계를 통해 티베트를 물리쳤고, 728년과 729년에도 여러 차례 토번을 격파하는 전공을 세워 은청광록대부가 되었으며, 과주는 도독부로 승격되어 과주 도독이 되었다.
733년, 장수규는 다시 유주로 복귀하여, 유주 장사 겸 어사중승, 영주(營州) 도독, 하북 절도부대사로 전임되었고, 이윽고 다시 하북 채방처치사(采訪處置使)가 더해졌다. 당시 거란과 해족이 변방을 침범하였는데, 특히 거란의 가돌간(可突幹)은 뛰어난 군략의 소유자였다. 장수규는 가돌간의 침공을 여러 차례 물리쳐 그를 두렵게 만들었는데, 가돌간은 사신을 보내 장수규에게 거짓으로 항복하다. 하지만 장수규는 가돌간의 거짓 항복을 이미 간파하였고, 이를 역이용하여 가돌간을 도모하기 위해 왕회(王悔)를 가돌간에게 파견한다. 가돌간은 돌궐을 끌어들여 왕회를 제거하려고 하였지만 내부에서 이과절(李過折)과 의견 충돌이 일어났고, 왕회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이과절을 끌어들였다. 이과절의 도움을 얻은 장수규는 가돌간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장수규는 가돌간을 물리친 공으로, 보국대장군, 우우림대장군 겸 어사대부가 되었다.
여기까지는 그야말로 상승가도를 달렸으나, 장수규는 단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그동안 쌓았던 명예를 모두 잃어버리게 된다.
738년, 장수규의 부하인 조감(趙堪)과 백진타라(白眞陁羅) 등이 장수규의 명령이라며 평로군(平盧軍) 절도사 오지의(烏知義)를 핍박하여 황수(湟水) 북쪽에서 반란을 일으킨 해족과 맞서도록 한다. 해족과의 전투는 처음에 당나라가 승리했으나 그 다음은 패전하는 결과가 나왔는데, 장수규는 패전 사실을 숨기고 승전을 했다고 허위 보고하였다. 나중에 이 사실이 드러나자, 현종은 이에 대한 조사를 우선동에게 명령하였다. 하지만 장수규는 우선동에게 뇌물을 주어 우선동을 속였고, 백진타라에게 자살을 강요하여 그를 죽음으로 내몬다. 이윽고 우선동이 장수규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사실과 그 동안의 정황이 모두 드러났지만, 현종은 장수규가 예전에 세웠던 전공을 생각하여 그를 괄주(括州) 자사로 좌천시켰다.[1] 장수규는 결국 좌천된 이후 부끄러움과 분함에 등창이 생겨 740년에 세상을 떠났고, 양주 도독으로 추증되었다.
장수규는 처음에 전공을 세워 평락부(平樂府) 별가로 제수되었고, 뒤에 곽건관을 따라 북정도호부에 진수하였다. 돌궐이 북정도호부를 침공하자, 장수규는 천여 명의 수급을 베고 지휘관 1명을 사로잡는 성과를 올렸다. 개원 연간에 돌궐이 다시 북정도호부를 침공하자, 장수규는 군대를 이끌어 돌궐을 물리쳤고, 유격장군이 되었으며, 유주 양사부(良社府) 과의(果毅)로 전임되었다. 장수규는 유주에서 당시 자사였던 노제경(盧齊卿)으로부터 예우를 받았고 그의 자손들을 부탁받았다. 장수규는 뒤에 거듭 좌금오원외장군(左金吾員外將軍)으로 전임되었고, 하서 절도사 산하의 건강군사(建康軍使)가 되었다.
727년, 토번 제국이 하서 지역의 과주(瓜州)를 함락시키고 왕군착이 전사하여, 하서 일대가 티베트를 두려워하자, 장수규는 소숭에 의해 과주 자사, 묵리군사(墨離軍使)로 등용되어 티베트를 방비하였다. 장수규는 공성계를 통해 티베트를 물리쳤고, 728년과 729년에도 여러 차례 토번을 격파하는 전공을 세워 은청광록대부가 되었으며, 과주는 도독부로 승격되어 과주 도독이 되었다.
733년, 장수규는 다시 유주로 복귀하여, 유주 장사 겸 어사중승, 영주(營州) 도독, 하북 절도부대사로 전임되었고, 이윽고 다시 하북 채방처치사(采訪處置使)가 더해졌다. 당시 거란과 해족이 변방을 침범하였는데, 특히 거란의 가돌간(可突幹)은 뛰어난 군략의 소유자였다. 장수규는 가돌간의 침공을 여러 차례 물리쳐 그를 두렵게 만들었는데, 가돌간은 사신을 보내 장수규에게 거짓으로 항복하다. 하지만 장수규는 가돌간의 거짓 항복을 이미 간파하였고, 이를 역이용하여 가돌간을 도모하기 위해 왕회(王悔)를 가돌간에게 파견한다. 가돌간은 돌궐을 끌어들여 왕회를 제거하려고 하였지만 내부에서 이과절(李過折)과 의견 충돌이 일어났고, 왕회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이과절을 끌어들였다. 이과절의 도움을 얻은 장수규는 가돌간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장수규는 가돌간을 물리친 공으로, 보국대장군, 우우림대장군 겸 어사대부가 되었다.
여기까지는 그야말로 상승가도를 달렸으나, 장수규는 단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그동안 쌓았던 명예를 모두 잃어버리게 된다.
738년, 장수규의 부하인 조감(趙堪)과 백진타라(白眞陁羅) 등이 장수규의 명령이라며 평로군(平盧軍) 절도사 오지의(烏知義)를 핍박하여 황수(湟水) 북쪽에서 반란을 일으킨 해족과 맞서도록 한다. 해족과의 전투는 처음에 당나라가 승리했으나 그 다음은 패전하는 결과가 나왔는데, 장수규는 패전 사실을 숨기고 승전을 했다고 허위 보고하였다. 나중에 이 사실이 드러나자, 현종은 이에 대한 조사를 우선동에게 명령하였다. 하지만 장수규는 우선동에게 뇌물을 주어 우선동을 속였고, 백진타라에게 자살을 강요하여 그를 죽음으로 내몬다. 이윽고 우선동이 장수규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사실과 그 동안의 정황이 모두 드러났지만, 현종은 장수규가 예전에 세웠던 전공을 생각하여 그를 괄주(括州) 자사로 좌천시켰다.[1] 장수규는 결국 좌천된 이후 부끄러움과 분함에 등창이 생겨 740년에 세상을 떠났고, 양주 도독으로 추증되었다.
- 장수규와 관련된 인물 중 중요한 인물이 있는데 바로 안록산이다. 장수규가 유주 절도사로 있을 때, 안록산이 양을 훔친 사실이 드러났다. 장수규는 안록산을 때려죽이려고 하였지만 안록산의 일갈을 듣고는 그의 일갈을 가상하게 여기고 풀어주었다. 그뒤 안록산은 장수규의 부하가 되었다. 장수규는 안록산의 체중이 비대한 것을 싫어하여 안록산에게 음식을 주지 않았다. 안록산은 장수규를 두려워하였고, 이후 용맹함을 떨쳐서 장수규의 양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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