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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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량 초대 황제 무제 | 武帝 | |
출생 | |
즉위 | |
사망 | |
능묘 | 수릉(修陵) |
재위기간 | 남제의 양국공(梁國公) |
남제의 양왕(梁王) | |
초대 황제 | |
역대고인상찬에 실린 초상화 |
자세한 내용은 무제(양)/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
생전에 인도에서 '선(禪)'을 전파하러온 고승 달마도 그를 만난 적이 있으나, 자신을 중국의 아육왕이라 하고,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며 얼마만큼의 공덕이 되겠느냐고 달마 대사에게 질문하였으나 달마는 한마디로 "무(無)"라고 하였다. 선업선과 악업악과의 유위적이고 외적인 공덕이 아니라, 실제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에 도달하는 무위적이고 내적인 공덕에 비할 바 없다는 의미라고 한다. 김용옥 등은 이를 실화가 아니라 맹자와 양혜왕의 이야기 구조를 그대로 따와서 만든 은유법라고 풀었다.
한 야사에 따르면 이에 열을 받은 무제는 자객을 보내 달마를 암살(혹은 독살)하고는 위선적으로 장례를 치러주었는데, 탑에서 짚신 한 짝만 두고 살아나와 서쪽으로 내빼 영영 사라졌다고 전한다. 이때 추격하는 군사들을 큰 강에서 갈대 하나를 꺾어 수상스키 타듯 따돌렸다고 한다. 짚신 나머지 한 짝은 막대에 꿴 체였다. 물론 실제 역사 기록에 따르면 달마는 양무제 치세에 죽었으니 그의 때 맞춘 죽음에 보태어 만든 이야기로 보인다. 내용이 조금 다른 야사에 의하면 양무제는 달마를 죽이지는 않고 단순히 궁에서 보냈다. 이후 당대의 고승인 지공(志公)을 만나 달마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뒤늦게 깨닫고 사람을 보내 달마를 불러들이려 했으나 지공이 '너무 늦었습니다. 모든 백성을 보낸다고 해도 결코 돌아오지 않으실 분입니다.'라고 만류해서 포기했다는 이야기이다.
애초에 달마의 기록들이 하나같이 전설 수준인 데다, 불교에 그토록 심취한 황제가 불교에서 죄악시하는 살생을 저질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는 선종의 달마 띄워주기 과정에서 황제를 끌어들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게다가 양무제가 달마의 열반 이후 그의 깨우침을 기리며 친히 추모비를 세워줬다는 기록도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야사에 따르면 이에 열을 받은 무제는 자객을 보내 달마를 암살(혹은 독살)하고는 위선적으로 장례를 치러주었는데, 탑에서 짚신 한 짝만 두고 살아나와 서쪽으로 내빼 영영 사라졌다고 전한다. 이때 추격하는 군사들을 큰 강에서 갈대 하나를 꺾어 수상스키 타듯 따돌렸다고 한다. 짚신 나머지 한 짝은 막대에 꿴 체였다. 물론 실제 역사 기록에 따르면 달마는 양무제 치세에 죽었으니 그의 때 맞춘 죽음에 보태어 만든 이야기로 보인다. 내용이 조금 다른 야사에 의하면 양무제는 달마를 죽이지는 않고 단순히 궁에서 보냈다. 이후 당대의 고승인 지공(志公)을 만나 달마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뒤늦게 깨닫고 사람을 보내 달마를 불러들이려 했으나 지공이 '너무 늦었습니다. 모든 백성을 보낸다고 해도 결코 돌아오지 않으실 분입니다.'라고 만류해서 포기했다는 이야기이다.
