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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제(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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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 책봉
소도성
남제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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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도성
남제 건국


남제 초대 황제
고제 | 高帝
齊高祖像
출생
즉위
사망
482년 4월 11일 (향년 55세)
능묘
태안릉(泰安陵)
재위기간
유송의 제국공(齊國公)
유송의 제왕(齊王)
초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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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도성(道成)
부모
부황 선황제
모후 선효황후
형제자매
3남 중 3남
배우자
고소황후
자녀
19남 3녀
신장
173cm
아명
두장(斗將)
소백(紹伯)
작호
서양현후(西陽縣侯)
→ 양국공(梁國公)
→ 제국공(齊國公)
→ 제왕(齊王) → 황제(皇帝)
묘호
태조(太祖)
시호
고황제(高皇帝)
연호
건원(建元, 479년 ~ 48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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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고인상찬에 실린 초상화

1. 개요2. 출신3. 생애
3.1. 잇따른 전공3.2. 위기를 기회로3.3. 황제가 되다3.4. 사후
4. 평가5. 둘러보기(계보)

1. 개요[편집]

남조 남제의 초대 황제.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고황제(高皇帝)였다. 재위기간 동안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고제 소도성은 소승지와 진도정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으로 유송 원가 4년(427년)에 태어났다. 자는 소백(紹伯)이었으며 아명은 투장이었다.

2. 출신[편집]

회음부군(淮陰府君) 소정
자: 즉구부군(即丘府君) 소준
손: 태상부군(太常府君) 소악자
증손: 선제(宣帝) 소승지
현손: 고제(高帝) 소도성 - 남조 남제의 초대 황제
자: 제음부군(濟陰府君) 소할
손: 중종사사부군(中從事史府君) 소부자
증손: 특진부군(特進府君) 소도사
현손: 태조 문제(文帝) 소순지
내손: 무제(武帝) 소연 - 남조 소량의 초대 황제
고제 소도성의 조상은 동해 난릉현[1] 사람이었다. 서진 말기 영가의 대란 당시에 강남으로 피난한 사람들을 출신지역별로 묶어 재정착시킬 때 혼동 방지를 위해 화북의 원래 지역명 앞에 '남'(南)자를 붙였는데[2] 그의 고조부 소정도 그 피난민 중 한 명이라서 남난릉[3]에 정착했다. 전한의 명재상 소하의 24대손이라고 자칭했으나, 사실 본인이 유언을 남길 때 자기를 '포의소족', 즉 평민 출신이었다고 인정했다. 그런데 일단 《남제서》에서는 소하의 24대손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적국 북위의 역사서였던 《위서》(북위서)에서는 오랑캐 도성이라고 폄하되어 있다.

유송의 건국자 유유도 섬오랑캐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원문에는 '도이'(島夷)라고 기록되어 있다. 말그대로 섬오랑캐라는 뜻이며 북위에서는 남조 황제들을 모두 섬오랑캐라고 깠다. 도이(島夷)란 당대에는 장강 및 그 이남 지역 주민을 비하하던 말로, 당•송 이후에는 동남아시아와 남양 제도의 주민을 가리키는 말로 변질되었다. 반면 남조 사람들은 북조 사람들을 '삭로'(索虜), 또는 '삭두로'(索頭虜)라고 폄칭했는데 머리털을 끈으로 땋은 것을 가리킨 것이다.

섬오랑캐라는 건 물론 거짓이며, 정통을 북위로 본 《위서》의 저자 위수가 유유와 소도성을 까기 위해서 적은 춘추필법이다. 《위서》에서는 남제뿐만 아니라 유송의 황제를 섬오랑캐라고 까면서 함부로 기록했다. 그래서 《위서》는 더럽고 공정하지 않은 역사서라고 까인다. 남제의 역사서 《남제서》에서도 북위를 '魏虜'(위로), 즉 '북쪽(위나라) 오랑캐'라고 불렀다.

