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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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말당초 주요 세력 | |||||||
수말당초 군웅 劉武周 | 유무주 | |
가한호 | 정양가한( 定楊可汗) |
생몰 기간 | |
재위 기간 | |
무주(武周) | |
부모 | 부친 유광(劉匡) / 모친 조씨(趙氏) |
황후 | 황후 저씨(皇后 沮氏) |
출신 | 영주(瀛州) 경성현(景城縣) |
수말당초의 군웅 중 한 사람이다. 재위기간은 약 2년으로 동시대에 활약한 여러 군웅들과 비슷하다.
수말당초 군웅들 중에서는 특이하게도 돌궐에 의해 최후를 맞이하였다. 자신의 수하에 수말당초 최고의 맹장으로 꼽히는 울지경덕을 수하로 거느렸으나 그의 능력을 알아보지 못하고 적국에 투항하도록 만들었고 민심을 잃어 스스로 자멸한 행적 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그냥 헛짓거리 하다가 스스로 자멸해서 죽은 일개 군웅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수말당초 때 워낙 엉뚱하게 몰락한 군웅들이 많기 때문에 수말당초 군웅 전체를 평가 할때는 그리 크게 비판을 받지는 않으나 개인적으로 평가를 받을 때는 비판을 피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사서를 보면 당대에 꽤 이름이 알려진듯 하다.
수말당초 군웅들 중에서는 특이하게도 돌궐에 의해 최후를 맞이하였다. 자신의 수하에 수말당초 최고의 맹장으로 꼽히는 울지경덕을 수하로 거느렸으나 그의 능력을 알아보지 못하고 적국에 투항하도록 만들었고 민심을 잃어 스스로 자멸한 행적 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그냥 헛짓거리 하다가 스스로 자멸해서 죽은 일개 군웅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수말당초 때 워낙 엉뚱하게 몰락한 군웅들이 많기 때문에 수말당초 군웅 전체를 평가 할때는 그리 크게 비판을 받지는 않으나 개인적으로 평가를 받을 때는 비판을 피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사서를 보면 당대에 꽤 이름이 알려진듯 하다.
생전에 사용한 연호인 천흥(天興), 단 하나뿐이기 때문에 연호를 따서 천흥제(天興帝)라고도 불리며 동시대 군웅들 처럼 흔히 유무주(劉武周)라 불린다. 수당연의에서는 울지경덕을 수하로 둔 덕분에 비중이 어느정도 있지만 진경을 고문하다 울지경덕을 떠나보내고 그의 양부를 죽여서 끝내 울지경덕에게 최후를 맞는 소인배로 등장한다. 부하인 송금강(宋金剛) 보다는 낮지만 그리 좋은 이미지로 기억되지는 못하며 수당연의를 기반으로 한 여러 드라마에서도 매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송금강도 목이 잘린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수당연의가 만든 수해자라고 볼수도 있다. 작중에 등장하는 군웅은 이밀, 왕세충, 이자통, 주찬, 두건덕, 우문화급, 이연 뿐이고 설거, 소선, 유흑달, 양사도는 등장하지도 못했으니 수당연의 덕분에 어느정도 대중에게 기억되고 있다. 만약 수당연의에 등장하지도 못했으면 수말당초를 정확하게 알고 있지 않은 이상 알기는 어려울것이고 특히 배반한 울지경덕의 양부를 죽이는 소인배 행동 때문에 꽤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유무주의 생년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최선위(崔善爲)[1]의 말에 따르면 어느정도 생년을 추측할 수 있다. 최선위는 유무주가 몰락했을 때 서신에서 그를 해자(孩子)라 칭했는데 비유하는 표현이기는 하겠지만 571년생인 최선위보다 어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유무주가 최초로 년도가 언급되는 부분이 양제의 고구려 원정이기 때문에 정확한 년도를 알기는 어렵다.
