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사겸
최근 수정 시각:
|
|
韋思謙 | 위사겸 | |
작호 | 박창현남(博昌縣男) |
성 | 위(韋) |
이름 | 인약(仁約) |
자 | 사겸(思謙) |
부친 | 위덕륜(韋德倫) |
조부 | 위홍원(韋弘瑗) |
출생 | 611년 ~ 689년 |
출신 | 정주(鄭州) 양무현(陽武縣) |
국적 | 수(隋) → 당(唐) |
위사겸은 조상이 옹주 두릉현 출신이었으나 남쪽으로 이동하여 양양현에 거처하였고, 뒤에는 정주 양무현에 거처하여 위사겸은 정주 양무현 출신이 되었다. 위사겸은 8세에 어머니를 잃었는데 효성이 지극하여 주변에서 소문이 났다.
위사겸은 진사로 급제하여 응성현령(應城縣令)으로 보임되었고 1년 뒤에 다른 관직으로 전임되었다. 위사겸은 벼슬 생활에서 그다지 좋은 치적을 내지 못하여 승진을 못하였는데, 이부상서 고계보는 위사겸에 대해서 “선부(選部)에 있은 뒤에야 지금 비로소 이 한 사람을 얻었으니, 어찌 사소한 흠으로 대덕을 버릴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위사겸을 감찰어사로 발탁하였다.
650년, 저수량이 중서성 통역관의 땅을 싼값에 사들이자, 위사겸은 상소문을 올려 저수량을 탄핵한다. 뒤에 저수량이 다시 중서령이 되자, 위사겸은 청수현령(淸水縣令)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좌숙기(左肅機) 황보공의(皇甫公義)가 검교 패왕부 장사를 맡으면서 위사겸을 패왕부 창조참군으로 천거하였고 위사겸은 우사낭중을 역임하였다.
682년, 위사겸은 상서좌승, 어사대부를 역임하였다. 당고종은 위사겸을 현명하게 여기고 매번 위사겸과 소대하면서 피곤하여도 계속 위사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또한 어려운 판결이나 잡다한 업무에는 반드시 위사겸을 참석하게 하였다.
683년, 당고종이 사망하고 고종의 태자인 이현이 황제로 즉위하니 이가 당중종으로, 중종의 모후인 측천무후가 섭정을 맡아 실권을 장악하였다. 위사겸은 이때 종정경으로 전임되었고 마침 관명을 개역하면서 사속경(司屬卿)이 되었다. 측천무후가 좌우숙정대를 설치하면서 위사겸은 우숙정대부(右肅政大夫)가 되었다. 685년에는 박창현남(博昌縣男)이라는 작위를 받고 봉각난대삼품(鳳閣鸞臺三品)으로 옮겼으며, 686년에는 소량사(蘇良嗣)를 대신하여 납언(納言)이 되었다.
687년, 위사겸은 연로하여 관직에서 물러난다는 표문을 올렸고 측천무후가 이를 허락하면서 태중대부가 더해졌다. 위사겸은 2년 뒤에 죽어서 유주(幽州) 도독으로 추증되었다.
위사겸은 진사로 급제하여 응성현령(應城縣令)으로 보임되었고 1년 뒤에 다른 관직으로 전임되었다. 위사겸은 벼슬 생활에서 그다지 좋은 치적을 내지 못하여 승진을 못하였는데, 이부상서 고계보는 위사겸에 대해서 “선부(選部)에 있은 뒤에야 지금 비로소 이 한 사람을 얻었으니, 어찌 사소한 흠으로 대덕을 버릴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위사겸을 감찰어사로 발탁하였다.
650년, 저수량이 중서성 통역관의 땅을 싼값에 사들이자, 위사겸은 상소문을 올려 저수량을 탄핵한다. 뒤에 저수량이 다시 중서령이 되자, 위사겸은 청수현령(淸水縣令)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좌숙기(左肅機) 황보공의(皇甫公義)가 검교 패왕부 장사를 맡으면서 위사겸을 패왕부 창조참군으로 천거하였고 위사겸은 우사낭중을 역임하였다.
682년, 위사겸은 상서좌승, 어사대부를 역임하였다. 당고종은 위사겸을 현명하게 여기고 매번 위사겸과 소대하면서 피곤하여도 계속 위사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또한 어려운 판결이나 잡다한 업무에는 반드시 위사겸을 참석하게 하였다.
683년, 당고종이 사망하고 고종의 태자인 이현이 황제로 즉위하니 이가 당중종으로, 중종의 모후인 측천무후가 섭정을 맡아 실권을 장악하였다. 위사겸은 이때 종정경으로 전임되었고 마침 관명을 개역하면서 사속경(司屬卿)이 되었다. 측천무후가 좌우숙정대를 설치하면서 위사겸은 우숙정대부(右肅政大夫)가 되었다. 685년에는 박창현남(博昌縣男)이라는 작위를 받고 봉각난대삼품(鳳閣鸞臺三品)으로 옮겼으며, 686년에는 소량사(蘇良嗣)를 대신하여 납언(納言)이 되었다.
687년, 위사겸은 연로하여 관직에서 물러난다는 표문을 올렸고 측천무후가 이를 허락하면서 태중대부가 더해졌다. 위사겸은 2년 뒤에 죽어서 유주(幽州) 도독으로 추증되었다.
- 682년, 무후장군(武候將軍) 전인회(田仁會)가 시어사(侍御史) 장인의(張仁禕)와 불협하여 장인의를 무고하자 고종이 장인의를 힐문하였지만 장인의는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위사겸은 고종에게신은 장인의와 동기라서 일의 연유를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장인의는 나약하여 자신을 위해 호소하지 못합니다. 만약 전인회가 폐하를 현혹시켜 장인의가 예사롭지 못한 죄를 받았다면, 곧 신 또한 임금을 완전히 섬기지 못한 것입니다. 두 사람에게 정황을 대조해보도록 하십시오.라고 말하여, 고종이 위사겸의 주청을 받아들였다.
- 위사겸은 어사대에 있을 때 왕공에게 배례를 행한 적이 없었다. 어떤 이가 배례를 권하자 위사겸은재능이 뛰어난 인물과 충용한 인물이 어찌 다른 인물들의 짝이 되어야하고, 어찌 배례를 하고 그들과 친해야 하는가? 하물며 어사는 마땅히 독립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어사의 독립을 강조하였다.
- 위사겸은 관리의 배례만 받기도 했는데 어떤 관리가 여기에 대해 묻자, 위사겸은 오히려“국가의 반열은 본래부터 차등이 있는데, 어찌하여 당장에 탈이 없고 편안하게 일을 이루는 것인가?”라고 말하며 반문하기도 하였다.
이 저작물은 CC BY-NC-SA 2.0 KR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라이선스가 명시된 일부 문서 및 삽화 제외)
기여하신 문서의 저작권은 각 기여자에게 있으며, 각 기여자는 기여하신 부분의 저작권을 갖습니다.
나무위키는 백과사전이 아니며 검증되지 않았거나, 편향적이거나, 잘못된 서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무위키는 위키위키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문서를 고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원할 경우 직접 토론을 발제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