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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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장군 張獻誠 | 장헌성 | |
성 | 장(張) |
이름 | 헌성(獻誠) |
부친 | 장수규(張守珪) |
국적 | 당(唐) |
출신 | 합주(陜州) 평륙현(平陸縣) |
출생 | 722년 ~ 767년 |
합주(陜州) 평륙현(平陸縣) 출신으로 722년에 장수규의 아들로 태어났다.
천보 연간[1]에 태자통사사인, 전설랑(典設郞), 태원부 사조참군, 맹현령(孟縣令), 좌청도솔(左淸道率), 단주(檀州) 자사를 역임하였다.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안록산에게 투항하여 관직을 받았고, 위위소경으로 임명되어 사사명의 휘하에서 변주를 수비했다. 761년 사사명이 아들인 사조의에게 살해된 뒤, 장헌성은 사조의로부터 병부시랑, 변주 절도사로 임명되었다.
762년, 사조의가 대패하여 변주로 달아나자, 장헌성은 사조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당나라에 귀순하였다. 장헌성은 특진, 변주 자사, 변주 절도사로 임명되고 남양군공(南陽郡公)에 봉해졌다. 이후 보응군(寶應軍) 좌상병마사(左廂兵馬使)로 임명되고 등국공(鄧國公)으로 진봉되었다.
764년에는 당나라에 반기를 든 고옥(高玉)을 사로잡아 바쳤고 양주(梁州) 자사, 산남서도(山南西道) 절도등사로 임명되었으며, 검교공부상서가 더해졌다. 이후 검남동천 절도사를 겸했는데, 최간이 검남서천 절도사 곽영예를 죽이자, 장헌성은 최간을 공격했다가 패배했다.
767년 병으로 인해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주청하며 자신의 사촌동생인 장헌공(張獻恭)을 자신의 후임으로 천거하였다. 대종은 장헌성의 주청을 받아들여 장헌성을 검교호부상서, 지상서성사로 삼았다. 이후 장헌성은 다시 모든 관직에서 물러났고 같은 해에 사망하여 태자태사, 어사대부로 추증되었다.
천보 연간[1]에 태자통사사인, 전설랑(典設郞), 태원부 사조참군, 맹현령(孟縣令), 좌청도솔(左淸道率), 단주(檀州) 자사를 역임하였다.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안록산에게 투항하여 관직을 받았고, 위위소경으로 임명되어 사사명의 휘하에서 변주를 수비했다. 761년 사사명이 아들인 사조의에게 살해된 뒤, 장헌성은 사조의로부터 병부시랑, 변주 절도사로 임명되었다.
762년, 사조의가 대패하여 변주로 달아나자, 장헌성은 사조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당나라에 귀순하였다. 장헌성은 특진, 변주 자사, 변주 절도사로 임명되고 남양군공(南陽郡公)에 봉해졌다. 이후 보응군(寶應軍) 좌상병마사(左廂兵馬使)로 임명되고 등국공(鄧國公)으로 진봉되었다.
764년에는 당나라에 반기를 든 고옥(高玉)을 사로잡아 바쳤고 양주(梁州) 자사, 산남서도(山南西道) 절도등사로 임명되었으며, 검교공부상서가 더해졌다. 이후 검남동천 절도사를 겸했는데, 최간이 검남서천 절도사 곽영예를 죽이자, 장헌성은 최간을 공격했다가 패배했다.
767년 병으로 인해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주청하며 자신의 사촌동생인 장헌공(張獻恭)을 자신의 후임으로 천거하였다. 대종은 장헌성의 주청을 받아들여 장헌성을 검교호부상서, 지상서성사로 삼았다. 이후 장헌성은 다시 모든 관직에서 물러났고 같은 해에 사망하여 태자태사, 어사대부로 추증되었다.
[1] 742년~75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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