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급선
최근 수정 시각:
|
|
형정공(邢貞公) 王及善 | 왕급선 | |
작호 | 형국공(邢國公) |
시호 | 정(貞) |
성 | 왕(王) |
이름 | 급선(及善) |
부친 | |
출신 | 명주(洺州) 한단현(邯鄲縣) |
생몰 | 618년 ~ 699년 |
명주(洺州) 한단현(邯鄲縣) 출신으로 왕급선의 아버지는 645년 주필산 전투에서 전사한 왕군악이었다. 왕급선은 아버지 사후 조산대부로 제수되고 아버지의 작위인 형국공을 습봉했다.
당고종 재위기에는 좌봉유솔(左奉裕率)까지 승진했다. 이홍이 태자로 있을 때 동궁에 모여든 관리들에게 거꾸로 춤을 추게 했는데, 왕급선은 이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고종 재위기에는 좌봉유솔(左奉裕率)까지 승진했다. 이홍이 태자로 있을 때 동궁에 모여든 관리들에게 거꾸로 춤을 추게 했는데, 왕급선은 이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하께서 스스로 악관으로 계시니 신하는 마땅히 직무에 충실해야 합니다. 소신이 장차 명을 받든다면 아마 전하를 보좌하는 게 아닐 것입니다.
이홍은 왕급선에게 사례하고 그를 돌려보냈으며, 이야기를 들은 고종은 왕급선을 칭찬하여 비단 100필을 하사했고 다시 우천우위장군으로 제수하며 왕급선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짐은 경이 충성스럽고 신중하기에 경에게 3품의 요직을 주었소. 다른 사람들은 임금이 찾지 않으면 짐에게 올 수 없는데, 경이 차고 있는 대횡도(大橫刀)가 짐의 곁에 있으니 경은 이 관직이 귀하다는 것을 알고 있소?
왕급선은 이후 병으로 인해 면직되었고 다시 위위경으로 등용되었다.
수공 연간에 종정경을 역임했고 산동에 기근이 들자 산동을 순행하고 빈민들을 구휼하는 임무를 맡았다. 뒤에 예부상서, 진주(秦州) 도독으로 임명되었고 익주(益州) 대도독부 장사로 전임되었다. 하지만 병으로 인해 사직을 청했고 광록대부가 더해졌다.
697년, 거란의 반란으로 산동이 혼란해지자, 왕급선은 활주(滑州) 자사[1]로 기용되었다. 이때 측천무후는 왕급선을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697년, 거란의 반란으로 산동이 혼란해지자, 왕급선은 활주(滑州) 자사[1]로 기용되었다. 이때 측천무후는 왕급선을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변방의 적들이 배반했는데, 경이 비록 병에 걸렸지만 처자를 데리고 하루에 30리 씩 천천히 걸어서 부임하고 짐과 함께 이 주를 힘들이지 않고 다스려 황하를 차단할 수 있소.
측천무후가 왕급선에게 조정의 득실을 묻자, 왕급선은 혼란스러운 상황을 타개할 10여 가지의 조목을 측천무후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왕급선의 이야기를 들은 측천무후는 왕급선을 내사로 임명하고 활주로 보내지 않기로 했다.
어사중승 내준신이 범죄를 저질러 투옥되자, 유사에서는 내준신에게 극형을 내리려고 했으나 측천무후는 내준신을 사면하려고 했다. 하지만 왕급선은 측천무후에게 다음의 간언을 올렸다.
내준신은 흉악하고 교활하고 법도를 지키지 않으며, 내준신이 신임했던 이들은 모두 지위가 낮은 소인들로 내준신이 주살한 이들의 대부분은 명망과 덕행이 있는 군자였습니다. 소신이 생각하건대 만약 원흉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면 조정을 요동시키고 재앙이 여기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측천무후는 왕급선의 간언을 받아들였다. 뒤에 여릉왕 이현을 태자로 세울 때 왕급선은 여기에 찬동했고 여릉왕이 인심을 안심시켜야 한다고 측천무후에게 주청하여 측천무후가 왕급선의 주청을 받아들였다.
왕급선은 배운 바가 없었지만 청렴함과 공정함으로 알려졌고 굳은 의지로 일을 처리했으며, 대신의 절개를 지녔다. 장역지, 장창종 형제가 측천무후의 총애를 받고 연회에서 신하의 절개를 저버리는 모습을 보이자, 왕급선은 장역지, 장창종 형제를 제지해야한다고 측천무후에게 건의했으나 측천무후는 왕급선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경은 이미 나이가 많으니 이런 연회에 참석하는 것은 옳지 않고 합중(閤中)의 일을 검토하는 것이 좋겠소.
뒤에 왕급선이 한 달의 휴가를 청했지만 측천무후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왕급선은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중서령(中書令)이 어찌 천자를 하루 종일 알현하지 않을 수 있는가?
왕급선은 3번이나 모든 벼슬에 물러나고자 상소를 올렸지만 왕급선의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699년 문창좌상으로 임명되었지만 얼마 안 있어 사망하여 익주(益州) 대도독으로 추증되고 정(貞)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 신당서에서는 위주(魏州) 자사.
이 저작물은 CC BY-NC-SA 2.0 KR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라이선스가 명시된 일부 문서 및 삽화 제외)
기여하신 문서의 저작권은 각 기여자에게 있으며, 각 기여자는 기여하신 부분의 저작권을 갖습니다.
나무위키는 백과사전이 아니며 검증되지 않았거나, 편향적이거나, 잘못된 서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무위키는 위키위키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문서를 고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원할 경우 직접 토론을 발제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