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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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자의의 3남 곽희의 손자로 곽윤(郭鈞)의 아들이었다. 곽승하는 태어나면서 유달리 훌륭했는데 어린 시절에 붓과 벼루를 좋아했으며 점차 성장하면서 오경(五經)에 통달했다.
809년, 예부시랑(禮部侍郞) 장홍정이 곽승하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진사로 급제시켰으며 여러 차례 자신의 속관으로 두었다. 곽승하는 위남현위(渭南縣尉)를 역임하다가 입조하여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고 기거사인(起居舍人)으로 전임되었다. 모친상을 치를 때는 효성으로 알려졌으며 모친상을 마친 뒤 시어사(侍御史), 직방원외랑(職方員外郞),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 병부낭중(兵部郞中)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832년,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임명되었다. 곽승하는 여러 차례 상소를 올리며 시정의 득실에 대해 아뢰었다. 문종이 정주를 태복경(太僕卿)으로 삼으려고 하자 곽승하는 여기에 대해 매우 격렬하게 간언을 올려서 정주가 곽승하를 매우 두려워하고 꺼렸다. 곽승하는 간의대부의 신분으로 지궤원사(知匭院事)를 맡았으며, 835년 급사중(給事中)으로 전임되었다.
836년 화주(華州) 자사로 전출되고 어사중승(御史中丞)을 겸임하였다. 문종의 조칙이 내려진 뒤 문하성과 중서성의 관원들이 중서성에 모여서 문종에게 곽승하를 전출시킨 이유를 물었다. 이때 급사중 노재(盧載)가 문종의 조칙을 봉환하면서 상주문을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809년, 예부시랑(禮部侍郞) 장홍정이 곽승하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진사로 급제시켰으며 여러 차례 자신의 속관으로 두었다. 곽승하는 위남현위(渭南縣尉)를 역임하다가 입조하여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고 기거사인(起居舍人)으로 전임되었다. 모친상을 치를 때는 효성으로 알려졌으며 모친상을 마친 뒤 시어사(侍御史), 직방원외랑(職方員外郞),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 병부낭중(兵部郞中)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832년,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임명되었다. 곽승하는 여러 차례 상소를 올리며 시정의 득실에 대해 아뢰었다. 문종이 정주를 태복경(太僕卿)으로 삼으려고 하자 곽승하는 여기에 대해 매우 격렬하게 간언을 올려서 정주가 곽승하를 매우 두려워하고 꺼렸다. 곽승하는 간의대부의 신분으로 지궤원사(知匭院事)를 맡았으며, 835년 급사중(給事中)으로 전임되었다.
836년 화주(華州) 자사로 전출되고 어사중승(御史中丞)을 겸임하였다. 문종의 조칙이 내려진 뒤 문하성과 중서성의 관원들이 중서성에 모여서 문종에게 곽승하를 전출시킨 이유를 물었다. 이때 급사중 노재(盧載)가 문종의 조칙을 봉환하면서 상주문을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곽승하가 화주 자사로 전출된 뒤부터 계속해서 조칙을 봉환하고 반박하고 있는데 곽승하가 능히 봉직하고 있으니 마땅히 조정에 두어야 합니다. 목수(牧守)의 재능은 추천하여 선발하기 쉽습니다.
그러자 문종은 재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곽승하가 오랫동안 황문(黃門)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봉록을 후하게 내리고자 잠시 도성과 가까운 변방을 물색했다. 하지만 간관들이 상주문을 올리며 그가 직무에 적합한 것을 아까워하다니 정말 아름다운 일이로다.
다시 곽승하를 급사중으로 삼았다.
회남(淮南) 지역에 큰 가뭄이 들었는데 조세는 오르지 않고 비용이 부족해지자, 문종은 탁지(度支)와 호부(戶部)의 사무를 재신들이 나눠서 맡게 하려고 했다. 이때 곽승하는 다음과 같이 상주하였다.
회남(淮南) 지역에 큰 가뭄이 들었는데 조세는 오르지 않고 비용이 부족해지자, 문종은 탁지(度支)와 호부(戶部)의 사무를 재신들이 나눠서 맡게 하려고 했다. 이때 곽승하는 다음과 같이 상주하였다.
재상이란 위로는 음양을 조화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편안케 하며 임금을 요순으로 이끌고 시세를 태평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더불어 부서를 살펴보니 돈과 비단을 셈하는 행위는 옳지 않습니다.
문종은 곽승하의 상주를 받아들였다. 뒤에 곽승하는 형부시랑(刑部侍郞)으로 전임되었으며 837년에 죽었다.
곽승하는 사후 집안에 남은 재산이 없어서 장례를 치를 때 쓴 비용은 모두 그의 벗들이 마련했으며 선비들은 누구 할 것 없이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곽승하는 이부상서(吏部尙書)로 추증되었다.
곽승하는 사후 집안에 남은 재산이 없어서 장례를 치를 때 쓴 비용은 모두 그의 벗들이 마련했으며 선비들은 누구 할 것 없이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곽승하는 이부상서(吏部尙書)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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