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다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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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多祚, ? ~ 707
당나라의 인물. 무주~당 시기의 번장이다.
당나라의 인물. 무주~당 시기의 번장이다.
개모성 출신의 말갈계 고구려인으로 아버지 이변이 당나라에 항복하여 우무위장군에 배수된다. 정무정[1], 왕방익[2], 흑치상지와 함께 배행검의 추천으로 발탁되었다.
687년에 좌응양대장군을 지내 돌궐의 쿠틀룩과 아사덕원진이 삭주에서 노략질하자 왕구언과 함께 흑치상지를 도와서 황화퇴에서 돌궐을 대파하고 추격해서 그들을 40여 리 달아나게 했으며, 돌궐은 모두 흩어져서 적북으로 달아났다.[3]
691년 흑수말갈을 토벌할 때 이다조는 그 수령을 유인하여 술자리를 마련하여 술에 취한 틈을 타 그를 참살하고 무리를 격파하였다.
무주(武周) 장수 2년(693년), 돌궐 제2제국이 영주(靈州)까지 침범하자, 무측천(武則天)은 이다조(李多祚)를 우응양위대장군(右鷹揚衛大將軍)으로 임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추토에 나섰으나 이듬해(694년) 패하고 만다. 이후 실위가 당에 조공을 바치지 않자 그들을 공격해 격파했으며, 좌위위대장군을 지내다가 696년에 영주에서 손만영, 이진충 등의 거란인들이 봉기하면서 여름 5월 25일에 조인사, 장현우, 마인절 등 다른 28명의 장군들과 함께 추토에 나섰고, 다른 장군들이 패하거나 사로잡혔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전공을 세웠다.
698년, 카프간 카간이 침공해 오자 사타충의 등과 전투에 나섰지만 카프간 카간의 위세에 눌려 진군하지 못했다고 한다.
702년 12월 2일에는 우림위대장군을 지내다가 검교유주도독이 되었고 705년에 측천무후가 위독하면서 장역지, 장창종이 권세를 잡자 우우림위대장군으로 있으면서 그들을 죽일 일을 모의해 장간지와 함께 정변을 일으켜 장역지, 장창종을 죽인 뒤 무측천을 퇴위시키고, 당중종을 맞아들여 요양군왕에 봉해졌다.
태자 이중준이 위황후와 대립하면서 이중준의 편에 섰고 707년 가을 7월 6일에 좌우림대장군으로 있으면서 이사충, 이승황, 독고의, 사타충의와 함께 우림천기병을 이끌고 무삼사, 무승훈 등을 죽이고 상관첩여를 공격했지만 양사욱이 그들을 공격하면서 이다조의 병사들을 설득하자 병사들의 배신으로 공격을 받아 살해당했다.
위황후 일파가 주살당하고, 당 예종에 의해 복권된다.
687년에 좌응양대장군을 지내 돌궐의 쿠틀룩과 아사덕원진이 삭주에서 노략질하자 왕구언과 함께 흑치상지를 도와서 황화퇴에서 돌궐을 대파하고 추격해서 그들을 40여 리 달아나게 했으며, 돌궐은 모두 흩어져서 적북으로 달아났다.[3]
691년 흑수말갈을 토벌할 때 이다조는 그 수령을 유인하여 술자리를 마련하여 술에 취한 틈을 타 그를 참살하고 무리를 격파하였다.
무주(武周) 장수 2년(693년), 돌궐 제2제국이 영주(靈州)까지 침범하자, 무측천(武則天)은 이다조(李多祚)를 우응양위대장군(右鷹揚衛大將軍)으로 임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추토에 나섰으나 이듬해(694년) 패하고 만다. 이후 실위가 당에 조공을 바치지 않자 그들을 공격해 격파했으며, 좌위위대장군을 지내다가 696년에 영주에서 손만영, 이진충 등의 거란인들이 봉기하면서 여름 5월 25일에 조인사, 장현우, 마인절 등 다른 28명의 장군들과 함께 추토에 나섰고, 다른 장군들이 패하거나 사로잡혔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전공을 세웠다.
698년, 카프간 카간이 침공해 오자 사타충의 등과 전투에 나섰지만 카프간 카간의 위세에 눌려 진군하지 못했다고 한다.
702년 12월 2일에는 우림위대장군을 지내다가 검교유주도독이 되었고 705년에 측천무후가 위독하면서 장역지, 장창종이 권세를 잡자 우우림위대장군으로 있으면서 그들을 죽일 일을 모의해 장간지와 함께 정변을 일으켜 장역지, 장창종을 죽인 뒤 무측천을 퇴위시키고, 당중종을 맞아들여 요양군왕에 봉해졌다.
태자 이중준이 위황후와 대립하면서 이중준의 편에 섰고 707년 가을 7월 6일에 좌우림대장군으로 있으면서 이사충, 이승황, 독고의, 사타충의와 함께 우림천기병을 이끌고 무삼사, 무승훈 등을 죽이고 상관첩여를 공격했지만 양사욱이 그들을 공격하면서 이다조의 병사들을 설득하자 병사들의 배신으로 공격을 받아 살해당했다.
