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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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당 시대[1]의 시인으로 성당기의 이백, 만당기의 이상은(李商隱)과 함께 삼이(三李)라고 불리며, 시선(詩仙) 이백, 시성(詩聖) 두보, 시불(詩佛) 왕유와 함께 당나라 4대 시인(당시4걸)로 꼽히기도 한다.
당고조의 숙부인 정효왕(鄭孝王) 량(亮)의 운손(雲孫)이고, 회안정왕(淮安靖王) 수(壽)의 잉손(仍孫)이고, 금주대도독(金州大都督) 오국공(吳國公) 효일(孝逸)의 곤손이고, 좌효위대장군 이조(李璪)의 내손이고, 조청대부(朝請大夫) 태자복(太子僕) 이흥(李興)의 현손이고, 심주별가(深州別駕) 이도(李陶)의 증손이고, 섬현령(陝縣令)을 지내며 소백사(邵伯祠)를 다시 세우고 비석을 세운 이진숙(李晉肅)과 부인 정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하는 비록 황족이지만 두보의 친척이라는 것 빼고는 거의 방계 중의 방계였던지라 실질적으로는 별볼일 없었고 아버지 이진숙도 출세를 못 하고 일찍 죽었고 재산도 넉넉하지 못 했다.
이하는 어릴 때부터 싹수가 남달라 식은 죽 먹듯 시구를 지어냈다. 그는 불과 17세의 나이로 당대 문단의 거두이자 중국 시사에서도 이름 높은 한유를 찾아갔다. 물론 듣도 보도 못한 어린 것을 한유가 만나줄 리 없었으나 이하는 하인에게 자신의 시를 전했고 한유는 첫 구절을 보자마자 황급히 이하를 맞아들였다. 재능도 뛰어났고 거두이자 높은 관직에 있었던 한유의 후원을 받게 되었으니 이하의 출세는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허나 과거의 첫걸음인 진사시를 치르기 위해 장안을 찾아간 이하는 청천벽력 같은 개소리를 듣게 되는데, 진사의 진(進)과 이하의 부친 이진숙의 진(晉)이 같은 소리니, 이 기휘 때문에 너는 진사가 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이는 이하와 같이 진사시에 응시한 다른 경쟁자들의 망언이었으나 받아들여졌고, 이에 한유 역시 휘의 변이라는 글을 통해 극력 반론했으나[2] 끝내 주변인들은 그런 개소리가 진짜라며 듣지 않아 이하는 진사시를 치르지 못하고 실의에 빠져 창곡으로 돌아갔다. 한유는 그런 이하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어떻게든 간에 이하를 관직생활에 올리고자 여러가지로 물심양면 후원했지만 그때마다 주변 사람들은 들어주지 않았다. 한유는 포기하지 않고 황실에까지 건의를 올렸고 황실에서는 고민 끝에 이하가 방계 황족인 것을 감안해서 나름의 배려로 낮은 벼슬을 내린다.
이듬해, 이하의 일생에서 잠깐의 빛이 들어오니, 이하는 한유의 적극 추천으로 봉례랑이라는 관직을 받았긴 하였으나 이는 원래부터가 황족에게 돌아가는 종구품의 벼슬자리로 제사 때 제기의 위치 및 백관들의 앉는 자리를 정해주는 일이었다. 2년간 봉례랑으로 봉직하나 스스로 물러난다. 그저 종실이라 봉례랑을 하고 있을 뿐이라 여겨 별다른 희망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높은 자부심에 진사도 거치지 못한 자신의 처지와 과거를 거친 다른 이들을 비교하며 차마 견딜 수 없었을 수도, 병약한 몸에 종구품 실무직의 업무가 과중했을 수도.[3]
낙향한 다음해 다시 청운의 뜻을 품고 친구를 따라 산서성으로 향하나 별 신통한 일은 없었다. 결국 고향에 돌아온 이하는 병을 얻게 되고 시름시름 앓다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스물다섯부터 이미 백발이었다고 한다. 아내와도 일찍 사별해 자식은 없었다.
짧은 생을 살다 갔음에도 불구하고 그 흔적이 강렬했기에 여러 일화와 고사가 대시인을 둘러싸고 있다. 일찍이 심장을 토해야만 시 쓰기를 그만두겠다는 모친의 탄식처럼 시에 미쳤던 이하는 조랑말과 서동을 대동하고 이곳저곳을 다니다 이하가 아름다운 시귀를 뱉으면 서동이 이를 받아적고는 비단주머니에 담았다고 하는데 아름다운 글귀를 일컫는 금낭가구(錦囊佳句)란 어휘는 이하의 고사로부터 유래하였다.
