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입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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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대신 박릉문정남(博陵文貞男) 閻立本 | 염입본 | |
시호 | 문정(文貞) |
작위 | 박릉현 개국남(博陵縣 開國男) |
성 | 염(閻) |
이름 | 입본(立本) |
부친 | 염비(閻毗) |
출생 | 601년 ~ 673년 |
출신 | 옹주(雍州) 만년현(萬年縣) |
본관 | 하남(河南) 또는 태원(太原) |
염입본은 옹주(雍州) 만년현(萬年縣) 출신으로, 염비(閻毗)의 아들이다. 당태종의 치세 당시 염입본은 주작랑중(主爵郞中)을 지냈다.
고종의 재위기에 염입본은 장작대장으로 여러 차례 승진하였가, 뒤에는 염입덕을 대신하여 공부상서가 되었다.[1] 668년에는 우상(右相)[2]으로 승진하고 박릉현 개국남으로 봉해졌으며, 좌상 강각(姜恪)과 함께 추밀을 맡았다. 당시 세간에서는 염입본과 강각을 놓고 “좌상은 사막에서 위엄을 떨쳤고, 우상은 단청으로 명예를 떨쳤다”고 평가하였다.[3]
이후 염입본은 670년에 중서령이 되었고,[4] 673년 11월 14일에 죽었다. 시호는 문정(文貞).
고종의 재위기에 염입본은 장작대장으로 여러 차례 승진하였가, 뒤에는 염입덕을 대신하여 공부상서가 되었다.[1] 668년에는 우상(右相)[2]으로 승진하고 박릉현 개국남으로 봉해졌으며, 좌상 강각(姜恪)과 함께 추밀을 맡았다. 당시 세간에서는 염입본과 강각을 놓고 “좌상은 사막에서 위엄을 떨쳤고, 우상은 단청으로 명예를 떨쳤다”고 평가하였다.[3]
이후 염입본은 670년에 중서령이 되었고,[4] 673년 11월 14일에 죽었다. 시호는 문정(文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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