정양가한(定楊可汗)은 돌궐이 그에게 하사한 가한호로 이것을 보면 돌궐이 그를 얼마나 신임했는지 알 수있다. 그러나 스스로 몰락하여 돌궐에게 버림받았고 다른 군웅들 처럼 장안으로 압송되어 참수 당하거나 암살되었는데 유무주는 특이하게도 돌궐에게 붙잡혀 참수되었으니 어찌 보면 토사구팽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수당연의가 만든 수해자라고 볼수도 있다. 작중에 등장하는 군웅은 이밀, 왕세충, 이자통, 주찬, 두건덕, 우문화급, 이연 뿐이고 설거, 소선, 유흑달, 양사도는 등장하지도 못했으니 수당연의 덕분에 어느정도 대중에게 기억되고 있다. 만약 수당연의에 등장하지도 못했으면 수말당초를 정확하게 알고 있지 않은 이상 알기는 어려울것이고 특히 배반한 울지경덕의 양부를 죽이는 소인배 행동 때문에 꽤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유무주의 생년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최선위(崔善爲)[1]의 말에 따르면 어느정도 생년을 추측할 수 있다. 최선위는 유무주가 몰락했을 때 서신에서 그를 해자(孩子)라 칭했는데 비유하는 표현이기는 하겠지만 571년생인 최선위보다 어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유무주가 최초로 년도가 언급되는 부분이 양제의 고구려 원정이기 때문에 정확한 년도를 알기는 어렵다.
정양가한(定楊可汗)은 돌궐이 그에게 하사한 가한호로 이것을 보면 돌궐이 그를 얼마나 신임했는지 알 수있다. 그러나 스스로 몰락하여 돌궐에게 버림받았고 다른 군웅들 처럼 장안으로 압송되어 참수 당하거나 암살되었는데 유무주는 특이하게도 돌궐에게 붙잡혀 참수되었으니 어찌 보면 토사구팽이라 할 수 있다.
본래 유무주는 영주(瀛州) 경성현(景城縣) 출신이었으나 부친 유광(劉匡)이 마읍(馬邑)으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유광의 아내였던 조씨(趙氏)는 남편 유광과 함께 집 밖 마당에서 밤새도록 앉아 있으며 시간을 보냈는데 갑자기 한가지의 물체가 조씨와 유광의 눈 앞에 나타났다. 그 물체는 마치 수탉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유광(流光)이 흐르며 조씨의 품으로 깃털을 떨치며 날아 들어왔다. 마침내 조씨는 유무주를 임신했고 이로써 수나라를 대항하여 할거한 군웅 유무주가 세상에 나타났다.
이런 출생에 관한 신화는 주로 황제나 나라를 위해 큰 역할을 한 인물들의 열전에 흔히 나타나는데 예시로 먼저 진서 석륵전을 예로 들어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석)륵이 태어났을 때 붉은 빛이 방에 가득 찼고, 흰 기운이 하늘에서 마당 가운데로 이어지니, 이를 본 사람들은 모두 기이하다 여겼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흔히 알려진 주몽, 박혁거세, 김수로왕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다만 유무주는 대국의 황제도, 나라에 큰 공을 세우지 않음에도 이런 기록을 남긴 것은 특이한 경우라고 보면 되겠다.
이런 출생에 관한 신화는 주로 황제나 나라를 위해 큰 역할을 한 인물들의 열전에 흔히 나타나는데 예시로 먼저 진서 석륵전을 예로 들어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석)륵이 태어났을 때 붉은 빛이 방에 가득 찼고, 흰 기운이 하늘에서 마당 가운데로 이어지니, 이를 본 사람들은 모두 기이하다 여겼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흔히 알려진 주몽, 박혁거세, 김수로왕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다만 유무주는 대국의 황제도, 나라에 큰 공을 세우지 않음에도 이런 기록을 남긴 것은 특이한 경우라고 보면 되겠다.
이렇게 유광과 조씨 사이에서 출생한 유무주는 어릴 때 부터 활과 말에 능한데다 용맹하고 기강이 있었다. 호방한 성격 덕분에 여러 사람과 교우 하였으며 두루두루 친하게 지냈다. 이런 유무주를 본 형 유산백(劉山伯)은 유무주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너가 사람을 가려서 교우하지 않는다면 나는 너의 가문을 파멸시킬 것이다” 이렇게 형에게 모욕을 당한 유무주는 유산백에 의해 자신의 꿈을 펼치지 못하였고 이런 것에 분개한 유무주는 형 유산백의 명령을 어기고 집을 나가게 된다.
