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녹산
최근 수정 시각:
당나라의 반란자 | |
연 초대 황제 안녹산 | 安祿山 | |
없음 | |
광렬황제(光烈皇帝) | |
안(安) | |
녹산(禄山) | |
성무(聖武, 756년 ~ 757년) | |
체중 | 200kg |
황후 | 애황후(哀皇后) 강씨(康氏) |
생몰 | |
재위 | 초대 호연 황제 |
중국 당나라 시기의 장군. 안녹산의 난을 일으켜서 연나라 황제를 자칭했다. 한족식 이름이라서 한족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소그드족[1] 출신으로 페르시아계 백인(코카소이드)과 돌궐족의 혼혈이다.[2] 본래 성씨는 강(康)이고, 아명은 알락산(軋犖山)이다. 그의 이름인 '녹산'은 소그드어 '로흐샨(rwxšn/roxš(a)n)'을 음차한 것으로, '밝음, 빛나다'라는 뜻이다. 현대 페르시아어 이름, '로우샨(روشن, rowšan)'과 같은 어원이다. 그리고 유럽의 인명인 록사나, 록산느, 록시와도 어원이 같다. 이름이 록산, 녹산으로 섞여서 표기되는 경우가 많은데 어원이 어원이니만큼 록산이 원래의 소그드어 이름에 더 가깝겠지만 두음법칙에 의해 한국어로는 안녹산이 된다.
안녹산은 소그드어를 모어로 사용했고, 그 이외에도 중국어(중고한어), 페르시아어, 티베트어, 토하라어 등, 총 6개 언어를 구사했다고 한다.
안녹산은 소그드어를 모어로 사용했고, 그 이외에도 중국어(중고한어), 페르시아어, 티베트어, 토하라어 등, 총 6개 언어를 구사했다고 한다.
안녹산의 아버지는 이란계 소그드인의 유력자인 것으로 추측되며, 어머니는 돌궐의 무녀였다고 한다. 안녹산 가문이 속한 돌궐 부족의 가한이 716년에 죽자 족장의 승계와 다른 부족과의 합병을 두고 심각한 분쟁이 일어났고, 안녹산의 가문은 이를 피해 당나라에 망명했다. 이때 안녹산 가문은 당으로부터 안(安)씨 성을 하사받은 것으로 보인다.
젊은 시절 안녹산은 인근 부족의 6개 국어를 구사하는 능력을 바탕으로 호시아랑(互市牙郎)에 임명되었다. 이 호시아랑 직위는 오늘날로 말하면 일종의 통역사이자 무역관이었는데, 안녹산은 상업으로 유명했던 소그드인 출신답게 이 직위를 십분 활용해서 한족과 국경의 이민족들의 중계무역을 장악해서 많은 부를 축적했다.
한편 안녹산은 이 시기 당시 유주 절도사였던 장수규의 눈에 띄어 군인으로 발탁된다. 이후 변방의 수비를 맡아서 나름 군공을 쌓았으며 장수규를 통해 당나라의 중앙 조정에도 연줄을 놓는다. 야심이 컸던 안녹산은 중계무역으로 얻은 재산을 바탕으로 중앙의 관료들에게 많은 뇌물을 뿌려 당 조정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으며 자신의 상관이었던 장수규가 몰락한 이후에도 중앙조정의 인맥을 바탕으로 승승장구했다.
드디어 안녹산은 당시 황제였던 현종을 알현할 수 있었고, 현종은 안녹산의 태도와 능력이 무척 마음에 들어 742년 그를 평로절도사로 임명한다. 현종의 마음을 얻은 안녹산은 당시 현종을 사로잡고 있었던 양귀비의 마음도 얻으려고 노력했는데, 안녹산은 대뜸 양귀비를 양모로 모시고 그 양자가 되기를 청했다. 문제는 양모로 모셨던 양귀비가 양자 안녹산보다 16년이나 연하였다는 것.