비단주머니 속에 고이 간직했던 이하의 시는 그 주인에게 시귀(詩鬼), 혹은 '다시 없는 귀신과 같은 재주'란 뜻의 귀재절(鬼才絶)라는 명칭을 안겨 주었는데, 이는 이하의 시 세계가 중국시사에 있어 그 전에도 없었고 그 앞으로 지금까지도 없을 만큼의 독특함을 보유하였기 때문이다. 어머니인 정씨 부인은 아들의 짧은 생을 이해한 듯 "내 아들은 매일 마지막을 사는 것처럼 시를 쓰는구나..."라고 탄식하였다. 늦은 저녁식사를 한 뒤, 시동이 가져온 붓과 먹, 벼루를 받고 자신이 담은 글귀를 토대로 시를 지으니 그의 일생에서 짧지만 많은 시가 내려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천상수문, 우귀사신이란 단어 역시 이하 시세계의 기묘함을 엿볼 수 있는 단면으로 기능할 수 있다. 천상수문(天上修文)은 이하가 젊어 세상을 떠날 때 어머니더러 지금 옥황상제의 사자가 내 앞에 백옥루의 상량문을 지어달라고 와 있으니 그리로 가겠다고 유언을 남긴 것에서 비롯한다. 이 이야기는 어머니를 안심시키려는 효성의 발로, 정말 죽음을 눈 앞에 두고 환각 둘 중 어느 것이어도 형언키 어려운 향기를 품긴다. 우귀사신(牛鬼蛇神)은 이하 시인 두목이 머리 대신 소대가리가 솟아있는 귀신이나 뱀의 몸뚱이를 한 귀신으로도 이하 시의 허황되고 환상적인 면을 형용키엔 부족함이 있다고 일컬은 데에서 비롯한다.
그의 대표작인 소소소묘는 남북조시대 기생 소소묘, 즉 처녀귀신과 접신하는(...) 내용이다. # ## 다른 대표작인 <장진주(將進酒, 술을 올리는 노래)>, <신현곡(神絃曲, 귀신에게 제사 지내는 노래)>는 아예 대놓고다(...). #
절망을 다룬 시도 많다. <추래(秋來)>, <상심행(傷心行)>이나 <증진상(贈陣商, 진상에게 드림)>은 그야말로 음울한 시. #
당고조의 숙부인 정효왕(鄭孝王) 량(亮)의 운손(雲孫)이고, 회안정왕(淮安靖王) 수(壽)의 잉손(仍孫)이고, 금주대도독(金州大都督) 오국공(吳國公) 효일(孝逸)의 곤손이고, 좌효위대장군 이조(李璪)의 내손이고, 조청대부(朝請大夫) 태자복(太子僕) 이흥(李興)의 현손이고, 심주별가(深州別駕) 이도(李陶)의 증손이고, 섬현령(陝縣令)을 지내며 소백사(邵伯祠)를 다시 세우고 비석을 세운 이진숙(李晉肅)과 부인 정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하는 비록 황족이지만 두보의 친척이라는 것 빼고는 거의 방계 중의 방계였던지라 실질적으로는 별볼일 없었고 아버지 이진숙도 출세를 못 하고 일찍 죽었고 재산도 넉넉하지 못 했다.
이하는 어릴 때부터 싹수가 남달라 식은 죽 먹듯 시구를 지어냈다. 그는 불과 17세의 나이로 당대 문단의 거두이자 중국 시사에서도 이름 높은 한유를 찾아갔다. 물론 듣도 보도 못한 어린 것을 한유가 만나줄 리 없었으나 이하는 하인에게 자신의 시를 전했고 한유는 첫 구절을 보자마자 황급히 이하를 맞아들였다. 재능도 뛰어났고 거두이자 높은 관직에 있었던 한유의 후원을 받게 되었으니 이하의 출세는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허나 과거의 첫걸음인 진사시를 치르기 위해 장안을 찾아간 이하는 청천벽력 같은 개소리를 듣게 되는데, 진사의 진(進)과 이하의 부친 이진숙의 진(晉)이 같은 소리니, 이 기휘 때문에 너는 진사가 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이는 이하와 같이 진사시에 응시한 다른 경쟁자들의 망언이었으나 받아들여졌고, 이에 한유 역시 휘의 변이라는 글을 통해 극력 반론했으나[2] 끝내 주변인들은 그런 개소리가 진짜라며 듣지 않아 이하는 진사시를 치르지 못하고 실의에 빠져 창곡으로 돌아갔다. 한유는 그런 이하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어떻게든 간에 이하를 관직생활에 올리고자 여러가지로 물심양면 후원했지만 그때마다 주변 사람들은 들어주지 않았다. 한유는 포기하지 않고 황실에까지 건의를 올렸고 황실에서는 고민 끝에 이하가 방계 황족인 것을 감안해서 나름의 배려로 낮은 벼슬을 내린다.
