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관
최근 수정 시각:
|
|
당나라의 장군 郭虔瓘 | 곽건관 | |
작호 | 태원군(太原郡) 개국공(開國公) → 노국공(潞國公) |
성 | 곽(郭) |
이름 | 담(湛) |
자 | 건관(虔瓘) |
부친 | 곽경(郭慶) |
출생 | 644년 ~ 726년 |
국적 | 당(唐) |
당나라의 장군으로 이름은 담(湛)이며 자는 건관(虔瓘).
제주(齊州) 역성현(歷城縣) 출신으로 644년에 곽경(郭慶)의 아들로 태어났다.
665년에 좌친부(左親府)로 기용되었고 동수부(潼水府) 우도위(右都尉)를 역임하였으며, 전공을 세워 713년에 우효위 장군으로 승진하고 북정 도호, 금산도 부대총관으로 부임하였다. 714년, 묵철가한이 아들인 부구가한과 동아(同俄)를 파견하여 북정을 공격하자, 곽건관은 반격하여 동아를 죽였다. 동아가 죽자, 묵철가한의 사위인 석아실필(石阿失畢)은 당나라에 귀순했고, 곽건관은 관군대장군으로 임명되었고 우효위대장군을 겸하였다.
곽건관은 이후 안서 부대도호 겸 어사대부, 4진 경략안무사(經略安撫使)로 임명되고 노국공(潞國公)으로 진봉되었다. 곽건관은 관중의 군대 1만을 동원하여 서돌궐의 잔당을 토벌할 것을 주청하였다. 조정에서는 곽건관의 주청을 받아들였지만, 장작대장 위주는 곽건관이 공적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올 것이라 우려하였다. 결국 곽건관은 아무런 공적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곽건관은 돌아와서 양주(凉州) 자사, 하서(河西) 절도대사가 되었고 우위위대장군으로 진위되었다.
716년, 곽건관은 가노 8명이 전공을 세웠다고 상주하면서 자신을 유격장군으로 삼기를 주청하였지만 재상은 곽건관이 군공을 믿고 기강을 어지럽혔다고 탄핵하여 곽건관의 주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섬왕 이사승이 안서 도호로 부임하자, 곽건관은 안서 부도호가 되어 이사승을 보좌하였다.
726년에 사망하였다.
665년에 좌친부(左親府)로 기용되었고 동수부(潼水府) 우도위(右都尉)를 역임하였으며, 전공을 세워 713년에 우효위 장군으로 승진하고 북정 도호, 금산도 부대총관으로 부임하였다. 714년, 묵철가한이 아들인 부구가한과 동아(同俄)를 파견하여 북정을 공격하자, 곽건관은 반격하여 동아를 죽였다. 동아가 죽자, 묵철가한의 사위인 석아실필(石阿失畢)은 당나라에 귀순했고, 곽건관은 관군대장군으로 임명되었고 우효위대장군을 겸하였다.
곽건관은 이후 안서 부대도호 겸 어사대부, 4진 경략안무사(經略安撫使)로 임명되고 노국공(潞國公)으로 진봉되었다. 곽건관은 관중의 군대 1만을 동원하여 서돌궐의 잔당을 토벌할 것을 주청하였다. 조정에서는 곽건관의 주청을 받아들였지만, 장작대장 위주는 곽건관이 공적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올 것이라 우려하였다. 결국 곽건관은 아무런 공적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곽건관은 돌아와서 양주(凉州) 자사, 하서(河西) 절도대사가 되었고 우위위대장군으로 진위되었다.
716년, 곽건관은 가노 8명이 전공을 세웠다고 상주하면서 자신을 유격장군으로 삼기를 주청하였지만 재상은 곽건관이 군공을 믿고 기강을 어지럽혔다고 탄핵하여 곽건관의 주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섬왕 이사승이 안서 도호로 부임하자, 곽건관은 안서 부도호가 되어 이사승을 보좌하였다.
726년에 사망하였다.
이 저작물은 CC BY-NC-SA 2.0 KR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라이선스가 명시된 일부 문서 및 삽화 제외)
기여하신 문서의 저작권은 각 기여자에게 있으며, 각 기여자는 기여하신 부분의 저작권을 갖습니다.
나무위키는 백과사전이 아니며 검증되지 않았거나, 편향적이거나, 잘못된 서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무위키는 위키위키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문서를 고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원할 경우 직접 토론을 발제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