의탁할 곳이 없어진 유무주는 태복(太僕) 양의신(楊義臣)에게 의탁했는데 후에 양제가 고구려를 토벌하기 위해 출진하자 여기서 유무주는 공을 세워 양제에 의해 건절교위(建節校尉)로 명해졌고 마읍으로 간 후에는 응양부(鷹揚府) 교위(校尉)로 임명되었다. 이때 마읍의 태수 왕인공에 눈에 들게 되었다.
의탁할 곳이 없어진 유무주는 태복(太僕) 양의신(楊義臣)에게 의탁했는데 후에 양제가 고구려를 토벌하기 위해 출진하자 여기서 유무주는 공을 세워 양제에 의해 건절교위(建節校尉)로 명해졌고 마읍으로 간 후에는 응양부(鷹揚府) 교위(校尉)로 임명되었다. 이때 마읍의 태수 왕인공에 눈에 들게 되었다.
마읍의 태수 왕인공을 섬기게 된 유무주는 왕인공을 따르며 그에게 수많은 은혜를 입었는데 관직을 내렸고 군사도 거느리게 하였다. 그러나 왕인공은 본래 성격이 잔인하고 뇌물을 받아 먹었으며 가난한 이들을 구휼하지 않았다. 유무주는 왕인공의 은혜를 갚는 대신 왕인공의 시녀를 꼬드겨 그녀와 내통했는데 후에 왕인공에게 이 일이 발각될 되어 세상에 알려지고 자신이 왕인공에게 버림받아 죽을 것이 두려워 유무주는 마읍군 사람들을 모이게 한뒤 이렇게 말하였다.
今百姓飢餓, 死人相枕於野, 王府尹閉倉不恤, 豈憂百姓之意乎!
유무주가 군중의 앞에서 이런 발언을 하자 그동안 겪어왔던 모든 분노는 마읍의 태수 왕인공으로 향했다. 무주와 뜻이 같은 이들이 모여 태수 왕인공을 죽이려 출진했고 군이 왕인공의 치소에 다다르자 이렇게 말하였다.
도적들이 이렇게 장사(壯士)들과 뜻을 지키니 나란히 구학(溝壑)에서 죽는다. 이제 창고 안에 좋은 오곡이 쌓여있습니다. 누가 능히 가지겠습니다?盜賊若此, 壯士守志, 並死溝壑。今倉內積粟皆爛, 誰能與我取之?
수나라 조정에서는 반기를 든 유무주를 진압하기 위해 안문군승(雁門郡丞) 진효의(陳孝意)와 호분장(虎賁將) 왕지변(王智辯)를 파견하여 이들을 진압해라 명했다. 그러나 유무주는 이때 돌궐에게 서신을 보내 도와달라 청하였고 이 전투에서 호분장 왕지변이 전사하고 진효의는 안문군(雁門郡)으로 퇴각했다가 안문군에서 살해되었다. 유무주는 이 기세를 몰아 누번군(樓煩郡)으로 진격하여 누번을 함락하고 시필가한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으며, 더불어 분양궁(汾陽宮)의 궁인들을 잡아서 돌궐에게 넘겼다. 그뿐만 아니라 유무주는 이어 정양군(定楊郡)을 함락했고 그에게 정양가한(定楊可汗)이라는 가한호를 하사 받았다.
이로써 수말당초 세력 중 하나인 정양(定楊)이 건국되었고 돌궐과 손을 잡아 세력을 넓혀나갔다. 그러나 후에 돌궐은 유무주와 뜻을 함께하지 않게 된다.
이로써 수말당초 세력 중 하나인 정양(定楊)이 건국되었고 돌궐과 손을 잡아 세력을 넓혀나갔다. 그러나 후에 돌궐은 유무주와 뜻을 함께하지 않게 된다.
돌궐에게 가한호를 하사 받은 유무주는 드디어 스스로 황제를 참칭하기에 이르렀고 자신의 부인인 저씨(沮氏)를 황후로 책봉했으며 연호를 천흥(天興)이라 하였다. 위사(衛士) 양복념(楊伏念)을 좌복야(左僕射)로 임명했고 같은 현 사람 원군장을 내사령(內史令)로 임명했다. 앞서 상곡(上谷) 사람 송금강(宋金剛)이 군중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는데 오히려 두건덕에게 패하여 잔병 4천 5백을 이끌고 유무주가 있는 산서(山西)로 도망치자, 유무주는 그를 넓은 뜻으로 받아들이며 그의 능력을 칭찬했고 그를 송왕(宋王)으로 책봉했다.
