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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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장군 평양소정공(平陽昭定公) 薛訥 | 설눌 | |
평양군공(平陽郡公) | |
시호 | 소정(昭定) |
성 | 설(薛) |
이름 | 눌(訥) |
자 | 신언(愼言) |
출신 | 강주(絳州) 만천현(萬泉縣)[1] |
부친 | 설인귀(薛仁貴) |
생몰년도 | 649년 ~ 720년 |
강주(絳州) 만천현(萬泉縣) 출신으로 649년에 설인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설눌은 성문랑(城門郎)으로 시작하여 뒤에 남전현령(藍田縣令)을 지냈다. 남전현령을 맡을 당시 어사대에서 사채를 정리하고 어사중승 내준신(來俊臣)에게 뇌물을 바친 예씨(倪氏)라는 재력가가 있었다. 내준신이 의창의 쌀곡식 수천 섬을 몰래 내놓자, 설눌은 내준신의 위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내준신의 의견을 거절했다. 이후 내준신은 죄를 받아 투옥되어 죽었다.
698년에 돌궐 제2제국의 묵철가한이 하북(河北)을 침공하자 측천무후는 설눌을 좌무위위장군(左武威衛將軍), 안동도경략(安東道經略)으로 발탁하였다. 이윽고 유주 도독 겸 안동도호(安東都護)가 되었다. 이후 병주 대도독부 장사로 전임되었고 검교좌위대장군(檢校左衛大將軍)을 겸임하였다.
이후 713년에 현종이 신풍(新豊)에서 군사를 훈련시켰는데, 설눌은 당시 좌군절도를 맡았다. 당군의 군용이 단정하지 못하자 현종은 격노하여 병부상서 곽원진을 유배시키고, 급사중 당소(唐紹)를 죽였다. 여러 군마가 놀라 대열이 흐트러졌으나, 설눌과 해완 두 사람이 이끄는 병마만 요지부동이었다. 현종은 경기병들을 보내 설눌을 불러 설눌의 군영(軍營)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설눌이 이끄는 군은 엄정하여 사자의 임의로 군영에 들어가는 것을 엄금하였다. 현종은 크게 칭찬하고, 특별히 위로하며 설눌에게 주아부의 기풍이 있다고 극찬하였다.
설눌은 성문랑(城門郎)으로 시작하여 뒤에 남전현령(藍田縣令)을 지냈다. 남전현령을 맡을 당시 어사대에서 사채를 정리하고 어사중승 내준신(來俊臣)에게 뇌물을 바친 예씨(倪氏)라는 재력가가 있었다. 내준신이 의창의 쌀곡식 수천 섬을 몰래 내놓자, 설눌은 내준신의 위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내준신의 의견을 거절했다. 이후 내준신은 죄를 받아 투옥되어 죽었다.
698년에 돌궐 제2제국의 묵철가한이 하북(河北)을 침공하자 측천무후는 설눌을 좌무위위장군(左武威衛將軍), 안동도경략(安東道經略)으로 발탁하였다. 이윽고 유주 도독 겸 안동도호(安東都護)가 되었다. 이후 병주 대도독부 장사로 전임되었고 검교좌위대장군(檢校左衛大將軍)을 겸임하였다.
이후 713년에 현종이 신풍(新豊)에서 군사를 훈련시켰는데, 설눌은 당시 좌군절도를 맡았다. 당군의 군용이 단정하지 못하자 현종은 격노하여 병부상서 곽원진을 유배시키고, 급사중 당소(唐紹)를 죽였다. 여러 군마가 놀라 대열이 흐트러졌으나, 설눌과 해완 두 사람이 이끄는 병마만 요지부동이었다. 현종은 경기병들을 보내 설눌을 불러 설눌의 군영(軍營)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설눌이 이끄는 군은 엄정하여 사자의 임의로 군영에 들어가는 것을 엄금하였다. 현종은 크게 칭찬하고, 특별히 위로하며 설눌에게 주아부의 기풍이 있다고 극찬하였다.
