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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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충정공(豳忠貞公) 韋見素 | 위견소 | |
시호 | 충정(忠貞) |
작호 | 팽성군공(彭城郡公) → 빈국공(豳國公) |
성 | 위(韋) |
이름 | 견소(見素) |
자 | 회미(會微) |
출신 | 경조부(京兆府) 만년현(萬年縣) |
생몰 | 687년 ~ 762년 |
부친 | 위주(韋湊) |
당나라 중기의 관료로 자는 회미(會微)였다.
경조부(京兆府) 만년현(萬年縣) 출신으로 위견소의 집안은 경조위씨(京兆韋氏) 남피공파(南皮公派)이며, 위견소는 687년 위주(韋湊)의 아들로 태어났다. 진사에 급제하여 상왕 이단의 참군으로 제수되었다. 뒤에 위좌(衛佐), 하남부(河南府) 창조(倉曹)를 역임했으며, 아버지 위주의 상을 지낸 뒤 대리시승(大理寺丞)으로 기용되고 아버지의 작위였던 팽성군공(彭城郡公)을 습봉했다.
공사에 연루되어 방주(坊州) 사마(司馬)로 좌천되었다가 뒤에 입조하여 고부원외랑(庫部員外郞)이 되었고 조산대부(朝散大夫)가 더해졌으며, 우사원외랑(右司員外郞),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 좌사낭중(左司郞中), 병부낭중(兵部郞中)을 역임하고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승진하였다.
746년, 강서(江西), 산남(山南), 검중(黔中), 영남(嶺南) 등지의 출척사(黜陟使)를 맡았다. 풍속을 관찰하고 관리들의 부정을 규탄하여 위견소가 가는 곳마다 숙연한 모습을 보였다. 조정으로 돌아와 급사중(給事中)으로 임명되었고 관리들의 부정을 바로잡았으며, 검교공부시랑(檢校工部侍郞)이 되었고 상서우승(尙書右丞)으로 전임되었다.
750년, 이부시랑(吏部侍郞)으로 승진하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가 더해졌다. 위견소는 자비심이 깊고 마음이 어질어 거스름이 없었고 여러 해 동안 관리를 공평하고 타당하게 선발하여 칭송을 받았다. 이임보가 죽은 이후, 조정의 권력은 우상(右相) 양국충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좌상(左相) 진희열(陳希烈)이 양국충의 권세와 총애를 두려워하여 사무에 대해서는 무조건 승낙하고 감히 분명하게 의견을 나타내지 않자, 현종은 이에 못마땅했다.
754년, 수도에 큰 물난리가 일어나자, 현종은 이를 재상이 직무를 다하지 못해서 생겨난 재앙으로 여겨 진희열을 파면시키고 양국충에게 품행이 단정한 선비를 찾도록 명하였다. 현종은 병부시랑 길온(吉溫)을 등용하려고 했으나 양국충은 길온이 안녹산의 부하 관리였기에 안녹산의 권력을 두려워하여 중서사인(中書舍人) 두화(竇華)와 송욱(宋昱)을 찾아갔고 두화와 송욱은 위견소가 품행이 방정하고 성격이 부드러워 통제하기 쉽다고 언급했다. 현종 또한 위견소가 아버지 예종의 참군으로 있었기에 위견소를 재상으로 등용했다. 8월, 위견소는 무부상서(武部尙書),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로 임명되고 집현원(集賢院) 학사를 맡았으며, 진희열을 대신하여 문하성(門下省)의 사무를 맡았다. 위견소는 자신을 천거해준 양국충에게 감격했다.
755년, 안녹산이 자신의 수하인 하천년(何千年)을 조정으로 보내 번장(蕃將) 32명으로 한족 출신 장수를 대체해달라고 주청했다. 위견소는 양국충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사에 연루되어 방주(坊州) 사마(司馬)로 좌천되었다가 뒤에 입조하여 고부원외랑(庫部員外郞)이 되었고 조산대부(朝散大夫)가 더해졌으며, 우사원외랑(右司員外郞),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 좌사낭중(左司郞中), 병부낭중(兵部郞中)을 역임하고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승진하였다.
746년, 강서(江西), 산남(山南), 검중(黔中), 영남(嶺南) 등지의 출척사(黜陟使)를 맡았다. 풍속을 관찰하고 관리들의 부정을 규탄하여 위견소가 가는 곳마다 숙연한 모습을 보였다. 조정으로 돌아와 급사중(給事中)으로 임명되었고 관리들의 부정을 바로잡았으며, 검교공부시랑(檢校工部侍郞)이 되었고 상서우승(尙書右丞)으로 전임되었다.
750년, 이부시랑(吏部侍郞)으로 승진하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가 더해졌다. 위견소는 자비심이 깊고 마음이 어질어 거스름이 없었고 여러 해 동안 관리를 공평하고 타당하게 선발하여 칭송을 받았다. 이임보가 죽은 이후, 조정의 권력은 우상(右相) 양국충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좌상(左相) 진희열(陳希烈)이 양국충의 권세와 총애를 두려워하여 사무에 대해서는 무조건 승낙하고 감히 분명하게 의견을 나타내지 않자, 현종은 이에 못마땅했다.