유무주는 옛날부터 송금강이 용병술과 지략에 능하다는 것을 알고있었고 4천 5백의 군사를 이끌고 자신에게 투항했다. 그리고 유무주와 뜻을 함께한 송금강은 후에 죽을 때 까지도 유무주와 함께 하게 된다.
유무주는 옛날부터 송금강이 용병술과 지략에 능하다는 것을 알고있었고 4천 5백의 군사를 이끌고 자신에게 투항했다. 그리고 유무주와 뜻을 함께한 송금강은 후에 죽을 때 까지도 유무주와 함께 하게 된다.
송금강은 유무주의 대우에 감사해하며, 자신의 아내를 돌려보내고 유무주의 누이에게 장가를 들었다. 유무주는 진양(晉陽)을 탈취하기 위해 병주로 남하해서 이연을 공격했다. 유무주는 송금강을 서남도 대행대(西南道 大行台)로 임명했고 약 2만 8천의 달하는 군사들을 송금강에게 병합해 주었다.
유무주가 황사령(黃蛇嶺)에 주둔하였고 우복야(右僕射) 배적이 진주도(晉州道) 행군총관(行軍總管)으로 임명되어 유무주를 공격했으나 대패했고, 이에 두려움을 느낀 이원길이 근거지 태원을 버리고 도망을 치면서 당고조가 거병한 근거지 태원을 잃게 되었다. 6일만에 성이 함락되었고 우효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 유홍기 역시 유무주와의 전투에서 패했다. 최선위 또한 약 8천의 군사를 이끌고 유무주를 공격했으나 도중 식량이 떨어져 어쩔수 없이 유무주와 싸우지도 못하고 퇴각했다.
이렇게 이연은 유무주에게 단 한번의 전투로 근거지 태원을 잃고 수많은 군사들을 잃게 되었다. 한편 이 전투로 자신감을 얻은 정양의 군사들은 승승장구로 출전하게 된다. 게다가 하현(夏縣) 출신 여숭무(呂崇茂)는 수나라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켜 하현의 처소로 진격해 하현의 현령을 척살했고 스스로를 위왕(魏王)이라 칭하며 유무주에게 호응했다. 하동(河東) 왕행본(王行本)은 이밀과 송금강에게 동맹을 맺어 크게 혼란스러워졌다.
이들과 대항한 영안현공(永安縣公) 강보의(姜寶誼)는 촉한의 재상 강유의 후손으로 강세원(姜世遠)의 아들인데 우무위대장군(右武衛大將軍)을 지낼 정도로 능력있는 인물이었다. 아들로는 강각(姜恪)과 강협(姜協)이 있었고 이들 모두 능력이 뛰어났다. 유무주가 진주(晉州)를 공격했을 때 유무주를 막아 활약했는데 오히려 유무주에게 막혀 전사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근거지 태원의 함락, 강보의의 죽음, 송금강의 투항, 여숭무의 반란 등 수많은 혼란이 겹친 이연의 군사들은 말 그대로 독안에 든 쥐나 다름없었다.
유무주가 황사령(黃蛇嶺)에 주둔하였고 우복야(右僕射) 배적이 진주도(晉州道) 행군총관(行軍總管)으로 임명되어 유무주를 공격했으나 대패했고, 이에 두려움을 느낀 이원길이 근거지 태원을 버리고 도망을 치면서 당고조가 거병한 근거지 태원을 잃게 되었다. 6일만에 성이 함락되었고 우효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 유홍기 역시 유무주와의 전투에서 패했다. 최선위 또한 약 8천의 군사를 이끌고 유무주를 공격했으나 도중 식량이 떨어져 어쩔수 없이 유무주와 싸우지도 못하고 퇴각했다.
이렇게 이연은 유무주에게 단 한번의 전투로 근거지 태원을 잃고 수많은 군사들을 잃게 되었다. 한편 이 전투로 자신감을 얻은 정양의 군사들은 승승장구로 출전하게 된다. 게다가 하현(夏縣) 출신 여숭무(呂崇茂)는 수나라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켜 하현의 처소로 진격해 하현의 현령을 척살했고 스스로를 위왕(魏王)이라 칭하며 유무주에게 호응했다. 하동(河東) 왕행본(王行本)은 이밀과 송금강에게 동맹을 맺어 크게 혼란스러워졌다.