애초에 달마의 기록들이 하나같이 전설 수준인 데다, 불교에 그토록 심취한 황제가 불교에서 죄악시하는 살생을 저질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는 선종의 달마 띄워주기 과정에서 황제를 끌어들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게다가 양무제가 달마의 열반 이후 그의 깨우침을 기리며 친히 추모비를 세워줬다는 기록도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눈으로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고(見之不見, 견지불견)
맞이해서 만나고도 뜻을 맞지 못했으니(逢之不逢, 봉지불봉)
예고 지금이고(古之今之, 고지금지)
후회하고 한스럽구나(悔之恨之, 회지한지)
다른 야사에 따르면 살생을 금지했던 불교의 교리에 따라서 양무제는 기존의 사형 제도를 폐지했다. 대신 새로운 형벌을 만들어 냈는데, 누각을 하나 짓고 중죄인에게 새 깃털로 만든 날개를 달아준 다음에 누각 위에서 스스로 줄 없는 번지 점프를 하게 하는 형벌이었다. 누각에서 뛰어내렸을 때 살아남은 죄인은 용서를 해주기로 했으나 실제로 그런 일이 있지는 않았다. 단, 이 야사는 버전이 워낙 다양해서 양무제가 아닌 다른 황제의 일화로 소개되기도 한다.
또다른 야사는 애초에 소연 역시 제나라의 황족이었기 때문에 굳이 국호를 바꾸지 않아도 되었지만 동족혐오로 제나라 황족들의 막장짓거리에 질려 국호를 양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가 사후에 안장된 수릉(修陵)은 강소성(江蘇省) 단양시(丹陽市) 형림향(荊林鄕) 삼성항(三城巷)에 위치해 있으며 안타깝게도 무덤을 포함한 봉분이 현재에 와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곳에 위치한 동상 기린(麒麟)과 천록(天祿)은 당시 시대의 여러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는 작품으로 꼽히며 특히 손실된 우측 기린과는 다르게 좌측 천록은 멀쩡하기 때문에 역사가들 사이에서 회자된다.
남조를 건립한 4명의 황제 중 유일하게 신장이 기록되지 않은 황제로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자치통감(資治通鑑)』에 기록된 소윤(蕭綸)의 일화에서 「마침내 작고 마른 것이 황제와 비슷한 노인을 찾아서」라는 구절을 봤을 때 실제로 그렇게 큰 키는 아니었던 것 같다. 다만 이 당시 소연의 나이가 60을 넘었기 때문에 신장이 크게 줄었을 수도 있다. 소연은 남조 건립자 중 38세로 즉위했는데 공교롭게도 넷 중에 47년이라는 긴 치세와 85세까지 장수했다. 다른 황제들은 즉위 당시 나이가 모두 50을 넘긴 상태였다.
소연은 역대 육조의 황제 중 38세로 황제에 올랐는데 역대 육조 건국자 중 가장 어리다. 반대로 붕어할 당시 나이는 만 85세로 육조 황제 중에 가장 장수했다. 그의 자 숙달(叔達)은 진의 안평헌왕(安平獻王) 사마부(司馬孚)와 같은데 공교롭게도 작은형 소부(蕭敷)는 자가 중달(仲達)이고 소창(蕭暢)은 자가 계달(季達)이다.
양의 인물 중 가장 장수한 인물이다. 황족들은 물론이고 제(齊)를 섬긴 신하들 심지어는 송(宋)을 섬긴 신하들 보다 장수했으며 두 번째는 수없이 소연의 징소를 받고도 응하지 않은 하윤(何胤)이며 세 번째는 삼조를 섬긴 명산빈(明山賓)으로 85세까지 살았다. 당시 평균 수명이 마흔 근처 인것을 보면 엄청나게 장수한 것이다.
동아시아 불교에서 스님들이 고기를 못 먹는다는 인식은 이 사람의 영향이 가장 큰데 이를 단주육문(斷酒肉文)이라고 한다. #
이 인물이 장수한 덕분에 양 황제들의 평균 수명은 49.5세로 육조 군주 중 가장 높다. 두 번째는 남진이며 가장 낮은 나라는 유송으로 평균 수명이 29.5세다. 이렇게 낮은 이유는 당시 폭군들이 즐비했기 때문에 단명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위진남북조시대와 군주들 전체가 평균수명이 낮은 편이다. 그나마 촉한은 60대인데 유비와 유선 모두 60을 넘겼기 때문이다.
