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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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출신 PD(연출가)(언론인) 1966년 10월 24일생에 대한 내용은 이근행(언론인)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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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돌지계(突地稽)는 속말말갈족의 수령이었는데 이들을 준동하다가 수나라로 망명하였고 수당교체기에 무공을 세워 태종(당)에게 국성 이씨를 사성받았다. 무력이 출중하여 요서 일대에서 여러 이민족들의 경외를 받았다고 한다.
고구려에서 내분이 발생해 연남생이 당나라에 투항하고 고구려를 쳐 달라고 요청, 제3차 고구려-당 전쟁이 발발했고 이 때 이근행은 좌감문장군으로 참전했다.
토번의 가르친링이 10만대군을 이끌고 침공했는데 태연하게 성문을 열고 공성계를 구사하여 물리친다.
이후 당나라의 야욕과 의견대립 끝에 신라와의 나당전쟁이 발발하자,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황해 바다를 건너는 수군을 설인귀가 지휘하고 이근행과 고간(당나라)은 요동 평양성을 통해 육상으로 신라를 침공한다. 670년부터 673년까지 지금의 황해도 일대에서 웅거하며 신라를 지원하던 고구려 부흥군을 상대로 호로하 전투 등에서 이기며 승승장구하고, 675년에는 대대적으로 임진강선 건너 신라를 공격했지만 매소성 전투에서 패배해 큰 피해를 입고[1] 나당전쟁을 종결짓게 된다.
매소성 전투 패배 후 이근행은 당나라 서부 토번 전선에 투입되었는데 여기서는 상당한 공을 세워 진군대장군(鎭軍大將軍)과 행우위대장군(行右衛大將軍) 연국공(燕國公)에 봉해졌다. 죽은 뒤에는 공을 인정받아 당고종의 곁에 묻혔다.
고구려에서 내분이 발생해 연남생이 당나라에 투항하고 고구려를 쳐 달라고 요청, 제3차 고구려-당 전쟁이 발발했고 이 때 이근행은 좌감문장군으로 참전했다.
토번의 가르친링이 10만대군을 이끌고 침공했는데 태연하게 성문을 열고 공성계를 구사하여 물리친다.
이후 당나라의 야욕과 의견대립 끝에 신라와의 나당전쟁이 발발하자,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황해 바다를 건너는 수군을 설인귀가 지휘하고 이근행과 고간(당나라)은 요동 평양성을 통해 육상으로 신라를 침공한다. 670년부터 673년까지 지금의 황해도 일대에서 웅거하며 신라를 지원하던 고구려 부흥군을 상대로 호로하 전투 등에서 이기며 승승장구하고, 675년에는 대대적으로 임진강선 건너 신라를 공격했지만 매소성 전투에서 패배해 큰 피해를 입고[1] 나당전쟁을 종결짓게 된다.
매소성 전투 패배 후 이근행은 당나라 서부 토번 전선에 투입되었는데 여기서는 상당한 공을 세워 진군대장군(鎭軍大將軍)과 행우위대장군(行右衛大將軍) 연국공(燕國公)에 봉해졌다. 죽은 뒤에는 공을 인정받아 당고종의 곁에 묻혔다.
[1] 당의 기록에는 이근행이 매소성에서 오히려 신라군을 격파한 것으로 나온다. 철군한 이유도 전투에서 패한게 아니라 문무왕이 사죄한 것을 받아들인것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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