하지만 안녹산은 이런 사안에 개의치 않고 양귀비의 양자로 자처했으며 조정에 들어갈 때마다 일단 양귀비에게 문안인사부터 하고 나서 자기 일을 시작했다. 이렇게 양귀비에게 지극정성을 바쳤던 안녹산의 태도와 양귀비 역시 안녹산을 총애했기 때문에 안녹산과 양귀비가 서로 남녀로서 사통한다는 추문이 생기기도 했는데[3] 정사에 기록된 내용은 전혀 없으며 현실적으로도 별로 개연성이 없기 때문에[4] 현재는 근거 없는 루머 수준으로 취급되고 있다.[5]
현종은 안녹산의 군사적 능력을 인정해서 744년에는 그를 범양절도사로 임명했으며 751년에는 추가로 하동절도사로 임명한다. 이처럼 평로/범양/하동 세 곳의 절도사 자리를 확보한 안녹산은 이제 당나라 전체 군세의 1/3 가량을 차지하는 최대 군벌로 자리잡는다.
751년에는 거란족을 공격하나 오히려 패하고, 부장 사사명이 겨우 막아낸다.
하지만 정치 군사 양면으로 승승장구하던 안녹산에게도 걸림돌이 나타났는데, 바로 당시 당나라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권신 양국충(楊國忠)이었다. 양국충은 현종의 총희(寵姬) 양귀비의 친척 오빠였으며 752년 라이벌이었던 이임보가 죽은 후 전권을 쥐고 본격적으로 전횡을 일삼고 있었다.
양국충은 안녹산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해서 그가 반란을 획책하고 있다고 모함을 했는데, 이에 분개한 안녹산은 755년 실제로 간신 양국충 타도를 명분으로 내세운 안녹산의 난을 일으킨다.
다만 현재는 양국충의 주장이 단순한 모함이 아니라 실제로 안녹산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가 양국충에게 들키는 바람에 성급하게 반란을 시작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현종 치세 당시의 당나라는 위구르족이나 돌궐족과 같은 이민족 출신들이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었고 특히 군사 분야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이민족 출신에 대한 대우가 기존의 한족 출신들의 대우보다 소홀했기 때문에 이민족 출신 장수들의 불만이 계속 높아져 가고 있었고 현종이 양귀비에 빠져서 정치에 손을 놓고 국가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이런 부조리가 더 심해졌기 때문에 당시에는 언제 반란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안녹산 역시 이민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런 점을 잘 알고 있었으며 당시 당나라 최대 군벌로 성장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유사시에는 바로 당 조정에 반기를 들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실제로 안녹산의 난이 시작되었을 당시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진행된 점이나 반란 초반에 이민족 출신 장수들이 많이 포진해 있던 하북지역 대부분이 바로 안녹산에게 협력했다는 점 등이 이런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 자세한 것은 안녹산의 난 항목 참조.
군사반란에 성공하고 낙양에서 웅무황제(雄武皇帝)에 즉위해 국호를 연(燕), 연호를 성무(聖武)로 했다. 하지만 당 현종은 쓰촨성으로 퇴각하고 당 숙종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계속 안녹산과 전투를 치르면서 안녹산의 세력은 지지부진해졌다. 게다가 안녹산은 거병을 한 다음부터는 건강이 나빠졌는데 점점 눈이 나빠지고 있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의 실명 상태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아예 실명을 하게 되며 궤양에도 걸리게 되자 매우 난폭해졌다. 특히 조금이라도 기분이 나쁘면 궁인들을 폭행하고 죽이는 일을 흔하게 벌여 궁인들이 그를 두려워하게 된다. 나중에는 측근들과 가족에게도 폭력을 쓰게 되어 측근들과 가족들도 그를 두려워한다. 757년 후계자 문제로 갈등을 빚던 터에 아들 안경서에게 살해당하고 만다.[6] 하지만 곧바로 휘하 군인이었던 사사명이 안경서마저 죽이고 계속 군사반란을 이어가면서 내전이 격화되었고 사사명 역시도 아들 사조의에게 암살당해 사조의가 군사반란을 이어갔다가 사조의의 군대는 당나라-위구르 연합군의 공격으로 군이 격퇴당하면서 황제에게 체포당할 것을 두려워해 763년에 사조의가 자결함으로써 8년 만에 당 제국 최대의 군사반란 및 거대한 내전 중 하나가 막을 내린다.
