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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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남제(前李南帝) | |
천덕(天德, 544 ~ 548) | |
이(李) | |
분(賁) | |
리 비(Lý Bí) | |
생몰 기간 | 503년 ~ 548년 4월 13일 |
재위 기간 | 542년 ~ 548년 |
이분(리비)은 용흥 태평 출신으로[1] 이족(俚族)의 토호였으며, 그의 7대조는 전한 말기 혼란을 피해 교주 지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처음엔 소량으로 일을 나갔지만 전란으로 고향에 다시 돌아왔다. 당시 소량의 황족 출신인 교주 자사 소자(蕭諮)는 폭정으로 민심을 잃었는데, 이분은 참파가 교주를 친 틈을 타, 호족 출신인 채준(蔡樽), 조숙(趙肅) 등과 힘을 합쳐 541년 교주의 소자를 공격했고, 소자는 놀라 광주(廣州) 지방으로 도망쳤다.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양군이 쳐들어 왔으나 격퇴시켰고, 이후 참파의 공격을 막아냈다.
양군(梁軍)을 물리친 이분은 542년 교주의 용편(龍編)을 점령한 후 그곳에서 독립군의 수장으로 즉위했다. 이른바 전 리 왕조의 건국이었다. 그는 양나라의 관할하에 있었던 교주와 덕주(德周)를 점령하면서 점차 세력을 늘려갔다. 그리고 2년 후인 544년 자신을 남월제(南越帝)라 칭제했고 국호를 만춘(萬春)이라 정한 후, 연호를 천덕(天德)으로 개원했다.
그러나 544년 5월, 양표(楊瞟), 진패선, 소발을 중심으로 구성된 양군이 다시금 전열을 가다듬고 만춘 제국을 공격하자 남제는 병사들을 이끌고 주연에서 싸웠으나 대패하고 소력강으로 후퇴, 진격하는 양군에게 밀려 가녕성까지 다시 후퇴하는 최악의 상황에 이르렀다.
양군이 가녕성을 함락시키자 이분은 애뢰(哀牢, 즉 라오스)족이 사는 산간 지대로 도망간 후, 다시 일어나 양군과 싸웠지만 갑작스런 폭우로 강물이 불어났고, 그때의 공격으로 패배한 이분은 소수민족이 사는 땅으로 또다시 도망갔다. 그의 제위는 형 이천보가 계승하고,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덕주 지사를 죽인 후, 애주로 진격했다.
처음엔 소량으로 일을 나갔지만 전란으로 고향에 다시 돌아왔다. 당시 소량의 황족 출신인 교주 자사 소자(蕭諮)는 폭정으로 민심을 잃었는데, 이분은 참파가 교주를 친 틈을 타, 호족 출신인 채준(蔡樽), 조숙(趙肅) 등과 힘을 합쳐 541년 교주의 소자를 공격했고, 소자는 놀라 광주(廣州) 지방으로 도망쳤다.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양군이 쳐들어 왔으나 격퇴시켰고, 이후 참파의 공격을 막아냈다.
양군(梁軍)을 물리친 이분은 542년 교주의 용편(龍編)을 점령한 후 그곳에서 독립군의 수장으로 즉위했다. 이른바 전 리 왕조의 건국이었다. 그는 양나라의 관할하에 있었던 교주와 덕주(德周)를 점령하면서 점차 세력을 늘려갔다. 그리고 2년 후인 544년 자신을 남월제(南越帝)라 칭제했고 국호를 만춘(萬春)이라 정한 후, 연호를 천덕(天德)으로 개원했다.
그러나 544년 5월, 양표(楊瞟), 진패선, 소발을 중심으로 구성된 양군이 다시금 전열을 가다듬고 만춘 제국을 공격하자 남제는 병사들을 이끌고 주연에서 싸웠으나 대패하고 소력강으로 후퇴, 진격하는 양군에게 밀려 가녕성까지 다시 후퇴하는 최악의 상황에 이르렀다.
양군이 가녕성을 함락시키자 이분은 애뢰(哀牢, 즉 라오스)족이 사는 산간 지대로 도망간 후, 다시 일어나 양군과 싸웠지만 갑작스런 폭우로 강물이 불어났고, 그때의 공격으로 패배한 이분은 소수민족이 사는 땅으로 또다시 도망갔다. 그의 제위는 형 이천보가 계승하고,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덕주 지사를 죽인 후, 애주로 진격했다.
[1] 현재의 타이빈(太平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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