남조를 건립한 4명의 황제 중 유일하게 신장이 기록되지 않은 황제로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자치통감(資治通鑑)』에 기록된 소윤(蕭綸)의 일화에서 「마침내 작고 마른 것이 황제와 비슷한 노인을 찾아서」라는 구절을 봤을 때 실제로 그렇게 큰 키는 아니었던 것 같다. 다만 이 당시 소연의 나이가 60을 넘었기 때문에 신장이 크게 줄었을 수도 있다. 소연은 남조 건립자 중 38세로 즉위했는데 공교롭게도 넷 중에 47년이라는 긴 치세와 85세까지 장수했다. 다른 황제들은 즉위 당시 나이가 모두 50을 넘긴 상태였다.
소연은 역대 육조의 황제 중 38세로 황제에 올랐는데 역대 육조 건국자 중 가장 어리다. 반대로 붕어할 당시 나이는 만 85세로 육조 황제 중에 가장 장수했다. 그의 자 숙달(叔達)은 진의 안평헌왕(安平獻王) 사마부(司馬孚)와 같은데 공교롭게도 작은형 소부(蕭敷)는 자가 중달(仲達)이고 소창(蕭暢)은 자가 계달(季達)이다.
양의 인물 중 가장 장수한 인물이다. 황족들은 물론이고 제(齊)를 섬긴 신하들 심지어는 송(宋)을 섬긴 신하들 보다 장수했으며 두 번째는 수없이 소연의 징소를 받고도 응하지 않은 하윤(何胤)이며 세 번째는 삼조를 섬긴 명산빈(明山賓)으로 85세까지 살았다. 당시 평균 수명이 마흔 근처 인것을 보면 엄청나게 장수한 것이다.
동아시아 불교에서 스님들이 고기를 못 먹는다는 인식은 이 사람의 영향이 가장 큰데 이를 단주육문(斷酒肉文)이라고 한다. #
이 인물이 장수한 덕분에 양 황제들의 평균 수명은 49.5세로 육조 군주 중 가장 높다. 두 번째는 남진이며 가장 낮은 나라는 유송으로 평균 수명이 29.5세다. 이렇게 낮은 이유는 당시 폭군들이 즐비했기 때문에 단명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위진남북조시대와 군주들 전체가 평균수명이 낮은 편이다. 그나마 촉한은 60대인데 유비와 유선 모두 60을 넘겼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무제(양)/가족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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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족"이라고는 하나, 무제 소연은 남제의 시조인 초대 황제 소도성의 9촌 조카이다. 남제 자체가 고작 23년만에 망한 나라라서 시조의 항렬 한단계 아래인 사람이 멸망시켜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남제의 황제는 얼핏 보면 여러명 같지만 1년만에 반란으로 죽은 황제나 몇달짜리 바지황제도 있을만큼 별 의미없는 황제들이 많아 나라 역사가 짧았다.[2] 헌데 9촌이면 현대에서나 멀다고 느껴지지 일족이 집성촌을 이루던 고대에는, 더군다나 황족이라면 비록 '당외'로 가까운 혈족이라고 보기는 어려워도 결코 먼 촌수가 아니다. 사실 현대에도 윗대가 외동이라서 (출산율이 높던 시대에도 일제강점기 징용과 한국전쟁 등으로 인해 몇 대 독자 가문이 심심찮게 있었고 이들은 병역도 독자(獨子) 사유로 인해 면제나 방위 판정을 받았다) 6촌, 8촌 형제 등이 없으면 10촌, 12촌 형제 정도까지는 마냥 먼 친척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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