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홍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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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문헌공(衛文憲公) 杜鴻漸 | 두홍점 | |
시호 | 문헌(文憲) |
작위 | 위국공(衛國公) |
성 | 두(杜) |
이름 | 홍점(鴻漸) |
자 | 지손(之巽) |
부친 | 두붕거(杜鵬擧) |
조부 | 두신행(杜愼行) |
생몰 | 709년 ~ 769년 |
출신 | 복주(濮州) 복양현(濮陽縣) |
두홍점의 조부 두신행(杜愼行)은 익주(益州) 장사를 지냈고 부친 두붕거(杜鵬擧)는 벼슬이 왕부의 관원까지 이르렀다. 두홍점은 어린 시절에 총명했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진사에 급제하여 왕부의 참군(參軍)이 되었다. 천보(天寶) 연간 말엽에 대리사직(大理司直), 삭방유후(朔方留後), 지도부사(支度副使)를 지냈다.
755년부터 발생한 안사의 난으로 당나라가 혼란에 빠져서 현종이 촉(蜀)으로 피난하고 태자 이형이 평량(平凉)으로 대피하였지만 소재를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두홍점은 육성수운사(六城水運使) 위소유, 절도판관(節度判官) 최의(崔漪), 지도판관(支度判官) 노간금(盧簡金), 관내염지판관(關內鹽池判官) 이함 등과 함께 의논을 벌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755년부터 발생한 안사의 난으로 당나라가 혼란에 빠져서 현종이 촉(蜀)으로 피난하고 태자 이형이 평량(平凉)으로 대피하였지만 소재를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두홍점은 육성수운사(六城水運使) 위소유, 절도판관(節度判官) 최의(崔漪), 지도판관(支度判官) 노간금(盧簡金), 관내염지판관(關內鹽池判官) 이함 등과 함께 의논을 벌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지금 호갈(胡羯)이 강상을 무너뜨리고 이경(二京)[1]이 함락되어 주상께서 파촉(巴蜀)으로 남행하시고 황태자께서는 평량에서 군대를 거느리고 있소. 하지만 평량은 한산한 땅으로 군대를 모을 수 있는 곳이 아니므로 반드시 승리를 거두고자 한다면 삭방이 아니면 안되오. 만약 우리가 황태자 전하를 받들어 10일 사이에 서쪽으로는 하농(河隴)을 수복하며 회흘이 바야흐로 강성하니 그들과 통호하고 북쪽으로는 강한 기병을 불러들이고 남쪽으로는 集諸城 대군이 한번에 일어난다면 가히 이경을 수복할 수 있소. 사직의 치욕을 씻으며 위로는 명철한 군주에게 보답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것 또한 신하의 정성스러운 마음이자 나라의 대계요.
두홍점은 바로 그날 이형에게 올릴 표에 삭방의 군사력과 군수품, 병기, 식량을 기록하고 이함을 평량으로 보냈으며 이형은 매우 기뻐하였다. 두홍점은 이형이 평량을 출발했다는 사실을 알고 북쪽 경계의 백초돈(白草頓)에서 이형을 맞이했으며 이형이 사졸들을 위로하던 가운데 다음과 같이 진언했다.
삭방은 천하에서 강한 군대요, 영주(靈州)는 무력을 쓸 만한 땅입니다. 지금 회흘이 화의를 청했고 토번이 복속했으며 천하의 군읍은 모두 굳게 지키며 칙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비록 역적에게 점령당했지만 역시 머지않아 수복되기를 바라고 있으니 전하께서 군대를 정비하여 단번에 신속하게 진군하신다면 역적들은 족히 멸할 것입니다.
이형은 두홍점의 진언을 받아들였다. 이후 영무(靈武)에 이르러 두홍점과 배면 등은 이형에게 황제로 즉위하여 민심에 순응해야 한다고 권했다. 이형은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대신들이 5번이나 표문을 올린 끝에 결국 권유를 받아들였다. 숙종이 즉위한 뒤 두홍점은 병부낭중(兵部郞中)에 제수되고 지중서사인사(知中書舍人事)를 맡았으며 이윽고 무부시랑(武部侍郞)으로 전임되었다.
757년, 어사대부(御史大夫)를 겸임하고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 양주(涼州) 도독이 되었다. 장안과 낙양이 수복된 뒤 두홍점은 형주대도독부(荊州大都督府) 장사, 형남절도사(荊南節度使)로 전임되었다.
759년, 양주(襄州)의 대장(大將) 강초원(康楚元)과 장가연(張嘉延)이 양주성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켜 자사 왕정(王政)이 달아났다. 장가연이 형주를 습격하자 두홍점은 이 소식을 듣고 성을 버리고 달아났으며, 예주(澧州), 낭주(朗州), 협주(硤州), 귀주(歸州) 등지에서도 두홍점이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혼란에 빠져 뿔뿔이 흩어져 산골짜기로 숨었다. 이후 상주(商州) 자사 위륜이 장가연과 강초원을 토벌하면서 반란은 평정되었다.
760년, 상서좌승(尙書右丞), 이부시랑(吏部侍郞), 태상경(太常卿)으로 제수되고 예의사(禮儀使)를 맡았다.
762년, 현종과 숙종이 붕어하고 숙종의 태자 이예가 즉위하니 이가 제8대 황제인 대종이었다. 두홍점은 현종과 숙종의 무덤을 세우는 일을 맡았으며 능이 세워진 뒤 광록대부(光祿大夫)가 더해지고 위국공(衛國公)으로 봉해졌다.