전통적으로는 북조의 역사서들이 왜곡이 많아서 욕을 많이 먹고 있어서 주로 남조측의 역사서를 신뢰하는 경향이 있기에 《북위서》에서 소도성을 욕한다고 소도성이 소하의 일족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24대손-24대조 관계면 천민 집안이 황실이 될 수도 있고, 황실이 천민 집안으로 영락하거나 아예 멸족당할 수도 있는 긴 시간대라서, 실제로 소하의 후손이 맞으면서도, 본인 당대 및 가까운 조상 대에는 그냥 평민이라는 것이 서로 양립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다만 유송의 건국자 송무제 유유가 조상인 초원왕 유교의 도읍이었던 서주 팽성에서 조상 대대로 유씨 집성촌을 이루며 살다가 남쪽으로 이주한 케이스인 반면, 남제 고제 소도성의 경우 조상이라고 칭하는 소하가 이미 한나라 시기부터 자손이 거의 끊기다시피 해서 한나라에서도 간신히 소하의 후손을 찾아 후에 봉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라 '남북조 시대에 소하의 후손이 그때까지 남아 있었을까?'라는 의문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이 최대 약점이다.

3. 생애[편집]

3.1. 잇따른 전공[편집]

소도성은 이처럼 무장 가문이었지만 13살 때 유학자 뇌차종(雷次宗) 문하에서 유학을 배워 《예기》와 《춘추좌씨전》을 익혔다. 원가 17년(440년), 송나라 사도 팽성왕 유의강이 강주자사로 강등당하여 예장을 지킬 때 부친 소승지가 군사를 이끌고 휘하에 배속되면서 공부를 그만두고 부친을 따라다녔다.

원가 23년(446년), 옹주자사 소사화 밑에서 좌군중병 참군의 일을 담당했고, 송 명제 유욱(宋明帝 劉彧)이 즉위하자 우군장군이 되었다.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칙명을 받고 하루에 적의 보루 12개를 함락시키고 ,태시 3년(467년) 8월에 남서주에 가서 정사를 처리했다. 여기서 소도성은 1,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회음에 주둔하면서 뛰어난 인재를 양성했는데 빈객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다음 해 7월에는 남연주자사가 되어 광릉을 수비했다.

소도성은 키가 7척 5촌으로 약 173cm였다. 촉나라 유비신라 실성 마립간도 7척 5촌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유송을 건국한 유유의 키는 7척 6촌이며 진패선은 7척 5촌이다. 유일하게 을 건국한 소연은 신장이 기록되지 않았다. 사실 7척 5촌이라는 키가 제왕의 덕을 강조하는 요소 중 하나로 쓰인 신체적 특징이다.

또한 영특하며 남다른 생김새가 민간에서는 천자로서 손색이 없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에 송 명제 유욱은 그를 의심하여 태시 6년(470년)에 황문시랑, 월기교위로 임명하여 조정으로 소환했는데, 그를 수도에서 감시하면서 제어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소도성은 망설이다가 관군참군 순백옥이 기병 10기를 북위의 국경으로 파견하여 긴장 국면을 조성하게 하자고 건의해서 실행했더니 과연 북위에서는 수백 명의 기병을 보내 대비했다. 소도성은 이를 보고하여 제자리를 보존했지만, 이번에는 어떤 사람이 회음에서 소도성이 반란을 꾀한다는 참언을 올렸다. 이에 송 명제 유욱은 (銀)단지에 을 담아 회릉태수 오희에게 주어 내리도록 했다. 소도성은 두려워서 먹지 않으려고 했는데 오희가 내막을 알려주어 그 술을 마심으로써 의심이 풀리게 되었다.

태시 7년(471년) 7월, 송 명제 유욱은 또 소도성을 조정으로 소환했는데 좌우에서는 황족들과 대신들이 살육되고 있는 점을 들어 말렸으나, 소도성은 망설이다가는 의심을 사게 될 것이니 빨리 떠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연 건강에 이르니 송 명제 유욱은 소도성을 산기상시, 좌자좌위솔에 임명했다.

태예 원년(472년) 4월, 우위장군, 위위가 되었고 상서령 원찬과 함께 기밀을 담당했다. 위위에서 시중으로 옮긴 후에는 석두수군사를 통솔했다. 후폐제 유욱(後廢帝 劉昱)이 즉위하고, 계양왕 유휴범(桂陽王 劉休範)이 심양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대비를 못해 쩔쩔매던 조정 대신 용감하게 중임을 맡았다. 소도성은 둔기교위 황회와 월기교위 장경아를 시켜 거짓 투항을 시키게 하고, 내부에서도 확고한 대비를 했다. 장경아는 유휴범과 술을 마시다가 그가 술에 취해 무방비 상태가 되자 그의 칼을 꺼내 찔러 죽이고 난을 평정했다.

