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만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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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조 함양(咸陽) 출신으로, 선대는 본관처럼 하동 지역(산서성 남부)이지만 아버지 설세웅이 출세하면서 함양으로 옮겨 살았다. 설만철은 형인 설만균(薛萬均)과 함께 유주에 살았고, 무략을 발휘하여 나예로부터 중용되었다. 뒤에 나예가 당나라에 귀순하자, 설만철도 나예를 따라 당나라에 귀순하여,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제수되고 무안현공(武安縣公)으로 책봉되었다.
두건덕이 당나라를 침공해오자, 나예가 출격하여 두건덕에게 맞섰는데, 두건덕이 강을 건너자 설만균과 설만철은 나예와 함께 두건덕을 대패시켰다. 두건덕이 다시 유주를 공격하여 성담을 뛰어넘자, 설만철은 설만균과 함께 두건덕의 후군을 습격하여 두건덕을 패주시켰다. 621년, 두건덕이 패배하고 유흑달이 두건덕의 복수를 위해 반란을 일으키면서 기세가 커지자, 설만철은 유흑달과 맞섰으나 유흑달에게 한번 패배하여 포로로 붙잡혔다가 간신히 살아난다. 비록 623년에 유흑달을 평정하긴 했지만, 이때의 전투는 설만철에게 커다란 패배였다.
유흑달이 평정된 이후, 설만균과 설만철은 입조하여 각각 다른 진영에 붙게 되었는데, 설만균은 진왕 이세민 진영에, 설만철은 태자 이건성 진영에 붙었다. 이건성은 설만철의 용맹함을 제법 마음에 들어하여 설만철을 자신의 심복으로 삼았다. 당시 진왕 이세민과 태자 이건성의 대립은 626년 현무문의 변으로 나타났고, 결국 이건성과 이원길이 살해되었다. 설만철은 현무문의 변 당시 진왕부를 공격하였으나, 이건성과 이원길이 살해되자 결국 종남산으로 달아났다. 이세민이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설만철을 달래자, 설만철은 그제서야 조정으로 복귀하여 영군장군으로 임명되었다. 이세민은 설만철의 죄를 묻지 않았고 오히려 설만철의 행동을 이건성에 대한 충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평가하며 설만철을 의로운 인물이라고 칭찬하였다.
진왕 이세민이 황제로 즉위한 뒤, 설만철은 시소를 따라 양사도를 토벌하면서 수말당초의 혼란을 평정하였다. 설만철은 뒤에 명장 이정을 따라 동돌궐의 힐리가한을 정벌할 때 종군하였고, 작위가 군공으로 올라간다. 또한 설만철은 635년 형인 설만균과 함께 토욕혼을 정벌할 때도 공헌하였다. 이후 설만철은 형과 어머니를 잃었고, 복귀하여 우위장군(右衛將軍)으로 기용되고 포주(蒲州) 자사를 맡았다. 641년 설연타가 당나라를 침공하자, 설만철은 이세적에게 종군하여 전공을 세웠고, 설만철의 아들 1명에게 작위로 현후를 하사하였다.
또한 설만철은 644년 당고조의 딸인 단양공주(丹陽公主)에게 장가를 들어 부마도위가 되었으며,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으로 옮기고, 항주(杭州) 자사로 전임되었으며, 대주(代州) 도독으로 옮겼고, 다시 우무위대장군(右武衛大將軍)으로 임명되었다. 태종은 설만철을 이세적, 이도종과 나란히 놓으며 명장이라고 평가하였다.
설연타가 다시 당나라를 침공하자, 설만철은 당태종의 지휘를 받아 설연타를 정벌하라는 명에 따라 설연타를 완전히 멸망시켰다. 이후 태종이 고구려 정벌을 준비하자, 설만철은 고구려 정벌에 종군하였다. 설만철은 청구도(靑丘道) 행군대총관(行軍大總管)으로 임명되어 3만 군대를 이끌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 고구려를 침공하였지만, 박작성 공략에서 큰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다.
설만철은 자신의 재능을 믿고 거만을 부려 다른 사람을 능욕하여, 어떤 이가 조정에 설만철에 대해 고발하였다. 설만철이 돌아오자, 태종은 당장 설만철의 죄를 묻지 않았지만, 설만철의 부장이었던 배행방(裴行方)이 설만철이 조정에 원한을 품었다고 보고하면서 상황은 뒤집혔다. 이세적은 설만철에 대해 죄를 처벌해도 시원치 않을 것이라면서 설만철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촉구하였다. 이로 인해 설만철은 면직되었고 변방으로 유배되었다가 사면이 내려오면서 돌아왔다.
649년 태종이 죽고 태종의 태자인 이치가 당고종으로 즉위한 뒤, 설만철은 651년에 영주(寧州) 자사로 제수되었다. 설만철은 입조한 뒤에 방현령의 아들인 방유애와 친하게 지냈는데, 대화를 나누던 도중 설만철은 조정에 대한 원망을 드러냈고 자신이 발병을 앓고 있어서 움직일 수 없는 사정을 방유애에게 이야기하였다. 방유애는 설만철에게 만약 나라가 바뀐다면 형왕 이원경을 황제로 추대하기로 약조하였으나, 이 일이 누설되어 결국 조정에 체포되었고 653년에 처형되었다.
