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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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재상 정공공(鄭恭公) 楊再思 | 양재사 | |
작호 | 홍농군 개국공(弘農郡 開國公) → 정국공(鄭國公) |
시호 | 공(恭) |
성 | 양(楊) |
이름 | 침(綝) |
자 | 재사(再思) |
부친 | 양행표(楊行表) |
조부 | 양기(楊岐) |
출신 | 정주(鄭州) 원무현(原武縣) |
홍농군(弘農郡) 화음현(華陰縣) | |
생몰 | 634년 ~ 709년 |
재임 | 당의 상서우복야 |
709년 |
양재사의 출신지는 정주(鄭州) 원무현(原武縣)으로, 634년에 양행표(楊行表)의 아들로 태어났다.
양재사는 젊은 시절에 명경과에 급제하여, 재주(梓州) 현무현(玄武縣)의 현위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양재사는 천관원외랑(天官員外郞), 좌숙정대 어사대부로 올라갔고, 694년에는 측천무후에 의해 재상인 난대시랑(鸞臺侍郞), 동봉각난대평장사(同鳳閣鸞臺平章事)로 발탁되었다. 다음 해에는 봉각시랑, 동평장사가 되었고, 태자 우서자를 함께 겸임하기도 하였다.
699년에는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나 다시 좌숙정대 어사대부로 임명되었고, 704년에는 경조부 장사, 양주 대도독부 장사로서 지방관을 맡기도 하였다.
705년 신룡정변으로 측천무후가 권좌에서 물러나고 측천무후의 태자인 이현이 복위하였다. 중종이 복위한 뒤 양재사는 호부상서, 동중서문하삼품으로 임명되고 홍농군공(弘農郡公)이라는 작위를 받았으며 양주 장사를 겸임하였다. 중종은 양재사가 예전에 자신이 태자궁에 있을 때의 관속이었기 때문에 시중으로 임명되고 중서령을 겸임하였으며, 정국공(鄭國公)으로 진봉되었다. 또한 중종의 황후인 순천익성황후의 책봉을 맡기도 하였다.
신룡정변 이후 무삼사는 신룡정변 공신들의 집권을 우려하였는데, 때마침 706년에 왕동교의 반란 미수 사건이 일어나자 양재사는 해당 사건의 심리를 맡기도 하였으며, 무삼사의 편에 서서 왕동교와 더불어 신룡정변 공신들을 축출하여 당시 사람들이 무삼사의 권세와 더불어 양재사에 대해 원망하기도 하였다. 이후 707년에는 중서령, 이부상서가 되었다.
709년에는 상서우복야, 동중서문하삼품이 되었지만 그 해에 사망하여 특진(特進), 병주 대도독으로 추증되었으며 공(恭)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양재사는 젊은 시절에 명경과에 급제하여, 재주(梓州) 현무현(玄武縣)의 현위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양재사는 천관원외랑(天官員外郞), 좌숙정대 어사대부로 올라갔고, 694년에는 측천무후에 의해 재상인 난대시랑(鸞臺侍郞), 동봉각난대평장사(同鳳閣鸞臺平章事)로 발탁되었다. 다음 해에는 봉각시랑, 동평장사가 되었고, 태자 우서자를 함께 겸임하기도 하였다.
699년에는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나 다시 좌숙정대 어사대부로 임명되었고, 704년에는 경조부 장사, 양주 대도독부 장사로서 지방관을 맡기도 하였다.
705년 신룡정변으로 측천무후가 권좌에서 물러나고 측천무후의 태자인 이현이 복위하였다. 중종이 복위한 뒤 양재사는 호부상서, 동중서문하삼품으로 임명되고 홍농군공(弘農郡公)이라는 작위를 받았으며 양주 장사를 겸임하였다. 중종은 양재사가 예전에 자신이 태자궁에 있을 때의 관속이었기 때문에 시중으로 임명되고 중서령을 겸임하였으며, 정국공(鄭國公)으로 진봉되었다. 또한 중종의 황후인 순천익성황후의 책봉을 맡기도 하였다.