원휘 2년(474년) 6월에는 중령군 및 남연주자사가 되어 건강을 수비하고 원찬, 호군 저연, 복야 유병과 함께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여 사귀(四貴, 네 명의 귀인)라고 불렸다.

3.2. 위기를 기회로[편집]

원휘 4년(476년) 6월, 후폐제 유욱의 사촌 형제였던 남서주자사 건평왕 유경소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7월 초에 소도성이 난을 평정했다. 유경소의 난은 유송 충성파 모두가 참여하였다. 유욱의 폭정을 본다면 "이걸 진압하는 소도성도 미친 놈이다."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한다. 허나 후폐제의 성정을 보면 소도성 입장에서는 유경소의 반란을 진압하지 못했거나 방관을 했을 시 의심을 사고 죽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소도성이 이처럼 반란을 계속 평정하자, 더 교만해지고 방종해져서 사람을 함부로 살육하던 후폐제 유욱은 소도성의 명성을 꺼려 그를 죽일 생각을 했다. 후폐제 유욱은 나무로 소도성의 형상을 조각하게 하고 직접 활로 쏘았으며 좌우에게도 쏘게 하여 명중하는 자에게는 상을 내렸다. 이 사이에 소도성은 친위군의 실권을 손에 넣었다.

원희 5년(477년) 6월 한여름에 소도성이 친위군 병영에서 대낮에 웃통을 벗고 누워자고 있는데 후폐제 유욱이 들어와서 활로 그의 배를 쏘려고 했다. 소도성은 깨어나 겁을 먹고 목숨을 빌었는데 소도성의 몸이 비대하여 배가 올챙이처럼 튀어나왔으므로 과녁을 그린 다음 배꼽을 쏘려고 했다. 그러나 좌우에서 지금 쏘면 소도성이 죽어 다시 쏠 수가 없다고 말려 로 만든 화살로 대신 맞혔다.

이에 소도성은 두려움에 빠져 월기 교위 왕경칙에게 황제의 측근인 양옥부, 양만년 등 15명과 약조를 맺고, 기회를 엿보며 암살을 명했다. 때마침 적절하게 7월 7일 칠석날, 절에서 훔친 를 술과 같이 먹고, 한밤중에 궁궐로 돌아온 후폐제 유욱이 양옥부에게 네가 해가 뜰 때까지 은하수를 건너는 견우직녀를 찾으면 보고하고 못찾으면 넌 죽을 것이야라고 으름장을 놓은 후에 잠들었다. 그런데 사실 후폐제 유욱의 으름장은 양옥부 등이 배반할 것을 짐작해서 으름장을 놓았을 가능성이 높은데 어쨌든 그가 잠들자 양옥부는 후폐제 유욱이 심혈을 다해 제작한 살인 도구를 꺼내 목을 잘라 죽인다.

후폐제 유욱은 총명해서 모자 재단하는 것을 한 번만 보면 직접 만들 수 있었고 처음 연주하는 악기도 스스로 연습하면 능히 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능력을 살인 도구 제작에 썼고 그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만든 도구에 일일이 이름을 붙일 정도였다. 다른 사람들을 죽일 때 쓰던 도구가 자신을 죽이는 데 사용될줄은 몰랐다.

양옥부는 자른 유욱의 목을 왕경칙에게 바쳤다. 왕경칙은 후폐제 유욱의 머리를 들고 소도성의 집에 찾아가서 후폐제 유욱을 죽였다고 알렸지만 소도성은 믿지 못하고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왕경칙은 소도성을 설득하지 못하고, 연못에 머리를 버리고 돌아갔고, 소도성은 슬그머니 나와 연못에서 머리를 꺼내 를 물로 씻었더니 과연 후폐제 유욱의 머리였다.