두건덕이 당나라를 침공해오자, 나예가 출격하여 두건덕에게 맞섰는데, 두건덕이 강을 건너자 설만균과 설만철은 나예와 함께 두건덕을 대패시켰다. 두건덕이 다시 유주를 공격하여 성담을 뛰어넘자, 설만철은 설만균과 함께 두건덕의 후군을 습격하여 두건덕을 패주시켰다. 621년, 두건덕이 패배하고 유흑달이 두건덕의 복수를 위해 반란을 일으키면서 기세가 커지자, 설만철은 유흑달과 맞섰으나 유흑달에게 한번 패배하여 포로로 붙잡혔다가 간신히 살아난다. 비록 623년에 유흑달을 평정하긴 했지만, 이때의 전투는 설만철에게 커다란 패배였다.
유흑달이 평정된 이후, 설만균과 설만철은 입조하여 각각 다른 진영에 붙게 되었는데, 설만균은 진왕 이세민 진영에, 설만철은 태자 이건성 진영에 붙었다. 이건성은 설만철의 용맹함을 제법 마음에 들어하여 설만철을 자신의 심복으로 삼았다. 당시 진왕 이세민과 태자 이건성의 대립은 626년 현무문의 변으로 나타났고, 결국 이건성과 이원길이 살해되었다. 설만철은 현무문의 변 당시 진왕부를 공격하였으나, 이건성과 이원길이 살해되자 결국 종남산으로 달아났다. 이세민이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설만철을 달래자, 설만철은 그제서야 조정으로 복귀하여 영군장군으로 임명되었다. 이세민은 설만철의 죄를 묻지 않았고 오히려 설만철의 행동을 이건성에 대한 충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평가하며 설만철을 의로운 인물이라고 칭찬하였다.
진왕 이세민이 황제로 즉위한 뒤, 설만철은 시소를 따라 양사도를 토벌하면서 수말당초의 혼란을 평정하였다. 설만철은 뒤에 명장 이정을 따라 동돌궐의 힐리가한을 정벌할 때 종군하였고, 작위가 군공으로 올라간다. 또한 설만철은 635년 형인 설만균과 함께 토욕혼을 정벌할 때도 공헌하였다. 이후 설만철은 형과 어머니를 잃었고, 복귀하여 우위장군(右衛將軍)으로 기용되고 포주(蒲州) 자사를 맡았다. 641년 설연타가 당나라를 침공하자, 설만철은 이세적에게 종군하여 전공을 세웠고, 설만철의 아들 1명에게 작위로 현후를 하사하였다.
또한 설만철은 644년 당고조의 딸인 단양공주(丹陽公主)에게 장가를 들어 부마도위가 되었으며,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으로 옮기고, 항주(杭州) 자사로 전임되었으며, 대주(代州) 도독으로 옮겼고, 다시 우무위대장군(右武衛大將軍)으로 임명되었다. 태종은 설만철을 이세적, 이도종과 나란히 놓으며 명장이라고 평가하였다.
설연타가 다시 당나라를 침공하자, 설만철은 당태종의 지휘를 받아 설연타를 정벌하라는 명에 따라 설연타를 완전히 멸망시켰다. 이후 태종이 고구려 정벌을 준비하자, 설만철은 고구려 정벌에 종군하였다. 설만철은 청구도(靑丘道) 행군대총관(行軍大總管)으로 임명되어 3만 군대를 이끌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 고구려를 침공하였지만, 박작성 공략에서 큰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다.
설만철은 자신의 재능을 믿고 거만을 부려 다른 사람을 능욕하여, 어떤 이가 조정에 설만철에 대해 고발하였다. 설만철이 돌아오자, 태종은 당장 설만철의 죄를 묻지 않았지만, 설만철의 부장이었던 배행방(裴行方)이 설만철이 조정에 원한을 품었다고 보고하면서 상황은 뒤집혔다. 이세적은 설만철에 대해 죄를 처벌해도 시원치 않을 것이라면서 설만철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촉구하였다. 이로 인해 설만철은 면직되었고 변방으로 유배되었다가 사면이 내려오면서 돌아왔다.
649년 태종이 죽고 태종의 태자인 이치가 당고종으로 즉위한 뒤, 설만철은 651년에 영주(寧州) 자사로 제수되었다. 설만철은 입조한 뒤에 방현령의 아들인 방유애와 친하게 지냈는데, 대화를 나누던 도중 설만철은 조정에 대한 원망을 드러냈고 자신이 발병을 앓고 있어서 움직일 수 없는 사정을 방유애에게 이야기하였다. 방유애는 설만철에게 만약 나라가 바뀐다면 형왕 이원경을 황제로 추대하기로 약조하였으나, 이 일이 누설되어 결국 조정에 체포되었고 653년에 처형되었다.
심모가 깊었고 싸움터에 나가 무력으로 융이(戎夷)를 제패하였지만, 능히 자신의 목을 보전하지 못하여 주륙에 이르렀다.『구당서』
후군집은 장상의 지위에서 사사로이 태자를 알현하였고, 장량은 500명의 양자를 모았고, 설만철은 분수에 넘는 짓을 획책하여, 모두 죽을 때 다 갚지 못한 죄책이 있었으니, 어찌 다시 꾸짖겠는가?『신당서』
- 신당서의 기록에 의하면 설만철이 너무 어리석어서 단양공주가 이를 부끄러워하였고 한동안 설만철과 동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태종은 이 사실을 듣고 웃었으며 두 사람을 불러 설만철에게 한 수를 가르쳐주었다.
[1] 구당서에서도 후군집, 장량, 설만철이 무릇 이들은 처음부터 일을 신중하게 하지 못해서 목숨을 끝까지 보장하지 못하였다고 평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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