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손순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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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연각훈신 비양공(邳襄公) 長孫順德 | 장손순덕 | |
양(襄) | |
설국공(薛國公)→비국공(邳國公)추봉 | |
최종직위 | 택주(澤州) 자사(刺史)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추증 |
이름 | 장손순덕(長孫順德) |
부친 | 장손개(長孫愷) |
출생 | 불명 |
당나라의 인물.
장손순덕은 당나라 제2대 황제인 태종의 황후가 되는 문덕황후 장손씨의 족숙이며, 수나라의 개부 장손개의 아들로 태어났다. 장손숙은 수나라 말에 우훈위(右勳衛)를 지내기도 했지만, 당시의 황제였던 양제가 고구려 정벌을 위해 군사를 모집하자, 징집을 피해 태원으로 달아나 숨었다. 장손순덕은 이때 이연, 이세민과 만나 교류하게 되었다.
수나라의 상황은 양제의 실정으로 도적들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장손순덕은 유홍기와 함께 군대를 모았고, 이연이 거병할 때 이연의 통군(統軍)으로 임명되었다. 장손순덕은 이연 휘하에서 다대한 전공을 세웠으며 굴돌통을 사로잡기도 하였다.
수나라의 상황은 양제의 실정으로 도적들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장손순덕은 유홍기와 함께 군대를 모았고, 이연이 거병할 때 이연의 통군(統軍)으로 임명되었다. 장손순덕은 이연 휘하에서 다대한 전공을 세웠으며 굴돌통을 사로잡기도 하였다.
장손순덕은 태종의 공신으로 있었지만, 장손순덕의 종들이 궁중의 재물을 훔친 사실이 드러났다. 태종은 장손순덕의 공적을 아까워하면서도 차마 죄를 물을 수 없었기에 장손순덕에게 명주 40필을 내려 부끄러움을 깨닫게 하였다. 여기에 대리소경 호연이 간언하였는데, 호연의 간언과 태종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호연: 장손순덕은 법을 어기고 뇌물을 받아, 죄를 용서할 수 없는데, 어찌하여 다시 장손순덕에게 명주를 내리셨습니까?
태종: 인간은 영묘한 성정을 가지고 태어나니, 그에게 명주를 내리는 것이 형벌을 내려 처형하는 것보다 낫다. 만약 장손순덕이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한 마리의 금수와 같으니 장손순덕을 죽이는 것이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구당서 58권 장손순덕 열전
627년 이효상(李孝常)이 반역을 저질렀는데 장손순덕은 여기에 연루되어 제명되었다. 장손순덕이 제명된 이후 태종은 공신도를 열람하면서 장손순덕의 초상화를 보고 그를 불쌍히 여겨 사람을 보내 장손순덕의 동정을 살피도록 하였는데, 장손순덕은 정신이 위축되고 술에 취한 모습이었다.
태종은 장손순덕을 다시 벽소하여 택주 자사로 삼았고 그의 작읍을 다시 복구시켰다. 장손순덕은 본디 방종하고 법도를 어긴 인물이었지만 새로운 직위로 임명된 이후에는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태도를 버리고 엄정한 정치를 실시하였다. 장손순덕은 택주 자사를 지내면서 뇌물을 받는 관리나 비옥한 대토지들을 소유한 관리들을 고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장손순덕은 범법 행위를 저질러 면직되었고 이후 병에 걸려 얼마 뒤에 세상을 떠났다.
태종은 장손순덕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폐조하였으며 장손순덕을 형주(荊州) 도독(都督)으로 추증하고, 양(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639년에는 장손순덕을 비국공(邳國公)으로 추봉하였다. 654년에는 개부의동삼사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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