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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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從願 | 노종원 | |
시호 | 문(文) |
성 | 노(盧) |
이름 | 종원(從願) |
자 | 자공(子龔) |
부친 | 노경일(盧敬一) |
출신 | 상주(相州) 임장현(臨漳縣) |
생몰 | ? ~ 737년 |
당나라의 명신으로 자는 자공(子龔).
노종원의 출신지는 상주(相州) 임장현(臨漳縣)으로 집안은 범양 노씨이며, 노종원은 북위의 탁지상서 노창(盧昶)의 후손이다.
노종원은 명경과에 급제하여 강주(絳州) 하현위(夏縣尉)가 되었고 다시 제거에 응시하여 우습유(右拾遺)가 되었다. 뒤에 우숙정대(右肅政臺) 감찰어사, 산남도(山南道) 출척순무사(黜陟巡撫使), 전중시어사, 중서사인을 역임하였다.
710년 예종이 즉위한 뒤 이부시랑으로 임명되어 6년 동안 관리의 선발을 맡으면서 중종 재위 이후 관리 선발에서 발생한 폐단을 정리했으며, 당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아 배행검, 마재(馬載), 이조은과 비견되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716년, 현종이 전국에서 새로 제수된 현령들을 소집하여 전각에서 책시를 실시할 때 낙제한 이들은 모두 면직시키고 돌려보내 다시 공부하게 하였다. 노종원은 이때 관리 선발에 문제가 드러나 예주(豫州) 자사로 좌천되었다. 노종원은 예주에서 엄격하고 간단명료한 정치를 펼쳤고 안찰사가 노종원의 치적을 1등으로 평가하였으며, 입조하여 공부시랑이 되었고 상서좌승으로 전임되었다. 또한 양도(楊滔), 이부시랑 배최(裴漼), 예부시랑 왕구(王丘), 중서사인 유영식(劉令植)과 함께 개원후격(開元後格)을 다시 정리하여 중서시랑으로 승진했다.
723년, 공부상서로 임명되고 은청광록대부가 더해졌으며 동도 유수를 맡았다. 725년, 태산의 봉선 의식에 참여하여 금자광록대부가 더해졌고 위항(韋抗)을 대신하여 형부상서가 되었다.
어사중승 우문융이 권력을 잡으면서 노종원을 원망하여 노종원이 양전 100경을 소유했다고 현종에게 상주했고 결국 재상에서 파직되었다. 또한 아침에 노종원의 시종이 화살에 맞는 사건이 일어나자 범인을 추격했으나 잡지 못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노종원이 오랫동안 이부에 있었기에 누군가에게 미움을 샀다고 여겼다.
728년 동도 유수가 되었다가 아들인 기거랑 노론(盧論)의 잘못으로 탄핵을 받아 강주(絳州) 자사로 좌천되었으며, 뒤에 태자빈객으로 옮겼다. 732년, 하북에서 기근이 일어나 곡가가 폭등하자, 노종원은 선무처치사(宣撫處置使)가 되어 창고를 열고 굶주린 이들을 구휼하였다. 노종원은 모든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주청하는 표문을 올렸고 현종은 노종원의 주청을 받아들여 이부상서로 임명하고 물러나게 했다.
737년에 사망하여 문(文)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노종원은 명경과에 급제하여 강주(絳州) 하현위(夏縣尉)가 되었고 다시 제거에 응시하여 우습유(右拾遺)가 되었다. 뒤에 우숙정대(右肅政臺) 감찰어사, 산남도(山南道) 출척순무사(黜陟巡撫使), 전중시어사, 중서사인을 역임하였다.
710년 예종이 즉위한 뒤 이부시랑으로 임명되어 6년 동안 관리의 선발을 맡으면서 중종 재위 이후 관리 선발에서 발생한 폐단을 정리했으며, 당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아 배행검, 마재(馬載), 이조은과 비견되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716년, 현종이 전국에서 새로 제수된 현령들을 소집하여 전각에서 책시를 실시할 때 낙제한 이들은 모두 면직시키고 돌려보내 다시 공부하게 하였다. 노종원은 이때 관리 선발에 문제가 드러나 예주(豫州) 자사로 좌천되었다. 노종원은 예주에서 엄격하고 간단명료한 정치를 펼쳤고 안찰사가 노종원의 치적을 1등으로 평가하였으며, 입조하여 공부시랑이 되었고 상서좌승으로 전임되었다. 또한 양도(楊滔), 이부시랑 배최(裴漼), 예부시랑 왕구(王丘), 중서사인 유영식(劉令植)과 함께 개원후격(開元後格)을 다시 정리하여 중서시랑으로 승진했다.
723년, 공부상서로 임명되고 은청광록대부가 더해졌으며 동도 유수를 맡았다. 725년, 태산의 봉선 의식에 참여하여 금자광록대부가 더해졌고 위항(韋抗)을 대신하여 형부상서가 되었다.
어사중승 우문융이 권력을 잡으면서 노종원을 원망하여 노종원이 양전 100경을 소유했다고 현종에게 상주했고 결국 재상에서 파직되었다. 또한 아침에 노종원의 시종이 화살에 맞는 사건이 일어나자 범인을 추격했으나 잡지 못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노종원이 오랫동안 이부에 있었기에 누군가에게 미움을 샀다고 여겼다.
728년 동도 유수가 되었다가 아들인 기거랑 노론(盧論)의 잘못으로 탄핵을 받아 강주(絳州) 자사로 좌천되었으며, 뒤에 태자빈객으로 옮겼다. 732년, 하북에서 기근이 일어나 곡가가 폭등하자, 노종원은 선무처치사(宣撫處置使)가 되어 창고를 열고 굶주린 이들을 구휼하였다. 노종원은 모든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주청하는 표문을 올렸고 현종은 노종원의 주청을 받아들여 이부상서로 임명하고 물러나게 했다.
737년에 사망하여 문(文)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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