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수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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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문충공(河南文忠公) 褚遂良 | 저수량 | |
작호 | 하남군공(河南郡公) |
시호 | 문충(文忠) |
성 | 저(褚) |
이름 | 수량(遂良) |
자 | 등선(登善) |
부친 | 저량(褚亮) |
조부 | 저개(褚玠) |
생몰 | 596년 ~ 658년 |
출신 | 항주(杭州) 전당현(錢塘縣) |
국적 | 수(隋) → 당(唐) |
재임 | 당의 상서우복야 |
653년 ~ 655년 |
596년 저량의 아들로 태어난 저수량은 아버지가 양현감과 교유한 것으로 인해 서해군 사호참군으로 좌천되자, 아버지를 따라 농우로 옮겨 살았다. 그러다가 수나라가 양제의 잇따른 실책으로 인해 혼란이 일어났고, 이런 가운데 설거가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황제를 칭한다. 설거에 의해 아버지는 황문시랑으로 임명되고, 저수량은 통사사인으로 임명되었다가, 618년 설거 세력이 멸망하면서 당나라로 귀순하였고 진주(秦州) 도독부(都督府) 개조참군(鎧曹參軍)으로 제수되었다.
당나라로 귀순한 이후, 아버지가 진왕 이세민의 문학관 학사를 맡으면서 저수량은 홍문관의 일상사무를 맡게 되었고 홍문관에서 자신의 학문을 키워나간다. 여기서 저수량은 진왕 이세민으로부터 호감을 받게 되었고, 626년 이세민이 현무문의 변을 일으킨 이후 중앙 정계에 다가서기 시작한다.
당나라로 귀순한 이후, 아버지가 진왕 이세민의 문학관 학사를 맡으면서 저수량은 홍문관의 일상사무를 맡게 되었고 홍문관에서 자신의 학문을 키워나간다. 여기서 저수량은 진왕 이세민으로부터 호감을 받게 되었고, 626년 이세민이 현무문의 변을 일으킨 이후 중앙 정계에 다가서기 시작한다.
저수량은 636년 비서랑에서 기거랑으로 직위를 옮겼다. 638년, 태종의 신임을 받았던 우세남이 죽자, 위징은 저수량이 우세남을 대신할 인물로 적합하다며 그를 천거하여, 저수량을 시서(侍書)로 삼았다. 저수량은 이후 간의대부가 되어 지기거사(知起居事)[1]를 겸임하였다. 태종이 저수량에게 어떤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지 보여달라고 이야기하자, 저수량은 이렇게 진언하였다.
지금의 기거란 옛날의 좌우사(左右史)에 해당하며, 임금의 언사는 물론 임금의 장단점을 기록하여 이를 경계로 삼습니다. 저는 제왕이 자신의 기록을 직접 봤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태종이 저수량의 대답에 자신이 잘못된 일을 했을 때에도 기록할 것이냐는 물음에 저수량은 역시 그럴 것이라고 답변하였다.
이승건이 태자의 자리에서 쫓겨난 이후, 태종은 후계자 자리를 놓고 위왕 이태와 진왕 이치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는데, 저수량은 진왕 이치를 추천하여 이치의 보좌를 맡기도 한다.
태종이 직접 고구려 정벌을 준비하려고 하자, 저수량은 감정을 앞세워서 군사를 일으키면 안위를 예측하기 어렵다는 말을 하면서 고구려 정벌을 반대하기도 하였다. 이세적이 이전에 설연타를 끝까지 토벌하려다가 위징의 간언으로 기회를 놓친 것을 거론하고 태종이 이세적의 이야기에 찬성하면서 고구려 정벌을 선언하자, 저수량은 다시 여기에 반대하기도 했다. 물론 이때의 고구려 정벌은 실패로 끝나면서 결과적으로는 저수량의 말이 옳았다.
태종이 임종한 649년에는 장손무기와 함께 탁고대신이 되었다.
조정의 중진까지 올랐던 저수량은 황후 책봉 문제로 인해 고종과 대립하게 된다.
고종은 당시 황후였던 왕씨를 폐위하고 자신이 총애하는 후궁인 소의 무씨를 황후로 책봉하려고 하였다. 저수량은 여기에 대해 장손무기와 함께 강하게 반대하였다. 반면 허경종과 이의부 등이 측천무후의 황후 책봉을 찬성하면서 찬성파와 반대파의 대립이 나타났다.
특히 저수량은 관건을 벗고 이마에 피가 나도록 머리를 조아려서, 고종이 저수량의 태도에 분노하여 그를 궐 밖으로 내쫓기도 하였다. 이후 고종이 이세적과 황후 책봉을 의논할 때, 이세적은 “이것은 도리어 폐하의 집안일이지, 바깥사람에게 묻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답변하여 은근슬쩍 소의 무씨의 황후 책봉을 찬성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소의 무씨는 고종에 의해 황후로 책봉되었으니, 이가 바로 측천무후이다.
고종은 당시 황후였던 왕씨를 폐위하고 자신이 총애하는 후궁인 소의 무씨를 황후로 책봉하려고 하였다. 저수량은 여기에 대해 장손무기와 함께 강하게 반대하였다. 반면 허경종과 이의부 등이 측천무후의 황후 책봉을 찬성하면서 찬성파와 반대파의 대립이 나타났다.
특히 저수량은 관건을 벗고 이마에 피가 나도록 머리를 조아려서, 고종이 저수량의 태도에 분노하여 그를 궐 밖으로 내쫓기도 하였다. 이후 고종이 이세적과 황후 책봉을 의논할 때, 이세적은 “이것은 도리어 폐하의 집안일이지, 바깥사람에게 묻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답변하여 은근슬쩍 소의 무씨의 황후 책봉을 찬성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소의 무씨는 고종에 의해 황후로 책봉되었으니, 이가 바로 측천무후이다.
측천무후가 황후로 책봉된 이후, 저수량은 담주(潭州) 도독으로 좌천되었다. 저수량은 계주(桂州) 도독으로 전임되었다가, 얼마 안 있어 다시 애주(愛州) 자사로 좌천되었다.
측천무후의 황후 책봉을 찬성한 허경종과 이의부는 내제와 한원이 저수량의 모반에 동조했다고 무고한다. 저수량은 자신의 신세를 고종에게 호소해보기도 했으나 거절당하고 결국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된다. 저수량이 죽은 이후에도 측천무후는 저수량에 대한 원한이 대단해서 그의 관작을 삭탈시키고 그의 두 아들인 저언포(褚彦甫)와 저언충(褚彦沖)을 애주로 유배시켰다가 살해한다.
705년 신룡정변 이후, 저수량은 측천무후의 유조에 따라 관작이 회복되었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747년에는 현종의 조칙에 의해 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덕종 시기에는 태위로 추증되었다.
측천무후의 황후 책봉을 찬성한 허경종과 이의부는 내제와 한원이 저수량의 모반에 동조했다고 무고한다. 저수량은 자신의 신세를 고종에게 호소해보기도 했으나 거절당하고 결국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된다. 저수량이 죽은 이후에도 측천무후는 저수량에 대한 원한이 대단해서 그의 관작을 삭탈시키고 그의 두 아들인 저언포(褚彦甫)와 저언충(褚彦沖)을 애주로 유배시켰다가 살해한다.
705년 신룡정변 이후, 저수량은 측천무후의 유조에 따라 관작이 회복되었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747년에는 현종의 조칙에 의해 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덕종 시기에는 태위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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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거주는 군주의 옆에서 군주의 언행을 기록하는 관원으로 사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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