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로흠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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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원공(芮元公) 豆盧欽望 | 두로흠망 | |
작호 | 예국공(芮國公) |
시호 | 원(元) |
성 | 두로(豆盧) |
이름 | 흠망(欽望) |
자 | 사제(思齊) |
부친 | 두로인업(豆盧仁業) |
조부 | 두로관(豆盧寬) |
증조부 | 두로통(豆盧通) |
출신 | 경조(京兆) 만년현(萬年縣)) |
생몰 | 624년 ~ 709년 |
재임 | 무주의 문창우상 |
699년 ~ 700년 |
증조부인 두로통(豆盧通)은 수나라의 상주(相州) 자사, 남진군공(南陳郡公)이었다.
조부인 두로관(杜盧寬)은 수나라의 초대 황제인 수문제의 사위였으며, 대업(大業) 연간 말에 양천현령(梁泉縣令)을 지냈다. 수말당초의 혼란기에 두로관은 소우와 함께 토호들을 이끌고 이연에게 귀순하여 전중감으로 제수되었고, 태종이 즉위한 뒤 예부상서, 좌위대장군, 기주(岐州) 자사를 역임하였으며, 예국공(芮國公)으로 책봉되었다. 두로관은 650년에 사망하여 특진(特進), 병주 대도독으로 추증되었고, 정(定)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두로흠망의 아버지인 두로인업(豆盧仁業)은 아버지 두로관을 따라 당나라에 귀순하여 태자천우와 직홍문관을 맡았다. 이후 두로인업은 성주(成州) 자사를 맡았고 두로관 사후 예국공 작위를 습봉하였으며 678년에 사망하여 유주 자사로 추증되었으며 대주(代州) 자사로도 추증되었다.
조부인 두로관(杜盧寬)은 수나라의 초대 황제인 수문제의 사위였으며, 대업(大業) 연간 말에 양천현령(梁泉縣令)을 지냈다. 수말당초의 혼란기에 두로관은 소우와 함께 토호들을 이끌고 이연에게 귀순하여 전중감으로 제수되었고, 태종이 즉위한 뒤 예부상서, 좌위대장군, 기주(岐州) 자사를 역임하였으며, 예국공(芮國公)으로 책봉되었다. 두로관은 650년에 사망하여 특진(特進), 병주 대도독으로 추증되었고, 정(定)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두로흠망의 아버지인 두로인업(豆盧仁業)은 아버지 두로관을 따라 당나라에 귀순하여 태자천우와 직홍문관을 맡았다. 이후 두로인업은 성주(成州) 자사를 맡았고 두로관 사후 예국공 작위를 습봉하였으며 678년에 사망하여 유주 자사로 추증되었으며 대주(代州) 자사로도 추증되었다.
음서를 통해 관직에 올라 656년에 고종의 태자인 이홍의 천우비신이 되었다. 675년에 이홍이 죽은 이후에는 수주(遂州) 사병참군(司兵參軍)을 지냈고 상식직장, 위위승, 고부낭중, 주작낭중, 기주(冀州) 자사 등을 역임하였다. 부친인 두로인업이 죽은 뒤에는 부친의 작위인 예국공을 습봉하였고, 회주 자사로 제수되었다. 아우인 두로흠문(豆盧欽文)이 죄를 얻자, 두로흠망은 무주(婺州) 자사로 좌천되었다가 월주(越州) 도독으로 다시 제수되었다.
고종이 죽고 측천무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한 이후 두로흠망은 태부경, 홍려경[1]을 역임하였고 중서령[2]를 역임하면서 이소덕과 함께 정사를 보좌하다가, 이소덕이 죄를 받아 투옥되고 사형소경(司刑少卿) 황보문비(皇甫文備)이 두로흠망 등에 대해 탄핵하여, 두로흠망은 조주(趙州) 자사로 좌천되었다. 조정으로 복귀한 뒤에는 검교태상경, 서경 유수로 임명되었다.
거란이 유주를 침공하자, 두로흠망은 경관들의 2개월치 봉급을 거두어 군대의 보급에 충당하자고 주장하였지만 왕구례가 반발하여 무산된다. 684년에 폐위되어 여릉왕이 된 이현이 태자가 되자 두로흠망은 태자궁윤을 맡았고 699년에 문창우상(文昌右相), 동봉각난대삼품으로 임명되었으며, 곧이어 태자빈객으로 제수되었다.
705년 신룡정변으로 이현이 복위한 뒤, 두로흠망은 특진이 더해졌고 상서좌복야, 평장군국중사로 임명되었으며, 송주의 봉읍 300호를 식읍으로 하사받았고, 상왕(相王) 이단의 장사를 겸임하였다. 측천무후가 사망한 뒤 태위를 겸임하였다. 706년, 두로흠망은 개부의동삼사로 임명되었고 709년에 사망하여 사공, 병주 대도독으로 추증되었고, 원(元)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고종이 죽고 측천무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한 이후 두로흠망은 태부경, 홍려경[1]을 역임하였고 중서령[2]를 역임하면서 이소덕과 함께 정사를 보좌하다가, 이소덕이 죄를 받아 투옥되고 사형소경(司刑少卿) 황보문비(皇甫文備)이 두로흠망 등에 대해 탄핵하여, 두로흠망은 조주(趙州) 자사로 좌천되었다. 조정으로 복귀한 뒤에는 검교태상경, 서경 유수로 임명되었다.
거란이 유주를 침공하자, 두로흠망은 경관들의 2개월치 봉급을 거두어 군대의 보급에 충당하자고 주장하였지만 왕구례가 반발하여 무산된다. 684년에 폐위되어 여릉왕이 된 이현이 태자가 되자 두로흠망은 태자궁윤을 맡았고 699년에 문창우상(文昌右相), 동봉각난대삼품으로 임명되었으며, 곧이어 태자빈객으로 제수되었다.
705년 신룡정변으로 이현이 복위한 뒤, 두로흠망은 특진이 더해졌고 상서좌복야, 평장군국중사로 임명되었으며, 송주의 봉읍 300호를 식읍으로 하사받았고, 상왕(相王) 이단의 장사를 겸임하였다. 측천무후가 사망한 뒤 태위를 겸임하였다. 706년, 두로흠망은 개부의동삼사로 임명되었고 709년에 사망하여 사공, 병주 대도독으로 추증되었고, 원(元)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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