이후 거란(契丹)과 해(奚)가 돌궐(突厥)과 연합하여 여러 차례 침략을 해오자, 설눌은 군대를 내어 이를 토벌하기를 주청하였다. 현종은 설눌의 주청에 찬동하여 714년, 설눌과 좌감문장군(左監門將軍) 두빈객(杜賓客), 정주(定州) 자사 최선도(崔宣道) 등에게 2만 군대를 이끌고 단주도(檀州道)로 출병하여 거란 등을 토벌하도록 명하였다. 하지만 당시 무더운 여름 날씨에 무기를 든 장병들이 곡식을 들고 적지로 들어가기 힘들다는 게 두빈객 등의 생각이었다. 중서령 요원숭(姚元崇)도 두빈객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러나 설눌은 두빈객의 의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름에는 풀이 무성하여 송아지가 생식할 때에는 양식을 소비하지 않고도 점점 진군할 수 있습니다. 나라의 위령을 한방에 떨쳐버릴 기회이니 이를 놓칠 수 없사옵니다.
하지만 신하들은 여전히 출병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여겼다.
현종은 처음에 설눌의 의견을 받아들여 설눌을 동자미황문삼품(同紫微黃門三品)으로 삼았고 해와 거란을 정벌하게 하였지만 이는 신하들의 논의와 대치되는 것이었다. 6월에 설눌이 난하(灤河)에 이르자 거란은 복병을 일으켜 앞을 막고 뒤에서 아래로 공격하였는데, 당시 날씨가 엄청 더웠기 때문에 설눌의 군대가 패배하였다. 설눌은 수십 기마와 함께 포위를 뚫어 거란 사람들로부터 설할머니[2]라는 놀림을 받았다. 최선도는 후군을 이끌었으나 제때 지원하지 못하였고, 설눌이 이끄는 군이 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에 철군하였다.
전후 설눌은 최선도, 이사경 등 8명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 현종은 이들을 유주(裕州)에서 처형시켰고, 설눌은 사형을 내리지 않고 관직을 삭탈하여 서민으로 만들었으며, 두빈객을 사면하였다.
현종은 처음에 설눌의 의견을 받아들여 설눌을 동자미황문삼품(同紫微黃門三品)으로 삼았고 해와 거란을 정벌하게 하였지만 이는 신하들의 논의와 대치되는 것이었다. 6월에 설눌이 난하(灤河)에 이르자 거란은 복병을 일으켜 앞을 막고 뒤에서 아래로 공격하였는데, 당시 날씨가 엄청 더웠기 때문에 설눌의 군대가 패배하였다. 설눌은 수십 기마와 함께 포위를 뚫어 거란 사람들로부터 설할머니[2]라는 놀림을 받았다. 최선도는 후군을 이끌었으나 제때 지원하지 못하였고, 설눌이 이끄는 군이 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에 철군하였다.
전후 설눌은 최선도, 이사경 등 8명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 현종은 이들을 유주(裕州)에서 처형시켰고, 설눌은 사형을 내리지 않고 관직을 삭탈하여 서민으로 만들었으며, 두빈객을 사면하였다.
714년 8월 토번의 장수 분달연(坌達延)과 걸력서(乞力徐) 등이 10만 군대를 이끌어 임조군(臨洮軍)을 침공하고, 다시 난주(蘭州)와 위주(渭州)의 위원현(渭源縣)을 공격하여 목마를 약탈해 갔다. 현종은 토번에 대항하고자 설눌에게 백의종군을 명하고 설눌을 좌우림장군, 농우방어사로 삼았으며 태복소경 왕준 등을 거느리고 토번군을 요격하도록 명하였다.