소도성은 기회를 잡기 위해 즉시 친위군을 소집하여 궁궐로 들어가 점령하고 차후의 일을 의논했다. 왕경칙은 "천하는 이미 소씨의 천하다. 거역하는 자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야."라면서 으름장을 놓고는 얼른 제위에 오르라고 했다. 하지만 소도성은 뇌차종에게 유학을 배웠기에 선양의 아름다운 방식을 잘 알고 있던 소도성은 일단 후폐제 유욱의 동생 안성왕 유준을 황제에 세우니 그가 순제였다.

소도성은 사공(3공의 고위직으로 국정 중대사나 공사 등을 맡음), 녹상서사(내조의 실직으로 비서실장 급. 조조 이후 권신들은 이 직을 차지해 황제와 내부 측근의 유착을 차단한다), 표기대장군(고위 장군으로 군권 관할)이 되어 군국을 총관장하고 대권을 모두 손에 넣었다. 이에 원찬과 유병은 불만을 품고 12월 말에 거사를 하기로 했지만 탐지되어 먼저 원찬과 유병을 없앴다.

소도성은 형주 자사 심유지가 난을 일으킬거라고 생각하고 미리 대비했다. 심유지는 자신의 재략이 남보다 뛰어나서 딴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미리 알고 있던 소도성은 장경아를 윈휘 3년(475년) 3월에 옹주 자사로 임명하고 심유지를 경계하게 했다. 처음에는 심유지가 경계를 했으나, 장경아의 일처리가 워낙 주도면밀해서 심유지가 성심으로 대하고 그를 믿어 주었다.

윈휘 5년(477년), 심유지가 난을 일으키자 장경아는 비밀리에 건강에 있던 소도성에게 보고했다. 결국 12월에 심유지가 영성을 공격했지만 소도성의 구원병이 도착하여 승명 2년(478년) 정월에 심유지는 화용계로 달아나 역림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

3.3. 황제가 되다[편집]

심유지의 난을 평정한 소도성은 반란을 꾀한 영주 자사 황회를 죽이고 명제 유욱의 총신이었던 원전부와 양운장을 외지로 보낸 다음 군국대권을 모두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승명 3년(479년) 3월에는 상국이 되어 10군을 봉지로 얻고 양공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심복 최조사가 '참서(도참)에 제나라는 금도리인으로 다른 나라를 멸했다라고 되어 있으니 공은 제나라에 책봉되는게 천명에 타당합니다'라고 해서 제공(齊公)이 되었다. 4월에는 제왕(齊王)으로 승진하여 10군을 더 봉지로 받았고, 결국 그 달에 순제 유준이 선양하여 소도성은 건강 남교에서 즉위하고 국호를 제, 수도를 건강으로 정하니, 후대 역사가들은 이 나라 이름을 남제(南齊)로 부른다. 이 때 소도성은 이미 증손자도 여럿 있었다.[4][5]

소도성은 초대 황제답게 도량이 넓고 생각이 깊으며 말이 적고 희로애락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또 박식하고 문장을 잘짓고 초서예서에 능하며 바둑을 좋아했다. 즉위 후에는 유학자 유환의 건의에 따라 송나라 효무제 유준 이후의 폭정을 개혁하며, 조정을 엄격하고 공정하게 해서, 관리와 백성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했다. 5월에는 여음왕으로 강등되었던 순제 유준을 죽이고 송나라 유씨 황족을 모두 멸했으며 그 자리에 그대로 소씨 일족들을 봉했다. 이렇게 송나라 황족은 전폐제 유자업 시대에 북위로 망명한 문제 유의륭의 9남 의양왕 유창을 제외하면 모두 멸족되었다. 유창은 북위 황제의 사위가 되어 대를 이어나갔다. 자세한 것은 유자업 문서 참조.

소도성은 절약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자신도 정교하고 아름다운 귀중품을 지니지 않고 구리로 장식된 궁궐의 기물과 난간을 모두 쇠로 바꾸었다. 그리고 매번 자신에게 10년 동안만 천하를 다스리게 하면 황금을 흙과 같은 값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결국 건원 4년(482년) 3월, 재위 3년 만에 56세의 나이로 건강 임광전에서 병사하고 4월에 태안릉에 안장되었으며 장남 소색이 즉위했다. 소도성은 죽기 전에 '짐은 하관 상인이자 포의소족(미천한 신분)으로 황제에 오르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소. 이렇게 어렵게 일으킨 창업이니 그대(황족)들과 경(대신)들은 힘써 이 나라를 지켜주기 바라오. 그리고 송나라를 귀감삼아 황족들끼리 내분을 절대 일으켜서는 안 될 것이오.'라며 화목하게 지내라고 권고했다.
소도성 사후 즉위한 소색은 아버지의 유훈을 잊지 않고 형제나 종친을 죽이지 않고 나라를 안정시키는데 전념했다. 그래서 소색의 치세에는 제나라가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지만 아무래도 43세라는 많은 나이에 즉위한 탓인지 겨우 재위 11년만에 사망하였고 그가 사망했을 때 장남인 소장무는 이미 죽은 뒤였기에 소장무의 아들인 소소업이 뒤를 이었다.