위황후 일파가 주살당하고, 당 예종에 의해 복권된다.
이다조가 태묘에 갈 때마다 당 중종을 모셨는데, 이를 본 왕적이 이민족 출신이 가마를 받드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자 당 중종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다조가 비록 이민족 출신이지만 그 공으로 가마를 호위하게 한 것이니 다시는 말하지 마시오.
이는 다민족 국가였던 당나라 때조차도 이민족 인사들에 대한 견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다조에 대한 당 중종의 신임이 대단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 예종은 이다조를 복권할 때 삼한의 귀종이라고 언급했다.
당 예종은 이다조를 복권할 때 삼한의 귀종이라고 언급했다.
묘지명에 의하면 증조부 이납(訥), 할아버지 이리(利), 아버지 이변(辯)에 이르기까지 오몽주 도독을 역임하였다. 오몽주, 황두 등의 지명으로 보아 황두실위~불열말갈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 집안으로 추정된다.[4]
원래도 고구려가 북만주의 실위나 동만주의 불열말갈에 대한 지배력 내지는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을 정황은 있어왔고 구당서 이다조 열전에는 그가 대대로 황두도독을 지낸 말갈족이며 동시에 삼한의 귀종으로 표현되어 있어 어렴풋이 고구려와 연관되어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었는데 1991년 낙양 용문산에서 이다조의 묘지가 발견, 연구되면서 이러한 추정들을 뒷받침하고 있다.[5]
원래도 고구려가 북만주의 실위나 동만주의 불열말갈에 대한 지배력 내지는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을 정황은 있어왔고 구당서 이다조 열전에는 그가 대대로 황두도독을 지낸 말갈족이며 동시에 삼한의 귀종으로 표현되어 있어 어렴풋이 고구려와 연관되어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었는데 1991년 낙양 용문산에서 이다조의 묘지가 발견, 연구되면서 이러한 추정들을 뒷받침하고 있다.[5]
정사에서의 행적과 드라마에서의 행적이 상당히 다른 등장인물 중 하나이다.[6]
배우 장언[7]이 연기했다. 무측천에게 조문홰의 수급을 전달하고, 이후 이진충이 거란국을 선포하면서 이를 힐책하는 사절[8]로 등장한다. 이후 거란 토벌을 위해 설인귀 휘하에서 거란군과 싸우는데, 영주성 바깥의 동쪽에서 당나라의 군사들이 진을 치면서 여러 차례 싸우다가 거란 측에서는 이문, 당나라 측에서는 이해고를 포로로 잡으면서 거란 측의 제안으로 포로 교환에 대한 교섭을 하자 조인사와 함께 이진충을 죽이려고 공격했지만 이진충으로 위장한 가짜였다.
이후 설인귀가 거란에게 패하고 이해고가 서쪽, 대조영이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이해고 토벌을 위해 조인사 휘하에서 참전하지만 양소위의 모함으로 궁중에서 모반 혐의를 받자 이해고에게 항복하는데, 이해고에게 속아서 무장 해제로 항복했다가 이해고의 군사들의 공격으로 병사들이 전멸당하고, 이후 조인사와 마인절과 함께 이해고의 휘하 장수로 활동한다.
그러나 요하성에서 당, 돌궐 연합군과의 싸움 도중 마인절과 함께 이문과 내통하여 다시 당군 소속이 된다. 이후 이해고와 조인사가 당 소속으로 되자 다시 조인사의 수하가 된다. 이후 대조영 토벌을 위해 천문령 전투에 참전했다가 돌산에서 계필사문의 유인으로 인해 흑수돌의 군에 크게 패하면서 조인사를 살리기 위해 마인절과 함께 남아서 흑수돌과 싸웠지만 얼굴이 베여서 죽는다.
[1] 고구려 정벌에 참전한 정명진의 아들로, 돌궐 전선에서 맹활약하나 무측천에 의해 숙청당한다.[2] 안서사진을 수복하나 무측천에 의해 숙청당하고, 안서사진은 다시 토번에 빼앗긴다.[3] 이후 689년 흑치상지는 무고로 인해 감옥에서 죽고, 이다조는 우응양대장군으로 승진한다.[4] 말갈인임에도 불구하고, 황두실위를 관할한 황두도독을 역임한 것은 말갈과 실위의 언어 및 풍습의 유사성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5] 이다조의 생년이 654년임을 고려했을 때 오몽주도독 및 황두도독직은 최소한 이다조의 증조 대부터 역임했으므로, 이다조 일가에게 오몽주도독과 황두도독을 수여한 주체는 고구려였을 것이다.[6] 정사에서는 돌궐, 흑수말갈, 거란족과 싸워 우림군 대장군까지 올라 무측천을 퇴위시키고 이후 이중준의 정변에 가담하나 위황후 일파의 반격으로 살해당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조인사의 수하로 있다가 천문령에서 전사하는 등 존재감이 없는 인물로 나온다.[7] 인터넷 검색에서는 장건이라고 나왔지만, 장언이 맞다.[8] 여기서 무측천이 이진충과 손만영의 이름을 이진멸, 손만참으로 부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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