젊은 시절 안녹산은 인근 부족의 6개 국어를 구사하는 능력을 바탕으로 호시아랑(互市牙郎)에 임명되었다. 이 호시아랑 직위는 오늘날로 말하면 일종의 통역사이자 무역관이었는데, 안녹산은 상업으로 유명했던 소그드인 출신답게 이 직위를 십분 활용해서 한족과 국경의 이민족들의 중계무역을 장악해서 많은 부를 축적했다.
한편 안녹산은 이 시기 당시 유주 절도사였던 장수규의 눈에 띄어 군인으로 발탁된다. 이후 변방의 수비를 맡아서 나름 군공을 쌓았으며 장수규를 통해 당나라의 중앙 조정에도 연줄을 놓는다. 야심이 컸던 안녹산은 중계무역으로 얻은 재산을 바탕으로 중앙의 관료들에게 많은 뇌물을 뿌려 당 조정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으며 자신의 상관이었던 장수규가 몰락한 이후에도 중앙조정의 인맥을 바탕으로 승승장구했다.
드디어 안녹산은 당시 황제였던 현종을 알현할 수 있었고, 현종은 안녹산의 태도와 능력이 무척 마음에 들어 742년 그를 평로절도사로 임명한다. 현종의 마음을 얻은 안녹산은 당시 현종을 사로잡고 있었던 양귀비의 마음도 얻으려고 노력했는데, 안녹산은 대뜸 양귀비를 양모로 모시고 그 양자가 되기를 청했다. 문제는 양모로 모셨던 양귀비가 양자 안녹산보다 16년이나 연하였다는 것.
하지만 안녹산은 이런 사안에 개의치 않고 양귀비의 양자로 자처했으며 조정에 들어갈 때마다 일단 양귀비에게 문안인사부터 하고 나서 자기 일을 시작했다. 이렇게 양귀비에게 지극정성을 바쳤던 안녹산의 태도와 양귀비 역시 안녹산을 총애했기 때문에 안녹산과 양귀비가 서로 남녀로서 사통한다는 추문이 생기기도 했는데[3] 정사에 기록된 내용은 전혀 없으며 현실적으로도 별로 개연성이 없기 때문에[4] 현재는 근거 없는 루머 수준으로 취급되고 있다.[5]
현종은 안녹산의 군사적 능력을 인정해서 744년에는 그를 범양절도사로 임명했으며 751년에는 추가로 하동절도사로 임명한다. 이처럼 평로/범양/하동 세 곳의 절도사 자리를 확보한 안녹산은 이제 당나라 전체 군세의 1/3 가량을 차지하는 최대 군벌로 자리잡는다.
751년에는 거란족을 공격하나 오히려 패하고, 부장 사사명이 겨우 막아낸다.
하지만 정치 군사 양면으로 승승장구하던 안녹산에게도 걸림돌이 나타났는데, 바로 당시 당나라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권신 양국충(楊國忠)이었다. 양국충은 현종의 총희(寵姬) 양귀비의 친척 오빠였으며 752년 라이벌이었던 이임보가 죽은 후 전권을 쥐고 본격적으로 전횡을 일삼고 있었다.
양국충은 안녹산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해서 그가 반란을 획책하고 있다고 모함을 했는데, 이에 분개한 안녹산은 755년 실제로 간신 양국충 타도를 명분으로 내세운 안녹산의 난을 일으킨다.
다만 현재는 양국충의 주장이 단순한 모함이 아니라 실제로 안녹산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가 양국충에게 들키는 바람에 성급하게 반란을 시작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현종 치세 당시의 당나라는 위구르족이나 돌궐족과 같은 이민족 출신들이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었고 특히 군사 분야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이민족 출신에 대한 대우가 기존의 한족 출신들의 대우보다 소홀했기 때문에 이민족 출신 장수들의 불만이 계속 높아져 가고 있었고 현종이 양귀비에 빠져서 정치에 손을 놓고 국가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이런 부조리가 더 심해졌기 때문에 당시에는 언제 반란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안녹산 역시 이민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런 점을 잘 알고 있었으며 당시 당나라 최대 군벌로 성장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유사시에는 바로 당 조정에 반기를 들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실제로 안녹산의 난이 시작되었을 당시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진행된 점이나 반란 초반에 이민족 출신 장수들이 많이 포진해 있던 하북지역 대부분이 바로 안녹산에게 협력했다는 점 등이 이런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 자세한 것은 안녹산의 난 항목 참조.