문제는 소소업이 군주로서 함량미달이었다는 것으로 애써 본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안정시킨 나라를 단 1년만에 말아먹었다. 결국 재위 1년만에 방계황족인 소란에게 폐위당하고 소란은 잠시 소소업의 동생인 소소문을 옹립한 뒤 곧 그를 쫓아내고 즉위하여 소도성과 그의 자손은 단 15년만에 찬탈당한다.

그나마 소란은 유능해서 소소업의 실정을 바로잡는데 힘썼지만 소소업이 소도성의 자손이 아닌 관계로 정통성이 약한 편이었고 이에 소란은 유송과 마찬가지로 황족들을 대거 죽여 이 때 소도성의 직계는 큰 피해를 보았다. 그나마 소란은 유능하기라도 했지 그 뒤를 이은 소보권은 능력은 없는 주제에 제 아비의 황족 살해만은 물려받아 나라는 못 다스리면서 황족들만 대거 죽였다. 결국 소란보다도 더 먼 황족인 소연이 소보권을 쫓아내고 소보융을 옹립했고 곧 선양을 받아 즉위하니 이로써 소도성이 즉위한지 단 23년만에 제나라가 망하고 양나라가 들어선다.

4. 평가[편집]

남제의 황족 다툼은 유송과 더불어 중국사 내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하드코어였다. 특히 명제 소란의 황족 대량 도살은 유송의 경우보다 더 지독한 경우에 속한다.

소도성은 폭군 유욱을 위해 충성을 다하고 유능한 송나라 황족들을 모두 죽였으며, 유욱이 자기를 죽이려 하자 그 때서야 겨우 유욱을 제거했으나, 자신이 황제가 되기 위해 남은 송나라 대신들을 살육했다. 결국은 유욱의 악행의 공범인 주제에 그 칼날이 자신에게 이르게 되어서야 찬탈을 한 것이고, 게다가 그 자신은 그나마 평균은 지켰으나 그의 직계 및 방계 자손들의 행각이 유송의 막장 황제들보다 오히려 더 지나쳤기 때문에, 좋은 군주로 평가받지 못하고 인지도도 낮다.

유유는 북벌을 통해 산동반도 일대는 물론이고, 잠시나마 양경(낙양ㆍ장안)을 모두 탈환했었던 쾌거를 이루어서 사마씨 왕가를 대체할 만한 명분을 그럭저럭 인정받았으나, 소도성은 황제가 될 명분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었으면서 오로지 자신의 권력을 위해 유송을 없애고 즉위하였다. 이런 그의 행동은 당장 그의 조카 소란부터 황제가 될 명분을 주었으며 이후로도 남조가 계속 황제다툼으로 날이 새도록 만든 악영향을 낳았다.

5. 둘러보기(계보)[편집]

[ 본기(本紀) ]
1·2권 「고제기(高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4권 「전폐제기(前廢帝紀)」
5권 「중폐제기(中廢帝紀)」
6권 명제기(明帝紀)」
7권 「후폐제기(後廢帝紀)」
8권 「화제기(和帝紀)」