764년, 병부시랑(兵部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로 임명되고 뒤이어 중서시랑(中書侍郞)으로 전임되었다.
765년, 검남서천병마사(劍南西川兵馬使) 최간이 절도사 곽영예를 살해하고 성도(成都)를 점거하며 스스로 유후를 칭했다. 그러자 공주(邛州)의 아장(衙將) 백정절(柏貞節), 노주(瀘州)의 아장 양자림(楊子琳), 검주(劍州)의 아장 이창기(李昌巙) 등이 최간을 토벌하고자 군대를 일으켰고 이로 인해 서촉이 혼란에 빠졌다.
766년, 대종이 두홍점에게 산검부원수(山劍副元帥), 검남서천절도사(劍南西川節度使)를 겸임하게 하여 반란을 진압하도록 명했다. 하지만 두홍점은 원대한 계획이 없었고 나약한데다가 불교에 심취해서 군대를 부리는 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 성도부에 이르러 두홍점은 최간의 무예를 두려워해서 감히 그에게 죄를 묻지 못했으며 대신 최간을 검남서천절도사로 삼아달라는 표문을 조정으로 보냈다. 당시 토번의 침입으로 관중이 혼란에 빠져들어서 두홍점이 고립되자 대종은 부득이하게 이를 받아들였으며 최간을 검남서천행군사마(劍南西川行軍司馬)로, 백정절을 공주 자사로, 양자림을 노주 자사로 삼아 각각 군대를 물리라고 명했다. 그리고 입조를 청하며 거듭 최간을 병마유후(兵馬留後)로 삼아달라고 청했다.
767년, 최간을 성도부윤, 검남서천절도사로 삼고 두홍점을 수도로 불러들였다.
768년, 왕진을 대신하여 동도유수(東都留守)가 되었고 하남회서산남동도부원수(河南淮西山南東道副元帥)를 맡았으며 종전과 같이 평장사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두홍점은 병으로 인해 사직을 청하여 결국 부임하지 않았다.
두홍점은 769년에 죽어서 태위(太尉)로 추증되고 문헌(文憲)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757년, 어사대부(御史大夫)를 겸임하고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 양주(涼州) 도독이 되었다. 장안과 낙양이 수복된 뒤 두홍점은 형주대도독부(荊州大都督府) 장사, 형남절도사(荊南節度使)로 전임되었다.
759년, 양주(襄州)의 대장(大將) 강초원(康楚元)과 장가연(張嘉延)이 양주성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켜 자사 왕정(王政)이 달아났다. 장가연이 형주를 습격하자 두홍점은 이 소식을 듣고 성을 버리고 달아났으며, 예주(澧州), 낭주(朗州), 협주(硤州), 귀주(歸州) 등지에서도 두홍점이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혼란에 빠져 뿔뿔이 흩어져 산골짜기로 숨었다. 이후 상주(商州) 자사 위륜이 장가연과 강초원을 토벌하면서 반란은 평정되었다.
760년, 상서좌승(尙書右丞), 이부시랑(吏部侍郞), 태상경(太常卿)으로 제수되고 예의사(禮儀使)를 맡았다.
762년, 현종과 숙종이 붕어하고 숙종의 태자 이예가 즉위하니 이가 제8대 황제인 대종이었다. 두홍점은 현종과 숙종의 무덤을 세우는 일을 맡았으며 능이 세워진 뒤 광록대부(光祿大夫)가 더해지고 위국공(衛國公)으로 봉해졌다.
764년, 병부시랑(兵部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로 임명되고 뒤이어 중서시랑(中書侍郞)으로 전임되었다.
765년, 검남서천병마사(劍南西川兵馬使) 최간이 절도사 곽영예를 살해하고 성도(成都)를 점거하며 스스로 유후를 칭했다. 그러자 공주(邛州)의 아장(衙將) 백정절(柏貞節), 노주(瀘州)의 아장 양자림(楊子琳), 검주(劍州)의 아장 이창기(李昌巙) 등이 최간을 토벌하고자 군대를 일으켰고 이로 인해 서촉이 혼란에 빠졌다.
766년, 대종이 두홍점에게 산검부원수(山劍副元帥), 검남서천절도사(劍南西川節度使)를 겸임하게 하여 반란을 진압하도록 명했다. 하지만 두홍점은 원대한 계획이 없었고 나약한데다가 불교에 심취해서 군대를 부리는 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 성도부에 이르러 두홍점은 최간의 무예를 두려워해서 감히 그에게 죄를 묻지 못했으며 대신 최간을 검남서천절도사로 삼아달라는 표문을 조정으로 보냈다. 당시 토번의 침입으로 관중이 혼란에 빠져들어서 두홍점이 고립되자 대종은 부득이하게 이를 받아들였으며 최간을 검남서천행군사마(劍南西川行軍司馬)로, 백정절을 공주 자사로, 양자림을 노주 자사로 삼아 각각 군대를 물리라고 명했다. 그리고 입조를 청하며 거듭 최간을 병마유후(兵馬留後)로 삼아달라고 청했다.
767년, 최간을 성도부윤, 검남서천절도사로 삼고 두홍점을 수도로 불러들였다.
768년, 왕진을 대신하여 동도유수(東都留守)가 되었고 하남회서산남동도부원수(河南淮西山南東道副元帥)를 맡았으며 종전과 같이 평장사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두홍점은 병으로 인해 사직을 청하여 결국 부임하지 않았다.
두홍점은 769년에 죽어서 태위(太尉)로 추증되고 문헌(文憲)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 장안과 낙양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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