이듬해, 이하의 일생에서 잠깐의 빛이 들어오니, 이하는 한유의 적극 추천으로 봉례랑이라는 관직을 받았긴 하였으나 이는 원래부터가 황족에게 돌아가는 종구품의 벼슬자리로 제사 때 제기의 위치 및 백관들의 앉는 자리를 정해주는 일이었다. 2년간 봉례랑으로 봉직하나 스스로 물러난다. 그저 종실이라 봉례랑을 하고 있을 뿐이라 여겨 별다른 희망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높은 자부심에 진사도 거치지 못한 자신의 처지와 과거를 거친 다른 이들을 비교하며 차마 견딜 수 없었을 수도, 병약한 몸에 종구품 실무직의 업무가 과중했을 수도.[3]
낙향한 다음해 다시 청운의 뜻을 품고 친구를 따라 산서성으로 향하나 별 신통한 일은 없었다. 결국 고향에 돌아온 이하는 병을 얻게 되고 시름시름 앓다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스물다섯부터 이미 백발이었다고 한다. 아내와도 일찍 사별해 자식은 없었다.
짧은 생을 살다 갔음에도 불구하고 그 흔적이 강렬했기에 여러 일화와 고사가 대시인을 둘러싸고 있다. 일찍이 심장을 토해야만 시 쓰기를 그만두겠다는 모친의 탄식처럼 시에 미쳤던 이하는 조랑말과 서동을 대동하고 이곳저곳을 다니다 이하가 아름다운 시귀를 뱉으면 서동이 이를 받아적고는 비단주머니에 담았다고 하는데 아름다운 글귀를 일컫는 금낭가구(錦囊佳句)란 어휘는 이하의 고사로부터 유래하였다.
비단주머니 속에 고이 간직했던 이하의 시는 그 주인에게 시귀(詩鬼), 혹은 '다시 없는 귀신과 같은 재주'란 뜻의 귀재절(鬼才絶)라는 명칭을 안겨 주었는데, 이는 이하의 시 세계가 중국시사에 있어 그 전에도 없었고 그 앞으로 지금까지도 없을 만큼의 독특함을 보유하였기 때문이다. 어머니인 정씨 부인은 아들의 짧은 생을 이해한 듯 "내 아들은 매일 마지막을 사는 것처럼 시를 쓰는구나..."라고 탄식하였다. 늦은 저녁식사를 한 뒤, 시동이 가져온 붓과 먹, 벼루를 받고 자신이 담은 글귀를 토대로 시를 지으니 그의 일생에서 짧지만 많은 시가 내려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천상수문, 우귀사신이란 단어 역시 이하 시세계의 기묘함을 엿볼 수 있는 단면으로 기능할 수 있다. 천상수문(天上修文)은 이하가 젊어 세상을 떠날 때 어머니더러 지금 옥황상제의 사자가 내 앞에 백옥루의 상량문을 지어달라고 와 있으니 그리로 가겠다고 유언을 남긴 것에서 비롯한다. 이 이야기는 어머니를 안심시키려는 효성의 발로, 정말 죽음을 눈 앞에 두고 환각 둘 중 어느 것이어도 형언키 어려운 향기를 품긴다. 우귀사신(牛鬼蛇神)은 이하 시인 두목이 머리 대신 소대가리가 솟아있는 귀신이나 뱀의 몸뚱이를 한 귀신으로도 이하 시의 허황되고 환상적인 면을 형용키엔 부족함이 있다고 일컬은 데에서 비롯한다.
그의 대표작인 소소소묘는 남북조시대 기생 소소묘, 즉 처녀귀신과 접신하는(...) 내용이다. # ## 다른 대표작인 <장진주(將進酒, 술을 올리는 노래)>, <신현곡(神絃曲, 귀신에게 제사 지내는 노래)>는 아예 대놓고다(...). #
절망을 다룬 시도 많다. <추래(秋來)>, <상심행(傷心行)>이나 <증진상(贈陣商, 진상에게 드림)>은 그야말로 음울한 시. #
현대중국의 교육과정에서는 중학교에서 이하의 작품 1개, 고등학교에서 1개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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