※ 9권 ~ 19권은 志에 해당. 남제서 문서 참고
[ 열전(列傳) ]
20권 「황후전(皇后傳)」
21권 「문혜태자전(文惠太子傳)」
22권 「예장문헌전(豫章文獻王傳)」
23권 「저연등전(褚淵傳)」
24권 「유세륭등전(柳世隆等傳)」
25권 「원숭조등전(垣崇祖等傳)」
26권 「왕경칙등전(王敬則等傳)」
27권 「유회진등전(劉懷珍等傳)」
28권 「최조사등전(崔祖思等傳)」
29권 「여안국등전(呂安國等傳)」
30권 「설연등전(薛淵等傳)」
31권 「강밀등전(江謐等傳)」
32권 「왕곤등전(王琨等傳)」
33권 「왕승건등전(王僧虔等傳)」
34권 「우완지등전(虞玩之等傳)」
35권 「고조십이왕전(高祖十二王傳)」
36권 「사초종등전(謝超宗等傳)」
37권 「도휘등전(到撝等傳)」
38권 「소경선등전(蕭景先等傳)」
39권 「유환등전(劉瓛等傳)」
40권 「무십칠왕전(武十七王傳)」
41권 「장융등전(張融等傳)」
42권 「왕안등전(王晏等傳)」
43권 「강효등전(江斅等傳)」
44권 「서효사등전(徐孝嗣等傳)」
45권 「종실전(宗室傳)」
46권 「왕수지등전(王秀之等傳)」
47권 「왕융등전(王融等傳)」
48권 「원단등전(袁彖等傳)」
49권 「왕환등전(王奐等傳)」
50권 「문이왕명칠왕전(文二王·明七王傳)」
51권 「배숙업등전(裴叔業等傳)」
52권 「문학전(文學傳)」
53권 「양정전(良政傳)」
54권 「고일전(高逸傳)」
55권 「효의전(孝義傳)」
56권 「행신전(倖臣傳)」
57권 「위로전(魏虜傳)」
58권 「만・동남이전(蠻・東南夷傳)」
59권 「유목전(遊牧傳)」
60권 「자서전(自序傳)」

[ 제기(帝紀) ]
1권 「서기(序記)」
2권 「태조기(太祖紀)」
3권 「태종기(太宗紀)」
4권 「세조·공종기(世祖恭宗紀)」
5권 「고종기(高宗紀)」
6권 「현조기(顯祖紀)」
7권 「고조기(高祖紀)」
8권 「세종기(世宗紀)」
9권 「숙종기(肅宗紀)」
10권 「효장제기(孝莊帝紀)」
11권 「폐출삼제기(廢出三帝紀)」
12권 「효정제기(孝靜帝紀)」
[ 열전(列傳) ]
13권 「황후전(皇后傳)」
14권 「신원·평문제제자손전(神元平文諸帝子孫傳)」
15권 「소성자손전(昭成子孫傳)」
16권 「도무7왕전(道武七王傳)」
17권 「명원6왕전(明元六王傳)」
18권 「태무5왕전(太武五王傳)」
19권 「경목12왕전(敬穆十二王傳)」
20권 「문성5왕전(文成五王傳)」
21권 「헌문6왕전(獻文六王傳)」
22권 「효문5왕전(孝文五王傳)」
23권 「위조등전(衛操等傳)」
24권 「연봉등전(燕鳳等傳)」
25권 「장손숭등전(長孫嵩等傳)」
26권 「장손비등전(長孫肥等傳)」
27권 「목숭전(穆崇傳)」
28권 「화발등전(和跋等傳)」