신룡정변 이후 무삼사는 신룡정변 공신들의 집권을 우려하였는데, 때마침 706년에 왕동교의 반란 미수 사건이 일어나자 양재사는 해당 사건의 심리를 맡기도 하였으며, 무삼사의 편에 서서 왕동교와 더불어 신룡정변 공신들을 축출하여 당시 사람들이 무삼사의 권세와 더불어 양재사에 대해 원망하기도 하였다. 이후 707년에는 중서령, 이부상서가 되었다.
709년에는 상서우복야, 동중서문하삼품이 되었지만 그 해에 사망하여 특진(特進), 병주 대도독으로 추증되었으며 공(恭)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사람됨이 아첨을 잘하고 간사하였으며, 임금의 사소한 뜻도 맞출 수 있었는데, 임금이 원하지 않는 바가 있다면 반드시 비난하였고, 임금이 하려는 바가 있다며 반드시 칭찬하였다. 하지만 공손히 하고 삼가며 두려워하고 꺼려, 남과 맞지 않은 적이 없었다.구당서 양재사전
양재사의 재상으로서의 행보는 황제에게 아첨하는 간신이었다. 다음은 양재사의 아첨에 대한 일화들이다.
- 양재사는 생전에 재상으로 있을 때 누군가를 추천한 적은 없고 오히려 황제의 비위를 많이 맞췄던 인물이었다. 그 때문인지 어떤 사람이 양재사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명성과 지위가 높은데 왜 그렇게 황제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오?
양재사: 행로가 괴롭고 고생스러워서 올곧은 자들이 재앙을 입으니 만약 아첨을 하지 않으면, 어찌 그 몸을 보전할 수 있겠소!
- 또한 장창종의 형인 사례소경 장동휴(張同休)가 대신들과 사례시(司禮寺)에서 연회를 열때, 양재사에게 “그대의 얼굴이 고구려 사람을 닮았소.”라고 이야기하였다. 양재사는 이 말을 듣고 기뻐하여 그 자리에서 고구려 춤을 추었는데 좌중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이를 비웃었다고 한다.
- 전술하였듯이 양각야호(兩脚野狐)라는 고사성어의 주인공인데, 이 말을 한 사람은 좌보궐(左補闕) 대령언(戴令言)이었다. 측천무후의 측근인 장창종이 죄를 저지르자, 환언범은 장창종의 파면을 촉구하였다. 하지만 양재사는 장창종이 국가에 큰 공로가 있다며 측천무후에게 아첨을 하였고, 측천무후는 이를 듣고 기뻐하여 장창종을 원래의 직위로 되돌렸다. 대령언은 양각야호부(兩脚野狐賦)를 지어서 양재사의 이러한 행실을 풍자하고 비꼬았는데, 양재사는 이를 알고 매우 분노하여 대령언을 허주(許州) 장사현(長社縣)의 현령으로 좌천시켰다. 조정 대신들은 양재사의 정치적 보복에 대해 비웃었다고 한다.
- 양재사가 현무현위로 있으면서 수도로 가던 도중 객사에 머물렀을 때, 어떤 도둑이 양재사의 주머니에 있는 짐을 훔친 일이 있었다. 도둑이 양재사에게 죄를 청하자 양재사는 그 도둑에게 “네가 곤궁하여 이런 짓을 저질렀을테니, 남들에게 붙잡히지 말고 조용히 가거라. 나를 만나면 공문만 두고 가면 되니, 남은 돈은 전부 가져가거라.”라고 말하였고 오히려 도둑을 용서해주었다고 한다.
- 장안에 수해가 발생할 때, 양재사는 문을 닫고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어떤 수레가 진흙에 빠져 움직이지 못하자, 수레를 끄는 사람이 성을 내면서 “어리석은 재상이 음양을 능히 조화하지 못하여, 문만 닫고 우리를 힘들게 하는구나!”라고 말하자, 양재사는 이 말을 듣고 딱히 화를 내지 않았으며 대신 수레를 끄는 사람에게 자신의 종자를 보내 이렇게 말하였다.“네 소가 약한 것이지 재상 탓만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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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측천무후의 일파가 장창종을 부른 호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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