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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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에서 전쟁이나 자연재해 등 불가피한 사정이 발생해 기존의 수도가 심각한 위험에 처했을 때 정부가 비교적 안전한 곳으로 수도를 잠시 옮겼을 때, 정부가 이전한 곳을 말한다. 전통적인 중국 왕조 시절에는 행재(行在)라고 불렀다. 여기서 좀 더 상황이 나빠지면 영토를 모두 잃고 아예 해외로 망명한 망명 정부가 된다.
한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케이스는 한국 전쟁 당시 부산이 서울을 대신해 대한민국의 임시수도 역할을 했던 것이다. 임시수도 정부청사(現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와 경무대 역할을 대신했던 이승만 관저[1] 등 임시수도 당시 주요 시설이 모여있는 부산광역시 서구 부민동에는 임시수도기념관에서 부민사거리까지 이어지는 임시수도기념로를 조성해 이를 기리고 있으며 2016년부터 피란수도 부산야행 행사를 매 년마다 진행 중이다.
한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케이스는 한국 전쟁 당시 부산이 서울을 대신해 대한민국의 임시수도 역할을 했던 것이다. 임시수도 정부청사(現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와 경무대 역할을 대신했던 이승만 관저[1] 등 임시수도 당시 주요 시설이 모여있는 부산광역시 서구 부민동에는 임시수도기념관에서 부민사거리까지 이어지는 임시수도기념로를 조성해 이를 기리고 있으며 2016년부터 피란수도 부산야행 행사를 매 년마다 진행 중이다.
기본적으로 정부의 기능을 해야하므로 기반 시설이 이미 갖춰져 있어야 한다. 전쟁중에 적군과 대치하는 것도 힘든데 기반시설까지 따로 만드는건 전황을 더욱 불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시수도가 반드시 대도시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기존 대도시로 피난을 가는 경우 원래 주민들과 자원을 나눠써야 하므로 민심이 불안정해질수 있기 때문. 그래서 보통은 전황에 따라 바뀌는 경우가 많다.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임시수도였던 부산.
- 고려시대
- 조선시대
- 평양부 -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진격으로 인하여 임시수도로 삼았던 두번째 고을. 당시 전쟁 준비를 위해서 평양성 내부에 쌀을 비롯한 곡식, 군수물자를 비축하였으나 선조의 의주피난 결정으로 인하여 함락되었다.
- 현대
- 부산시 - 1950년 8월 18일 ~ 10월 27일, 1951년 1월 4일 ~ 1953년 8월 14일. 아마도 한국사에서 가장 유명한 임시수도일 것이다. 임시수도였던 기간이 대전이나 대구보다 훨씬 길었기 때문에 6.25 전쟁 당시 임시수도는 부산이 가장 유명하다. 서울 탈환 이후 북진한 국군이 압록강에 도달한 다음날인 10월 27일 환도가 이뤄졌으나, 1951년 1월 4일 1.4 후퇴로 서울이 재점령되자 다시 임시수도가 되었다. 그 후 UN군의 반격으로 서울을 재탈환했지만 환도는 하지 않고 정전 후인 1953년 8월 14일까지 부산을 임시수도로 유지한다. 부산시는 이를 기리고자 부산광역시 서구 부민동에 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관저를 임시수도기념관으로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이 시기에 발췌 개헌(부산정치파동), 제2대 대통령 선거 등의 사건이 있었다. 현재 관련 유적들이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준비하고 있다.
- 뤄양시 -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 때 상하이에서 격전이 벌어지자 일본군이 장강을 따라 난징을 침공할 것을 우려한 장제스가 잠시 뤄양으로 수도를 옮겼었다.
- 청두시 - 중일전쟁 때 충칭까지 함락되면 이곳이 수도가 될 예정이었으나, 충칭은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국공내전 중 충칭이 함락되자 이곳이 국민정부의 최후의 수도가 되었으나, 군벌들이 반기를 일으켜 공산군에 항복함으로 공산군에게 넘어갔다. 청두가 함락되기 직전 장제스는 국부천대로 타이완으로 도망가게 된다. 이후 중화민국의 수도는 사실상 타이베이가 되었다. 이후의 수도 문제는 중화민국의 국가 정체성과도 연결이 되는 복잡한 문제인데 국부천대 및 양안관계 문서에 나와 있다. 사실, 청두의 임시수도로의 역사는 당나라때에 더 유명한데, 안사의 난, 황소의 난 때에 두 번이나 임시수도가 되었다.[11]
- 욕야카르타 - 인도네시아 독립전쟁(1945~1949년) 기간 동안 인도네시아의 임시수도였다.