754년, 수도에 큰 물난리가 일어나자, 현종은 이를 재상이 직무를 다하지 못해서 생겨난 재앙으로 여겨 진희열을 파면시키고 양국충에게 품행이 단정한 선비를 찾도록 명하였다. 현종은 병부시랑 길온(吉溫)을 등용하려고 했으나 양국충은 길온이 안녹산의 부하 관리였기에 안녹산의 권력을 두려워하여 중서사인(中書舍人) 두화(竇華)와 송욱(宋昱)을 찾아갔고 두화와 송욱은 위견소가 품행이 방정하고 성격이 부드러워 통제하기 쉽다고 언급했다. 현종 또한 위견소가 아버지 예종의 참군으로 있었기에 위견소를 재상으로 등용했다. 8월, 위견소는 무부상서(武部尙書),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로 임명되고 집현원(集賢院) 학사를 맡았으며, 진희열을 대신하여 문하성(門下省)의 사무를 맡았다. 위견소는 자신을 천거해준 양국충에게 감격했다.
755년, 안녹산이 자신의 수하인 하천년(何千年)을 조정으로 보내 번장(蕃將) 32명으로 한족 출신 장수를 대체해달라고 주청했다. 위견소는 양국충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안녹산은 오랫동안 다른 뜻을 품었고 지금 다시 이런 주청을 했으니 그가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이 분명합니다. 재앙의 어금니를 능히 막지 못함을 알고 형세를 능히 다스리지 못함을 본다면 어찌 어찌 그를 도울 수 있겠습니까? 내일 제가 여기에 대해 극언하겠습니다. 폐하께서 윤허하지 않으신다면 공께서 계속 극언하십시오.
위견소는 양국충과 함께 현종을 알현하여 안녹산이 배반할 것이라고 말했으나 현종은 이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안녹산은 반란을 일으켰다. 756년, 가서한의 군대가 동관에서 패배하여 안녹산의 반군이 장안까지 밀고 들어왔다. 6월, 현종은 위견소, 양국충 등의 호종 하에 함양에서 성도로 향한다. 그러나 마외역에 이르러 굶주린 군인들의 분노와 불만이 커져가기 시작했고 결국 양국충이 처형된다. 위견소는 달아나다가 난병들에게 상처를 입었지만 누군가가 다음과 같이 말한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위 상공을 해치지 마시오!
현종은 수왕(壽王) 이모(李瑁)에게 군사들을 위로하도록 명하고 위견소에게 약을 주어 치료해주었다. 7월, 현종이 파서군(巴西郡)에 도착하면서 위견소에게 좌상(左相), 무부상서를 겸하게 했다. 며칠 뒤 촉군(蜀郡)에 도착하여 위견소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가 더해지고 빈국공(豳國公)으로 진봉되었으며, 아들 1명에게 5품의 관직을 내렸다.
한편 이때 현종의 황태자로 분조를 이끌던 이형이 영무(靈武)에서 장수들의 추대로 제위에 오르니 이가 제7대 황제인 숙종이었다. 하지만 이 소식은 성도에 있는 현종에게 아직 전해지지 못했다가 8월에 와서야 숙종의 사자가 도착하면서 비로소 알려졌다. 위견소는 방관(房琯)과 함께 전국보와 옥책을 가지고 영무로 향했다.
위견소와 방관은 9월에 와서야 순화군(順化郡)에서 숙종을 알현하여 현종이 양위할 뜻을 숙종에게 전달했고 숙종과 함께 팽원군(彭原郡)으로 향했다. 숙종은 태자였을 때 본디 방관의 명성이 혁혁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방관을 더욱 대우했지만, 위견소는 양국충에게 등용되었고 양국충을 위해 행동했기 때문에 위견소에 대한 숙종의 대우는 박해졌다.
757년, 봉상(鳳翔)에 도착한 뒤 위견소는 좌복야(左僕射)로 제수되고 지정사에서 파면되었으며, 헌부상서(憲部尙書)로 물러났다. 좌상의 지위는 묘진경이 대신했다. 이때 방관이 패전하여 좌천되고 최원(崔圓)과 최환(崔渙) 등이 모두 지정사(知政事)에서 파면되어 현종이 임명한 대신들 중 지정사를 맡은 이들은 없었다. 5월, 태자태사(太子太師)로 승진하였다. 11월, 숙종이 수도로 돌아온 뒤 위견소에게 성도로 가서 현종을 봉영하도록 명하였다. 12월, 현종이 수도로 돌아오자 숙종은 이에 대사면을 단행했다. 위견소는 이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더해졌고 실봉 300호를 식읍으로 받았다.
상원 연간에는 발병에 걸려 사직을 청했고 숙종은 이를 허락했다. 762년, 병으로 사망하여 사공(司空)으로 추증되고 충정(忠貞)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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