군사반란에 성공하고 낙양에서 웅무황제(雄武皇帝)에 즉위해 국호를 연(燕), 연호를 성무(聖武)로 했다. 하지만 당 현종은 쓰촨성으로 퇴각하고 당 숙종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계속 안녹산과 전투를 치르면서 안녹산의 세력은 지지부진해졌다. 게다가 안녹산은 거병을 한 다음부터는 건강이 나빠졌는데 점점 눈이 나빠지고 있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의 실명 상태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아예 실명을 하게 되며 궤양에도 걸리게 되자 매우 난폭해졌다. 특히 조금이라도 기분이 나쁘면 궁인들을 폭행하고 죽이는 일을 흔하게 벌여 궁인들이 그를 두려워하게 된다. 나중에는 측근들과 가족에게도 폭력을 쓰게 되어 측근들과 가족들도 그를 두려워한다. 757년 후계자 문제로 갈등을 빚던 터에 아들 안경서에게 살해당하고 만다.[6] 하지만 곧바로 휘하 군인이었던 사사명이 안경서마저 죽이고 계속 군사반란을 이어가면서 내전이 격화되었고 사사명 역시도 아들 사조의에게 암살당해 사조의가 군사반란을 이어갔다가 사조의의 군대는 당나라-위구르 연합군의 공격으로 군이 격퇴당하면서 황제에게 체포당할 것을 두려워해 763년에 사조의가 자결함으로써 8년 만에 당 제국 최대의 군사반란 및 거대한 내전 중 하나가 막을 내린다.
- 비만
안녹산은 매우 뚱뚱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랫배가 무릎까지 처지고 몸무게가 230근(약 152kg[7])에 달했다고 한다. 현종이 그 불룩한 뱃속에 무엇이 들었냐고 물었을 때 "단지 충심(忠心)만이 들어있사옵니다."라고 대답해서 현종이 대놓고 웃음을 터트렸다. 거란족 출신으로 10세에 안녹산이 직접 거세를 한 환관 이저아(李猪兒)를 군인처럼 곁에 두었는데 이저아는 안녹산이 옷을 갈아입을 때 머리로 배를 받쳐 들고 허리띠를 매어줬다고 한다.[8] 너무 배가 커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허리띠를 맬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뚱뚱했기 때문에 말년의 눈병과 실명은 당뇨병의 영향으로 추측되고 있다. 뚱뚱했던 것과는 별개로 몸놀림 자체는 재빨랐던 듯하다. 안녹산은 호선무(胡旋舞)[9]라는 춤을 잘 췄다고 전하는데 이 춤은 서역에서 전래된 춤으로 머리 위에 그릇을 올려놓은 상태에서 아주 빠른 속도로 빙글빙글 도는 춤이다. 이런 춤을 잘 춘다는 건 뚱뚱한 체격과는 별개로 매우 민첩하고 운동 신경이 좋았다는 것을 뜻한다.[10] 또한 활을 잘 다루었으며 스스로도 그 활솜씨를 자랑으로 여겼다.
- 양을 훔친 일화
732년 안녹산이 양을 훔친 사건이 있었는데, 당시 유주 절도사였던 장수규에게 이 일이 드러나자, 장수규는 안녹산을 검으로 목을 베어 죽이려고 하였다. 하지만 안녹산은 장수규에게 일갈하였다.공은 양번[11]을 멸하고 싶지 않으시옵니까? 어찌 저를 죽이려 하십니까?자신에게 일갈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장수규는 안녹산을 풀어주었고 이후 자신의 부하로 삼았다. 안녹산은 장수규 휘하에서 전공을 세웠고, 이후 안녹산은 장수규의 양자가 되었다.