- 부키팅기 -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와중인 1948년 네덜란드군이 인도네시아의 임시수도인 욕야카르타를 함락시키자 인도네시아는 수도를 부키팅기로 옮겨 항전을 벌였다.
- 텔아비브 - 1948년부터 1977년까지 이스라엘의 임시수도였다. 6일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 정부는 예루살렘을 재건하는 도시계획에 착수하여 1968년부터 1992년까지 국회의사당과 정부종합청사와 대법원 및 공안부와 경찰청과[14] 문화복지부처들, 이스라엘방송공단과 이스라엘은행을 차례로 이전했으니, 1977년에 이르러 예루살렘이 명실상부한 행정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국내외의 정세가 불안하기 때문에 가까운 미래의 총력전에 대비하여 방위기관(국방부와 참모본부, 육해공군청과 국군사령부들), 정보기관 본부(모사드, 신 베트, 아만), 경제산업부처들, 국유기업들과 증권거래소, 대사관과 공사관과 영사관은[15] 여전히 텔 아비브 관구에 있다.
- 바자라크 - 판지시르 주의 주도로 2021년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공세로 인하여 수도 카불을 함락당한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정부가 판지시르에서 부통령 암룰라 살레를 대통령으로 선언한 뒤 판지시르에서 저항 중이다. 그러나 2021년 9월 5일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 군대에 함락되었다. 이슬람 공화국 저항 세력은 판지시르 주의 계곡 지대로 후퇴하여 저항을 이어가고 있다.
- 수원 - 6.25 발발 당시 정부에서 제일 처음 천도를 결정한 곳이 수원이었다. 단 발표 얼마 안 지나고 금세 취소되고, 또 너무 빨리 내려와 버린 북한군과 한국 정부(...) 때문에 정작 실제 임시수도는 달아보지 못했다.
- 공주 장기지구 - 박정희 정권은 서울이 군사적으로 전방인 문제와 서울의 집중화를 해결할 목적[16]으로, 통일 이후에는 서울로 환도한다는 전제조건 아래 비교적 후방 지역에 임시행정수도를 건설한다는 소위 백지계획을 세웠다. 1977년 '임시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통과시키고, 충청지방의 논산, 보은, 공주, 천안시[17] 등을 후보지로 검토하여 '공주 장기지구'를 임시행정수도 부지로 최종 낙점하였다.[18][19] 구체적인 도시계획[20][21]과 도시 건설, 공공기관 이전 일정까지 준비했다. 그러나 1979년 말 오일쇼크로 인한 경제위기 및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 압박으로 인한 안보위기 등으로 추진동력이 떨어지다가, 결국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하면서 백지계획은 말 그대로 백지화되었다. 다만 이 계획은 훗날 둔산신도시 개발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그러다가 2004년 노무현 정권의 신행정수도 추진으로 이 계획은 간접적으로 계승되었고, 여러 우여곡절 끝에 행정중심복합도시(세종특별자치시)가 탄생하였다. 상기 각주에서 언급됐듯이, 현 행정중심복합도시(세종특별자치시)의 대부분은 임시행정수도 계획의 동쪽 시가지에 해당된다. 당시 말단 실무자로 참여했던 김진애 의원의 포스팅. 박정희의 수도이전 계획과 현 행정도시의 입지 비교
[1] 현 임시수도 기념관 건물.[2] 천수이볜 정부가 감행하였다.[3] 수도 플리머스 뿐만 아니라 플리머스를 포함한 섬의 남쪽 절반 전체가 화산 폭발로 인해 출입 금지 지역이 되었다.[4] 임시수도라기 보다는 고대 한반도 수도 특유의 전시성~평시성 체제에 가깝다. 수도 바로 근처에 전시에 농성할 수 있는 성을 쌓아 전시에 대비하는 것.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의 경우에도 국내성(평시성)과 환도산성(전시성) 이중 구조였고, 한성 백제의 수도인 위례성 역시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북성(평시성)과 남성(전시성) 이중 구조였으며, 신라의 명활산성 또한 그런 역할을 하는 성이다.[5] 그래도 낙동강 전투 중에는 대구역 등지에 포탄이 떨어지기도 했다.