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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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복언니 안정공주는 측천무후가 후궁 시절에 낳은 아이인데,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죽었다. 측천무후가 일부러 안정공주를 죽이고는 황후 왕씨와 숙비 소씨를 범인으로 몰아 모함했다는 설이 있다.
측천무후와 외모나 성격이 닮아서 측천무후가 가장 총애하는 자식이었다고 한다. 특히 측천무후가 황제로 즉위했을 때는 그녀의 곁에서 정치를 보좌하였으며, 세력을 크게 쌓았다. 측천무후 사후에는 당중종을 재옹립하는 데 도움을 주어 권세를 유지하였다. 705년 장역지, 장창종 형제를 주살하는 데 참여한 공으로 진국(鎭國)의 태평공주로 봉해졌다.
당중종 사후에는 후의 현종이 되는 조카 임치왕 이융기와 결탁하여 위황후와 안락공주 모녀를 죽이고 이융기의 아버지 예종을 (재)옹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 사건이 바로 당륭정변이다. 정변 이후 태평공주의 권세는 절정에 달해서 봉읍이 만호(戶)에 달하고, 자신의 자식 3명을 모두 왕에 봉하였다고 한다. 정권을 잡은 후 7명의 재상 중 5명은 태평공주의 심복 출신 인물로 채워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그녀의 권세는 이융기에게 큰 위협이 되었고 이후에 713년 재상 두회정(竇懷貞) 등과 함께 모의하는 등 이번엔 황태자 이융기와 대립하다가 당예종이 이융기에게 양위한 뒤, 당현종이 된 이융기가 병사 300명을 이끌고 태평공주를 공격하여 태평공주 일파를 멸망시킨다. 태평공주는 종남산(終南山)의 남산사로 도망가서 숨어있었으나 끝내 당현종이 보낸 추격병들에게 발각되어 붙잡혔고 그들이 휘두른 칼을 맞고 죽는다. 이 사건을 선천정변이라고 한다.
유약한 오라버니 당예종을 대신하여 실권을 휘둘러 그 거동과 위세가 황제와 같았다고 한다. 애초에 황태녀의 자리를 요구하며 측천무후에게 자리를 물려받으려고 했으나,
측천무후와 외모나 성격이 닮아서 측천무후가 가장 총애하는 자식이었다고 한다. 특히 측천무후가 황제로 즉위했을 때는 그녀의 곁에서 정치를 보좌하였으며, 세력을 크게 쌓았다. 측천무후 사후에는 당중종을 재옹립하는 데 도움을 주어 권세를 유지하였다. 705년 장역지, 장창종 형제를 주살하는 데 참여한 공으로 진국(鎭國)의 태평공주로 봉해졌다.
당중종 사후에는 후의 현종이 되는 조카 임치왕 이융기와 결탁하여 위황후와 안락공주 모녀를 죽이고 이융기의 아버지 예종을 (재)옹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 사건이 바로 당륭정변이다. 정변 이후 태평공주의 권세는 절정에 달해서 봉읍이 만호(戶)에 달하고, 자신의 자식 3명을 모두 왕에 봉하였다고 한다. 정권을 잡은 후 7명의 재상 중 5명은 태평공주의 심복 출신 인물로 채워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그녀의 권세는 이융기에게 큰 위협이 되었고 이후에 713년 재상 두회정(竇懷貞) 등과 함께 모의하는 등 이번엔 황태자 이융기와 대립하다가 당예종이 이융기에게 양위한 뒤, 당현종이 된 이융기가 병사 300명을 이끌고 태평공주를 공격하여 태평공주 일파를 멸망시킨다. 태평공주는 종남산(終南山)의 남산사로 도망가서 숨어있었으나 끝내 당현종이 보낸 추격병들에게 발각되어 붙잡혔고 그들이 휘두른 칼을 맞고 죽는다. 이 사건을 선천정변이라고 한다.
유약한 오라버니 당예종을 대신하여 실권을 휘둘러 그 거동과 위세가 황제와 같았다고 한다. 애초에 황태녀의 자리를 요구하며 측천무후에게 자리를 물려받으려고 했으나,
"네가 뛰어나다는 건 나도 잘 안다. 그러나 또 여자가 황제가 되려면 신료들을 또 다시 대숙청해야 할텐데 나도 그렇게 황위에 올랐지만 그건 다시 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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