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유(당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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渭城朝雨浥輕塵 위성조우읍경진
위성의 아침 비는 가벼운 먼지를 적시고
客舍靑靑柳色新 객사청청류색신
객사에는 푸르고 푸른 버들빛이 새로워라
勸君更盡一杯酒 권군갱진일배주
권하노니 그대는 다시 이 술잔을 들라
西出陽關無故人 서출양관무고인
서쪽으로 양관 땅 나서면 아는 이 없으리라.ㅡ안서로 나가는 원이를 보내면서(送元二使安西 송원이사안서)
왕유는 아홉 살 때부터 문학적 재능을 보였고, 15세 때부터 장안의 명사들과 교유했으며, 개원 7년(719년) 진사(進士)로 급제했다. 그는 태악승(太樂丞)[3]이 되었으나, 바로 이듬해에 산동성의 제주사창참군(濟州司倉参軍)으로 좌천당했다. 《집이기》에 따르면 황제만이 출 수 있는 황사자(黃獅子)라는 춤을 악인이 불경하게 제멋대로 추었기 때문에 책임자로서 이에 대한 책임을 물은 것으로 전하고 있는데, 그보다는 왕유가 종친들과도 가까운 사이였기에 현종이 그를 종친들로부터 떨어뜨려 놓은 것이라는 해석도 존재한다.
734년, 다시 수도로 소환되어 급사중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안사의 난이 일어났고, 756년에 장안이 함락되고 왕유도 반란군에 포로로 잡혀 낙양으로 압송되어, 원치 않은 관직 생활을 해야 했다. 장안이 수복된 뒤에 어쨌든 반란군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할 뻔 했으나 형이 고위 관리로 그의 구명에 나섰으며, 반란군에 잡혀있을 때에도 당 황실에 대한 충성을 토로한[4]시를 썼다는 점이 부각되어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그는 차츰 속세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더욱 슬픔에 빠진 그는 장안 종남산의 망천(輞川) 옆에 있는 시골 집에 틀어박혀 불교 연구에 몰두했다.
한국에서는 두보나 이백에 비해 다소 알려져 있지 않은 감이 있다.
일본의 견당사로 당 조정에서 비서감을 지냈던 아베노 나카마로(阿倍仲麿呂)가 귀국할 때 지어준 '일본으로 돌아가는 비서감 조형을 보내며(送祕書晁監還日本)'라는 시가 있는데, 이 시는 오노 후유미의 소설 십이국기 '마성의 아이'에 실려 있다.
734년, 다시 수도로 소환되어 급사중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안사의 난이 일어났고, 756년에 장안이 함락되고 왕유도 반란군에 포로로 잡혀 낙양으로 압송되어, 원치 않은 관직 생활을 해야 했다. 장안이 수복된 뒤에 어쨌든 반란군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할 뻔 했으나 형이 고위 관리로 그의 구명에 나섰으며, 반란군에 잡혀있을 때에도 당 황실에 대한 충성을 토로한[4]시를 썼다는 점이 부각되어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그는 차츰 속세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더욱 슬픔에 빠진 그는 장안 종남산의 망천(輞川) 옆에 있는 시골 집에 틀어박혀 불교 연구에 몰두했다.
한국에서는 두보나 이백에 비해 다소 알려져 있지 않은 감이 있다.
일본의 견당사로 당 조정에서 비서감을 지냈던 아베노 나카마로(阿倍仲麿呂)가 귀국할 때 지어준 '일본으로 돌아가는 비서감 조형을 보내며(送祕書晁監還日本)'라는 시가 있는데, 이 시는 오노 후유미의 소설 십이국기 '마성의 아이'에 실려 있다.
積水不可極 바다의 큰 물결 끝이 없는데 安知滄海東 어찌 이 바다의 동쪽을 알 수 있으리 九州何處遠 세상 어느 곳이 이보다 멀까 萬里若乘空 만리 공중을 타고 오르는 것 같도다 向國惟看日 나라를 향하는데 보이는 것이란 오직 해 歸帆但信風 돌아가는 배는 다만 바람에 맡긴다 鰲身映天黑 거북이 몸이 하늘빛에 비쳐서 검고 魚眼射波紅 물고기 눈이 파도 사이로 빨갛게 얼른거리네 鄕樹扶桑外 고향 나무는 동해 저쪽에 있고 主人孤島中 주인은 외로운 섬 안으로 간다네 別離方異域 헤어지면 정말로 다른 나라이니 音信若爲通 소식이 어떻게 전할 수 있으리오 |
주요 작품으로 창주도(滄州圖), 망천도(輞川圖) 등이 있다.
[1] 마힐이라는 단어 자체가 불교의 유마힐거사의 명칭에서 따온 것이다. 왕유가 불교 신자가 된 것은 어머니 최씨의 영향을 받은 것.[2] 여기에 시귀(詩鬼) 이하를 더해 당시사걸(唐詩四傑)이라 부르기도 한다.[3] 태악서(太樂署)의 차관. 이 벼슬은 당나라에서 문관 종8품하인 승무랑(承務郎)이라서 낮은 벼슬이다.[4] 안록산이 장안을 점령한 뒤에 궁중악공은 불러모아 연주를 시켰는데 뇌해청이라는 악공만은 반란군 따위를 위해 연주하지 않겠다며 비파를 집어던져 부쉈고 결국 안록산에게 사지가 찢겨져 죽임을 당했다. 왕유는 이 일을 소재로 시를 썼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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