29권 「해근등전(奚斤等傳)」
30권 「왕건등전(王建等傳)」
31권 「우율제전(于栗磾傳)」
32권 「고호등전(高湖等傳)」
33권 「송은등전(宋隱等傳)」
34권 「왕낙아등전(王洛兒等傳)」
35권 「최호전(崔浩傳)」
36권 「이순전(李順傳)」
37권 「사마휴지등전(司馬休之等傳)」
38권 「조옹등전(刁雍等傳)」
39권 「이보전(李寶傳)」
40권 「육사전(陸俟傳)」
41권 「원하전(源賀傳)」
42권 「설변등전(薛辯等傳)」
43권 「엄릉등전(嚴棱等傳)」
44권 「나결등전(羅結等傳)」
45권 「위랑등전(韋閬等傳)」
46권 「두근등전(竇瑾等傳)」
47권 「노현전(盧玄傳)」
48권 「고윤전(高允傳)」
49권 「이령등전(李靈等傳)」
50권 「울원등전(尉元等傳)」
51권 「한무등전(韓茂等傳)」
52권 「조일등전(趙逸等傳)」
53권 「이효백등전(李孝伯等傳)」
54권 「유아등전(游雅等傳)」
55권 「유명근등전(游明根等傳)」
56권 「정희등전(鄭羲等傳)」
57권 「고우등전(高祐等傳)」
58권 「양파전(楊播傳)」
59권 「유창등전(劉昶等傳)」
60권 「한기린등전(韓麒麟等傳)」
61권 「설안도등전(薛安都等傳)」
62권 「이표등전(李彪等傳)」
63권 「왕숙등전(王肅等傳)」
64권 「곽조등전(郭祚等傳)」
65권 「형만등전(邢巒等傳)」
66권 「이숭등전(李崇等傳)」
67권 「최광전(崔光傳)」
68권 「견침등전(甄琛等傳)」
69권 「최휴등전(崔休等傳)」
70권 「유조등전(劉藻等傳)」
71권 「배숙업등전(裴叔業等傳)」
72권 「양니등전(陽尼等傳)」
73권 「해강생등전(奚康生等傳)」
74권 「이주영전(爾朱榮傳)」
75권 「이주조등전(爾朱兆等傳)」
76권 「노동등전(盧同等傳)」
77권 「송번등전(宋翻等傳)」
78권 「손소등전(孫紹等傳)」
79권 「성엄등전(成淹等傳)」
80권 「주서등전(朱瑞等傳)」
81권 「기준등전(綦儁等傳)」
82권 「이염지등전(李琰之等傳)」
83권 「외척전(外戚傳)」
84권 「유림전(儒林傳)」
85권 「문원전(文苑傳)」
86권 「효감전(孝感傳)」
87권 「절의전(節義傳)」
88권 「양리전(良吏傳)」
89권 「혹리전(酷吏傳)」
90권 「일사전(逸士傳)」
91권 「예술전(藝術傳)」
92권 「열녀전(列女傳)」
93권 「은행전(恩倖傳)」
94권 「엄관전(閹官傳)」
95권 「유총등전(劉聰等傳)」
96권 「사마예등전(司馬叡等傳)」
97권 「환현등전(桓玄等傳)」
98권 「소도성등전(蕭道成等傳)」
99권 「장실등전(張實等傳)」
100권 「고구려등전(高句麗等傳)」
101권 「저등전(氐等傳)」
102권 「서역전(西域傳)」
103권 「연연등전(蠕蠕等傳)」
104권 「자서전(自序傳)」