[6] 이때 방송으로는 정부가 신의주로 이동한다고 선전하였다.[7] 지금도 유사시 방어하기 힘든 평양 대신 개마고원 안쪽의 후방 강계가 임시수도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대비가 되어있다고 한다.[8] '수도'를 의미[9] 물론 베이징을 행재로 고쳤을 때에도 황제들은 베이징에 머물렀다.[10] 임안(臨安)이라고도 불렀다.[11] 그리고 사실 임시 수도라는 인식조차 없어서 지나치기 쉬운데 촉한도 성도는 임시 수도 취급했다. 그 증거로 수도라고 하는데 성도를 성도윤으로 승급하지 않고 끝까지 촉군으로 놔뒀고 법적 수도는 장안이었다. (낙양이 아닌 이유는 손권의 칭제 이후 장차 위를 멸망시킬 경우 삼하[12] 지역을 오의 영유권으로 인정했기 때문)[12] 하남(낙양), 하내, 하동[13] 1229년에서 1244년 기간 동안에는 예루살렘이 불완전하게나마 다시 회복된다.[14] 소방청은 중부 관구의 리숀 레치욘 시에 있고, 교도청은 중부 관구의 람라 시에 있다.[15] 1980년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예루살렘 관구에 상주하는 대사급 외교공관들의 철수를 요구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478호에 따라 국제사회의 주권국가들 가운데 약 50개국(미국, 러시아, 독일, 체코, 바누아투 등)을 제외한 나머지는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행정수도로 탈바꿈한 현실을 인정하지 않았다.[16] 서울 집중으로 인한 여러 가지 폐해(대표적으로 상하수도 문제)는 당시 정권에서도 큰 골칫거리라, 서울 편입 예정지였던 지금의 광명시 북부마저도 최규하 정부까지는 서울 편입을 보류했다가 전두환이 집권하자마자 배제했을 정도였다.[17] 천안(당시 천원군) 목천 지역은 훗날 독립기념관이 들어서게 된다. 행정수도 이전계획에 참여했던 김재익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 독립기념관 입지 선정에도 관여하면서, 교통과 지세가 좋아 행정수도 후보지 중 하나로 삼았던 목천 지역(행정수도 이전계획 당시 명칭은 '천원지구')에 독립기념관이 들어서게 했다.[18] 정부종합청사·국회·대법원 등 수도 기능이 입지할 부지의 중심부가 당시 행정구역으로 공주군 장기면(현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에 해당되어, '장기지구'란 이름이 붙었다. 이 때의 부지는 현재의 공주시 신관동·월송동, 우성면·의당면 각 일부,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행정중심복합도시 중·서부, 연기면·금남면 각 일부 등에 해당됐다. 즉, 당시 임시행정수도 계획의 동쪽 지역은 오늘날 세종특별자치시(행정중심복합도시)의 서쪽 내지는 중심부에 해당된다. 공주군 장기면의 대부분은 세종시에 흡수되었으며, 남은 3개리는 월송동에 편입되었다.[19] 장기지구는 원래 초기 검토 대상에는 없었으며, '공주지구'와 '대평지구'라는 2개의 지구의 각 일부였다. 이 중 대평지구는 공교롭게도 오늘날 행정중심복합도시와 거의 일치한다(!). 선견지명? 그런데 정작 당시 선정위원들의 최종평가에서는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가, 그 옆의 공주지구(현재의 공주시 시가지에 더 가까운 부지로, 역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음)와 절충해 만든 장기지구가 가장 높은 점수를 받게 되어 최종 확정됐다.[20] 심지어 1996년 올림픽 유치를 위해서 주경기장을 포함한 스포츠타운 부지까지 지정되어 있었다.[21] 박정희 정부 때 테크노크라트로 유명한 오원철이 프로젝트를 총괄했으며, 참여한 전문가들로 경제학자이자 관료인 김재익·박승·김만제, 건축가 김수근, 건축·도시계획가이자 전 국회의원인 김진애 등이 있다. 특히 도시계획, 건축 등의 분야에서는 국가적인 대규모 프로젝트였음을 반영하듯, 당시 국내 최고의 전문가들(앞서 언급된 김수근을 비롯해 엄덕문, 윤장섭, 박병주, 주종원, 강병기, 황용주 등)이 대거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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