이들과 대항한 영안현공(永安縣公) 강보의(姜寶誼)는 촉한의 재상 강유의 후손으로 강세원(姜世遠)의 아들인데 우무위대장군(右武衛大將軍)을 지낼 정도로 능력있는 인물이었다. 아들로는 강각(姜恪)과 강협(姜協)이 있었고 이들 모두 능력이 뛰어났다. 유무주가 진주(晉州)를 공격했을 때 유무주를 막아 활약했는데 오히려 유무주에게 막혀 전사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근거지 태원의 함락, 강보의의 죽음, 송금강의 투항, 여숭무의 반란 등 수많은 혼란이 겹친 이연의 군사들은 말 그대로 독안에 든 쥐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런 유무주의 기세도 잠시뿐이었고 단 한 사람의 등장으로 인해 순식간에 반전을 맞이하였다. 당고조의 차남인 진왕 이세민이 출병하면서 위풍당당했던 유무주의 기세는 뚝 꺾이게 된다. 이연은 아들 이세민에게 명하여 군사를 주고 토벌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백벽(柏壁) 전투의 서막이다.
한편 영안왕(永安王) 이효기와 공부상서(工部尙書) 독고회은 그리고 내사시랑(內史侍郞) 당검, 합주 총관 우균(于筠)은 하현을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하고 성남(城南)에 주둔했다가 송금강의 수하 장수였던 울지경덕에 의해 사로잡혔다.
당시 송왕 송금강이 보급을 맡고 있었는데 이세민은 이런 송금강을 노리고 수차례 집요하게 송금강을 공격하였다. 이세민의 지속적인 공세로 인하여 유무주의 군사들은 사기가 뚝 떨어졌고, 송금강이 이세민의 집요한 공격에 맞서게 되면서 보급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었던 유무주 입장에서는 큰 골칫덩어리가 되었다. 때문에 유무주와 송금강은 이세민을 제대로 상대할 수 없었으며 결국 이세민에게 패하게 된다.
이세민은 송금강과 유무주와 8번을 싸워 8번을 모두 이기니 당시 근거지 까지 점거한 유무주는 오히려 전의 이연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한시대를 풍미했던 유무주도 이렇게 몰락하게 되었다.
한편 영안왕(永安王) 이효기와 공부상서(工部尙書) 독고회은 그리고 내사시랑(內史侍郞) 당검, 합주 총관 우균(于筠)은 하현을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하고 성남(城南)에 주둔했다가 송금강의 수하 장수였던 울지경덕에 의해 사로잡혔다.
당시 송왕 송금강이 보급을 맡고 있었는데 이세민은 이런 송금강을 노리고 수차례 집요하게 송금강을 공격하였다. 이세민의 지속적인 공세로 인하여 유무주의 군사들은 사기가 뚝 떨어졌고, 송금강이 이세민의 집요한 공격에 맞서게 되면서 보급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었던 유무주 입장에서는 큰 골칫덩어리가 되었다. 때문에 유무주와 송금강은 이세민을 제대로 상대할 수 없었으며 결국 이세민에게 패하게 된다.
이세민은 송금강과 유무주와 8번을 싸워 8번을 모두 이기니 당시 근거지 까지 점거한 유무주는 오히려 전의 이연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한시대를 풍미했던 유무주도 이렇게 몰락하게 되었다.
유무주가 병주를 침공할 준비를 할 때 원군장은 유무주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병주 이남은 지형이 험준하여 만약 연락도 지원도 받을 수 없는 깊숙한 곳에 군대를 보낸다면 뒤로는 원군이 없을 것으로 염려됩니다. 차라리 북쪽으로는 돌궐과 연합하고 남쪽으로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왕을 칭하는 것이 상책일 것입니다.
하지만 유뮤주는 원군장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원군장에게 삭주(朔州) 수비를 명했다. 하지만 유무주는 패배하여 돌아왔고 자신이 원군장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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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북제문에 수록된 최권회의 장남으로 공교롭게도 생일이 5월 16일에 자가 지은(知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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