10월, 토번이 다시 위원을 공격한다. 같은 달 초이틀에 현종은 조서를 내려 어가를 친정하고 10여만 명, 말 4만 필을 발병하여 토번을 맞이했다. 설눌은 무계역[3]에서 토번군에 대항하였다. 왕준은 2천 병마를 이끌고 20리 떨어진 대래곡구(大來谷口)를 습격해 설눌 대군과 맞섰다. 토번대장은 이곳에 10만 병마가 주둔해 있다. 왕준은 7백 용사를 선발하여 토번군을 야습하게 하였는데, 토번군은 당군의 주력으로 착각하고 겁에 질려 1만여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왕준 등은 승리한 뒤 곧바로 무가역(武街驛)을 지휘했다. 장사는 밤을 틈타 토번군을 기습했다. 토번 대군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설눌 역시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와 앞뒤로 협공하여 토번군을 크게 물리쳤다. 분달연은 잔부를 이끌고 조수[4]로 달아났고, 설눌은 당군을 지휘하여 바짝 추격하여 쌍방이 장성보[5]에서 격전하였는데, 당군은 다시 토번군을 대파하고 만 칠천여 급을 참수하여 소와 양 120만 마리를 노획하였다. 토번군이 배수진을 치고 결사항쟁하였다. 설눌군의 선봉, 태자 우위솔, 풍안군의 사랑장 왕해빈(王海賓)이 겹치자, 당나라의 무장들이 그의 전공을 질시하여 증원하지 않아 왕해빈이 힘써 싸우다가 죽었다. 설눌은 주전을 이끌고 달려왔다. 여세를 몰아 토번군은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시체가 도처에 널려 있고, 타오르는 물이 흐르지 않아 토번 장수 육지향 미홍이 생포되었다. 당군은 탈양마를 모두 거두어들였고, 또한 무수한 기구를 노획하였다. 당나라는 십여 년 동안 옳다고 인정함으로 대토번전에서 최대의 승리를 거두었다. 현종은 설눌 등이 크게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친정을 중단하였다. 또한 자미사인 예약수(倪若水)를 전선으로 파견하여 여러 장수들의 공훈을 기록하였다.
전후 설눌은 공을 세워 좌우림군대장군(左羽林軍大將軍)으로 임명되었고 다시 평양군공(平陽郡公)으로 책봉되었다. 또한 아들인 설창(薛暢)을 조산대부로 임명하였다.
10월, 토번이 다시 위원을 공격한다. 같은 달 초이틀에 현종은 조서를 내려 어가를 친정하고 10여만 명, 말 4만 필을 발병하여 토번을 맞이했다. 설눌은 무계역[3]에서 토번군에 대항하였다. 왕준은 2천 병마를 이끌고 20리 떨어진 대래곡구(大來谷口)를 습격해 설눌 대군과 맞섰다. 토번대장은 이곳에 10만 병마가 주둔해 있다. 왕준은 7백 용사를 선발하여 토번군을 야습하게 하였는데, 토번군은 당군의 주력으로 착각하고 겁에 질려 1만여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왕준 등은 승리한 뒤 곧바로 무가역(武街驛)을 지휘했다. 장사는 밤을 틈타 토번군을 기습했다. 토번 대군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설눌 역시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와 앞뒤로 협공하여 토번군을 크게 물리쳤다. 분달연은 잔부를 이끌고 조수[4]로 달아났고, 설눌은 당군을 지휘하여 바짝 추격하여 쌍방이 장성보[5]에서 격전하였는데, 당군은 다시 토번군을 대파하고 만 칠천여 급을 참수하여 소와 양 120만 마리를 노획하였다. 토번군이 배수진을 치고 결사항쟁하였다. 설눌군의 선봉, 태자 우위솔, 풍안군의 사랑장 왕해빈(王海賓)이 겹치자, 당나라의 무장들이 그의 전공을 질시하여 증원하지 않아 왕해빈이 힘써 싸우다가 죽었다. 설눌은 주전을 이끌고 달려왔다. 여세를 몰아 토번군은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시체가 도처에 널려 있고, 타오르는 물이 흐르지 않아 토번 장수 육지향 미홍이 생포되었다. 당군은 탈양마를 모두 거두어들였고, 또한 무수한 기구를 노획하였다. 당나라는 십여 년 동안 옳다고 인정함으로 대토번전에서 최대의 승리를 거두었다. 현종은 설눌 등이 크게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친정을 중단하였다. 또한 자미사인 예약수(倪若水)를 전선으로 파견하여 여러 장수들의 공훈을 기록하였다.