※ 105권 ~ 114권은 志에 해당. 위서 문서 참고

[ 본기(本紀) ]
1권 「송본기상(宋本紀上)」
2권 「송본기중(宋本紀中)」
3권 「송본기하(宋本紀下)」
4권 「제본기상(齊本紀上)」
5권 「제본기하(齊本紀下)」
6·7권 「양본기상·중(梁本紀上·中)」
8권 「양본기하(梁本紀下)」
9권 「진본기상(陳本紀上)」
10권 「진본기하(陳本紀下)」

[ 열전(列傳) ]
11·12권 「후비전(后妃傳)」
13·14권 「송종실급제왕전(宋宗室及諸王傳)」
15권 「유목지등전(劉穆之等傳)」
16권 「왕진악등전(王鎮惡等傳)」
17권 「유경선등전(劉敬宣等傳)」
18권 「조륜지등전(趙倫之等傳)」
19권 「사회등전(謝晦等傳))」
20권 「사홍미전(謝弘微傳)」
21권 「왕홍전(王弘傳)」
22권 「왕담수전(王曇首傳)」
23권 「왕탄등전(王誕等傳)」
24권 「왕유지등전(王裕之等傳)」
25권 「왕의등전(王懿等傳)」
26권 「원담전(袁湛傳)」
27권 「공정등전(孔靖等傳)」
28권 「저유지전(褚裕之傳)」
29권 「채곽전(蔡廓傳)」
30권 「하상지전(何尙之傳)」
31권 「장유전(張裕傳)」
32권 「장소전(張邵傳)」
33권 「범태등전(范泰等傳)」
34권 「안연지등전(顔延之等傳)」
35권 「유담등전(劉湛等傳)」
36권 「양흔등전(羊欣等傳)」
37권 「심경지등전(沈慶之等傳)」
38권 「유원경전(柳元景傳)」
39권 「은효조등전(殷孝祖等傳)」
40권 「노상등전(魯爽等傳)」
41권 「제종실전(齊宗室傳)」
42·43권 「제고제제자전(齊高帝諸子傳)」
44권 「제무제제자·제문혜제자·명제제자전(齊高帝諸子·文惠諸子·明帝諸子傳)」
45권 「왕경칙등전(王敬則等傳」
46권 「이안인등전(李安人等傳)」
47권 「순백옥등전(荀伯玉等傳)」
48권 「육징등전(陸澄等傳)」
49권 「유고지등전(庾杲之等傳)」
50권 「유환등전(劉瓛等傳)」
51·52권 「양종실전(梁宗室傳)」
53권 「양무제자전(梁武帝諸子傳)」
54권 「양간문제자·원제제자전(梁簡文帝諸子·元帝諸子傳)」
55권 「왕무등전(王茂等傳)」
56권 「장홍책등전(張弘策等傳)」
57권 「심약등전(沈約等傳)」
58권 「위예등전(韋叡等傳)」
59권 「강엄등전(江淹等傳)」
60권 「범수등전(范岫等傳)」
61권 「진백지등전(陳伯之等傳)」
62권 「하창등전(賀瑒等傳)」
63권 「왕신념등전(王神念等傳)」
64권 「강자일등전( 江子一等傳)」
65권 「진종실제왕전(陳宗室諸王傳)」
66권 「두승명등전(杜僧明等傳)」
67권 「호영등전(胡穎等傳)」
68권 「조지례등전(趙知禮等傳)」
69권 「심형등전(沈炯等傳)」
70권 「순리전(循吏傳)」
71권 「유림전(儒林傳)」
72권 「문학전(文學傳)」
73·74권 「효의전(孝義傳)」
75·76권 「은일전(隐逸傳)」
77권 「은행전(恩倖傳)」
78·79권 「이맥전(夷貊傳)」
80권 「적신전(賊臣傳)」
(1) 본명이 주철호(周鐵虎)로 당태조로 추존된 이호(李虎)를 피휘하여 무(武)로 개칭되었다.

[1] 산둥성 린이시의 일부. 당시에는 서주 소속이었다.[2] 이를 역사 용어로 교치(僑置)라고 한다. '교'(僑)자는 교민, 화교 할 때의 그 '교'자인데, 화교 집단 중에서 가장 오래된 부류가 명나라때 이주한 동남아시아 지역의 화교인 것을 고려할 때, 그 이전의 고대~중세 중국사의 범위에서 이 '교'(僑)자가 쓰이는 맥락의 대다수는 영가의 난으로 인한 강남 피난으로 보면 된다. 또한 여기에 숨어있는 함의는, 마치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진출해서 원래 지명은 무시하고, '뉴잉글랜드', '뉴암스테르담' 등의 철저히 자신들 본위의 지명을 붙였던 경우가 있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강남 지역에도 원래 지명이 분명히 있었는데도 그것을 무시하고서는 화북의 원래 지명을 베이스로 하여 원래 지명을 대체한 경우가 있다는 데 있다. 남난릉 말고도 '남서주', '남예주', '남연주' 등 예시는 여럿 더 있다. 따지고보면 아메리카보다도 심한 것이, 유럽인들에게 있어서 당시 아메리카는 너무나 멀어서 교류도 당연히 없었던(근세의 소위 아메리카 '발견' 이전에도 아메리카에 바이킹의 흔적이 있다고는 하지만...) 곳이라지만, 4세기의 중원(화북)인들에게 있어서 강남은 전혀 그런 곳이 아니었다. 푸젠-광둥-광시 등의 남중국해 연안 지역처럼 화북과의 거리가 무시무시하게 멀면 또 모를까... 그런데도 비슷하게 흘러갔다는 것은, 강남 지역이 여전히 중화세계의 소위 '내부 식민지'정도밖에 안 되었다는 방증이 된다.[3] 현 장쑤성 창저우시: 건강(난징)에서 그리 멀지 않다.[4] 13세 때 장남 소색, 31세 때 장손 소장무, 46세 때 증손 소소업과 53세 때 소소문을 차례대로 봤다.[5] 이 시절 52세는 현대로 치면 72세 정도 되는 고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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