- 안녹산의 위험성을 경고한 인물들
장구령은 당 현종에게 "안녹산이 위험하니 검으로 목을 베어 죽여야 된다"고 경고를 하기도 하였다. 안녹산이 해족과 거란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그에게 사형을 내리려고 할 때 당 현종은 안녹산을 특별히 사면하였다. 장구령은 "안녹산이 이리의 새끼와 같아서 좀처럼 길들일 수 없고 반란을 일으킬 상이 있기 때문에 안녹산을 처형하라"고 건의하였지만 당 현종은 왕이보(王夷甫)가 석륵을 알아본 고사를 가지고 "충량한 이를 그릇되게 해치지 말라"며 장구령의 건의를 일축하고 안녹산을 돌려보냈다. 결국 장구령의 경고는 이후에 제대로 들어맞게 되었는데 안녹산이 군사 반란을 일으키자 당 현종은 이전에 장구령이 자신에게 한 경고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고 장구령의 경고를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다. 왕충사도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니 죽여야 한다"고 현종에게 간하였으며 이후 간신이었던 양국충조차도 "안녹산은 분명히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하였다. 게다가 사촌이었던 안사순도 안녹산이 난을 일으킬 거라고 하였다.[13][14]
- 가서한과의 관계
사촌이었던 안사순과 마찬가지로, 가서한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 유명한 인물이라 사극에 여러번 등장했지만 주인공인 경우는 없고 일반적으로 양귀비 드라마에 조연으로 등장한다.
- 2017년 중드 대당영요에서 임설이 안녹산을 맡았다. 아들 안경서보다 비중이 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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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타지키스탄의 주류민족인 타지크인이 이들의 후예이고 특히 타지키스탄의 소수민족인 야그노비인은 그들의 언어인 야그노비어가 아예 소그드어까지 계승한 직계 후예라 한다.[2] 정작 중화권 사극에서는 황백혼혈 배우가 아니라 한족 등 순수 황인 배우가 맡는다. 안녹산이 페르시아계 백인(소그드인)과 튀르크계 황인(돌궐족)의 혼혈이었으므로, 중국의 민족들 중 비슷하게 페르시아계 백인과 튀르크계 황인의 혼혈인 위구르족이나 우즈베크족이 안녹산 역을 맡는 게 가장 자연스러운 캐스팅이다.[3] 양귀비가 안녹산을 자신의 욕탕으로 데려가 아이 씻겨주는 것처럼 목욕을 시켜주었다고 한다. 글만 봐도 찐야설 같은 내용인데 당대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러쿵저러쿵 카더라식 소문들이 나오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이다.[4] 양귀비가 안녹산을 양아들로서 귀여워한 것은 맞으나, 남자로서 연심을 가진 것은 아니다. 게다가 현종이 버젓이 있는데 굳이 안녹산 따위(..)에게 관심을 가졌을 리도 없다. 그리고 안녹산 역시 성욕에 미친 바보도 아니고 양귀비에게 먼저 손을 댔을 가능성도 없다.[5] 설혹 정말로 양귀비와 안녹산이 심상치 않은 사이였다면 현종이 안녹산을 계속 조정에서 활개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6] 아버지의 난폭함을 말리는 안경서와 갈등이 커지자 안녹산이 2번째 아내의 아들을 후계자로 선포하여 충격을 받은 안경서가 아버지의 측근들과 합심해서 그를 살해한 것이다. 특히 안경서는 난폭해진 아버지가 자신을 살해할 것이라고 두려워한 터라 그 전에 아버지를 살해하기로 결정했고 안녹산의 측근들도 갈수록 난폭해지는 안녹산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모두 안경서 측에 가담하여 안녹산을 살해하는 것에 동의한 상황이었다. 이때 안녹산은 항상 곁에 검을 두고 다녔는데 안경서와 측근들, 내관 이저아가 사전에 검을 치운 터라 반격을 하려 해도 할 수 없었고 결국 안경서의 지시를 받은 이저아의 검에 찔려 죽는다.[7] 당나라 때는 1근이 16냥이며 1근이 661g이었다.[8] 이저아는 안녹산이 폭력적으로 변하자 자주 얻어맞았는데 그러다보니 견딜 수가 없어 안녹산의 측근 엄장, 장남 안경서와 함께 작당해서 안녹산을 살해한다.[9] 고구려와 수나라에도 이 춤이 있었다.[10] 현대의 스모 선수들도 겉모습과 달리 대체로 엄청 날렵하고 유연하다.[11] 거란, 해[12] 허영만의 만화 꼴에도 이 일화가 등장한다.[13] 역신인 안녹산과는 달리 안사순은 당의 국경 수비에 주력하는 등 당의 충신이었다.[14]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삭방절도사로 재직 중 조정으로 소환되나, 죽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서한의 무고로 인해 안원정과 함께 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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