전후 설눌은 공을 세워 좌우림군대장군(左羽林軍大將軍)으로 임명되었고 다시 평양군공(平陽郡公)으로 책봉되었다. 또한 아들인 설창(薛暢)을 조산대부로 임명하였다.
715년 4월, 현종은 돌궐 십성 중 많은 사람들이 조정에 투항함에 따라 설눌을 양주(凉州) 진군대총관(鎭軍大總管)으로 삼았고 적수(赤水), 건강(建康), 하원(河源) 일대의 군대가 설눌의 지휘를 받았다. 한편 좌위대장군 곽건관을 삭주진(朔州鎭) 대총관으로 삼고 병주에 주둔시켜, 동서가 협력하여 묵철가한을 견제하기 시작했다.[6][7]
이후 돌궐의 묵철가한이 서돌궐의 갈라록(葛邏祿), 호록옥(胡祿屋), 서니시(鼠尼施) 등의 부족을 공격하여 여러 차례 이들을 격파하였다. 결국 현종은 북정도호 탕가혜(湯嘉惠)와 좌산기상시 해완(解琬)에게 칙령을 내렸고 탕가혜와 해완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에 나섰다. 9월에 현종은 설눌을 삭방도 행군대총관으로 삼고, 태복경 여연조(呂延祚)와 영주 자사 두빈객을 부총관으로 삼아 묵철가한을 정벌했다.
716년, 6월, 묵철이 발야고의 패잔병들에게 습격당해 죽고[8], 발야고, 회골, 동라, 소, 복고 등 5부가 모두 와서 항복하여 당나라 국경 북부는 잠시나마 위기에서 벗어났다. 얼마 후 설눌은 연로하여 벼슬에 물러나 요양하였다.
설눌은 720년에 사망하여 태상경(太常卿)으로 추증되었고 소정(昭定)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후 돌궐의 묵철가한이 서돌궐의 갈라록(葛邏祿), 호록옥(胡祿屋), 서니시(鼠尼施) 등의 부족을 공격하여 여러 차례 이들을 격파하였다. 결국 현종은 북정도호 탕가혜(湯嘉惠)와 좌산기상시 해완(解琬)에게 칙령을 내렸고 탕가혜와 해완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에 나섰다. 9월에 현종은 설눌을 삭방도 행군대총관으로 삼고, 태복경 여연조(呂延祚)와 영주 자사 두빈객을 부총관으로 삼아 묵철가한을 정벌했다.
716년, 6월, 묵철이 발야고의 패잔병들에게 습격당해 죽고[8], 발야고, 회골, 동라, 소, 복고 등 5부가 모두 와서 항복하여 당나라 국경 북부는 잠시나마 위기에서 벗어났다. 얼마 후 설눌은 연로하여 벼슬에 물러나 요양하였다.
설눌은 720년에 사망하여 태상경(太常卿)으로 추증되었고 소정(昭定)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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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現 산서성 윈청시 완룽현[2] 노겁고 겁이 많다.[3] 지금의 감숙성 임조 동쪽[4] 감숙성 임담 서북쪽[5] 지금의 감숙성 임조경[6] 이 당시 돌궐은 당의 북벌 계획에 참여했던 튀르기시와 힐알사 부족을 점령하였으나, 묵철이 늙고 병들어 폭정을 일삼았고, 이에 내분이 일어났다.[7] 중종 시기 장인원이 삼수항성을 쌓음으로써 삼수항성을 돌궐에 대한 전진기지로 만들고, 튀르기시와 힐알사와 연합해 돌궐을 공격하려 했으나, 중종이 암살당하면서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갔다.[8] 묵철의 수급은 학령전에 의해 장안으로 전해진다.[9] 안사지란이 일어나기 직전 사촌이었던 안녹산과 마찬가지로, 가서한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10] 가서한은 안녹산과 안사순이 내통한다고 무고하였고, 안사순의 죄 7가지를 말한 뒤 안사순을 주살할 것을 청하자 안사순은 동생 안원정과 함께 처형당하고 그 가족은 영외로 이주당했다.[11] 삭방군은 안사지란 평정에 공이 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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